비평

단어를 걷게 하는 방식 — 배진성 시인의 시 《산책》에 대한 새로운 읽기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단어를 걷게 하는 방식 — 배진성 시인의 시 《산책》에 대한 새로운 읽기 2026.05.04
단어를 걷게 하는 방식 — 배진성 시인의 시 《산책》에 대한 새로운 읽기

산책

시인 배진성

산책은 살아있는 책이다

산책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책이다

내가 산 책 중에서

내가 가장 여러 번

정독하는 책은 자연이다

산책은 자연이다

자연은 산책이다

산책은

자연을 읽으며

밑줄을 긋는 일이다

산책은 시간을 주고 산다

시간으로 산 책

그리하여 산책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길이다

단어를 걷게 하는 방식

— 배진성 시인의 시 《산책》에 대한 새로운 읽기

익숙한 단어 하나가 걸음을 시작한다. ‘산책’이라는 말은 더 이상 하나의 낱말로 머물지 않는다. 시인은 그것을 풀어헤친다. ‘산 책’으로 갈라지는 순간, 의미는 균열이 아니라 확장을 얻는다. 이 시의 참신함은 바로 그 미세한 틈에서 시작된다.

보통 언어는 고정된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로 쓰인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언어가 스스로를 해체하고 다시 조립한다.

‘산책’은 걷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산 책’, 즉 사서 얻은 책이 된다. 여기서 독자는 잠시 멈칫한다. 걷고 있는 것인지, 읽고 있는 것인지, 혹은 사들이고 있는 것인지 분간이 흐려진다. 이 흐림이 곧 이 시의 핵심 장치다.

이러한 언어의 분절은 단순한 언어유희에 머물지 않는다. 외려 의미를 낡은 자리에서 끌어내어 다른 자리로 옮기는 정교한 사유의 전략이다.

“시간으로 산 책”이라는 구절에 이르면, 언어유희는 철학으로 깊어진다. 돈이 아닌 시간으로 ‘사는’ 책, 다시 말해 경험으로 축적되는 삶의 문장들이라는 뜻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여기서 ‘산’은 구매의 동사가 아니라 존재의 방식으로 전환된다.

이 시의 유쾌함은 가벼움에서 나오지 않는다. 외려 깊이를 숨긴 채 미소를 건네는 데서 비롯된다. 단어 하나를 비틀어 놓았을 뿐인데, 삶의 인식 방식 전체가 슬며시 이동한다. 자연을 읽는다는 표현 역시 그러하다. 시인은 자연을 감상하지 않는다. 자연 속을 걸으며 밑줄을 긋는다.

이때 밑줄은 눈으로 긋는 것이 아니라 시간으로 긋는 것이다. 인간의 삶 자체가 하나의 독서 행위로 재해석된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이 시가 보여주는 ‘낯설게 하기’의 방식이다. 거창한 수사 없이, 일상어 하나를 분리하는 것만으로 독자의 인식을 전환시킨다. 이는 언어를 장식하는 시가 아니라, 언어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시다. 익숙함을 해체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감각을 심는 방식. 그것이 이 시가 지닌 미학적 힘이다.

배진성 시인의 《산책》은 걷는 이야기가 아니다. 단어가 스스로 걸어 나가는 이야기이며, 의미가 이동하는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독자는 그 길 위에서 비로소 깨닫는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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