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비 내리는 종묘에서 만난, 시간을 담그는 사람, 옥샘정 전순자 대표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비 내리는 종묘에서 만난, 시간을 담그는 사람, 옥샘정 전순자 대표 2026.05.05
비 내리는 종묘에서 만난, 시간을 담그는 사람, 옥샘정 전순자 대표

□ 옥샘정 전순자 대표

비 내리는 종묘에서 만난, 시간을 담그는 사람, 옥샘정 전순자 대표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빗줄기는 오래된 시간을 깨우듯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 종묘의 마당은 젖은 돌결마다 깊은 숨을 품고 있었고, 그 위를 걷는 발걸음조차 낮아졌다.

그날, 비는 단순한 날씨가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하나의 배경이었고, 오래된 전통과 현재의 삶이 겹쳐지는 장막 같은 것이었다.

그곳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옥샘정 장독대의 주인장, 전순자 대표였다. 이름을 듣는 순간부터 이미 따뜻함이 먼저 다가왔다.

전순자.

부르기만 해도 손끝에 온기가 남는 이름이다. 그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오랜 시간 발효된 삶의 결처럼 느껴졌다.

그날 그녀는 청주 유네스코 회원의 자격으로 서울 종묘 제례에 참여하고 있었다. 전통을 지키는 사람들의 자리에서, 그녀는 유난히도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녹아 있었다. 의식 속에서 그녀의 움직임은 과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흐려지지도 않았다. 마치 오래 숙성된 장처럼,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분명한 깊이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만드는 것은 된장과 고추장, 간장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단순한 음식이라 부르기에는 부족하다. 그것은 시간의 기록이었고, 손길의 철학이었으며, 사람의 온기가 담긴 한 그릇의 삶이었다.

옛날 어머니의 손길처럼, 그녀는 재료를 만지고, 기다리고, 지켜본다. 장은 서두른다고 완성되지 않는다. 기다림 속에서 비로소 제 맛을 찾는다.

그녀의 삶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청주 된장마을. 그곳은 단순한 생산 공간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직접 장을 담그는 체험의 장이다.

아이들이 손으로 콩을 만지고, 장애인 연합회원들이 함께 웃으며 항아리를 채운다. 그 과정 속에서 사람들은 단순히 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의 시간을 만진다. 기다림을 배우고, 손의 기억을 되살리며, 함께하는 기쁨을 익힌다. 그렇게 만들어진 장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또 다른 시간을 이어간다.

전순자 대표의 미소는 참으로 맑았다. 과장되지 않은 웃음, 그러나 깊은 신뢰를 주는 표정. 그 미소에는 무언가를 증명하려는 의지가 없다. 이미 충분히 살아냈다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평온이 있었다. 그것은 세월이 만들어낸 것이고, 반복된 손길이 다져온 것이며, 수없이 기다려온 시간의 결실이었다.

정원에 들어서면 수백 개의 장독이 줄지어 서 있다. 그 모습은 하나의 풍경이 아니라, 하나의 문장처럼 읽힌다. 각 항아리는 저마다의 시간을 품고 있다. 비를 맞고, 바람을 지나고, 햇빛을 머금으며 장을 익힌다. 그 속에는 보이지 않는 변화가 끊임없이 일어난다. 사람의 삶도 그러하듯, 겉으로는 고요해 보이지만 안에서는 깊은 움직임이 이어진다.

그 장독대 앞에 서면, 시간이 서두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빠르게 완성되는 것들은 오래 남지 않는다. 그러나 천천히 익어가는 것들은 사람의 기억 속에 오래 머문다. 전순자 대표가 만들어온 삶은 바로 그런 종류의 시간이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장처럼 익어 있었다. 부드럽고, 깊고, 편안한 빛. 말없이도 많은 것을 전하는 표정이었다. 그 미소를 바라보는 순간, 장독대에 담긴 수많은 시간들이 한 사람의 얼굴로 응축되어 있는 듯했다.

종묘에서의 만남은 짧았지만, 그 여운은 길게 남았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지만, 그 비는 더 이상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외려 오래된 시간을 씻어내며 새로운 의미를 드러내는 물처럼 느껴졌다.

사람은 무엇으로 남는가. 이름으로 남는가, 아니면 업적으로 남는가. 전순자 대표를 보며 떠오른 답은 단순했다. 사람은 결국 ‘온기’로 남는다. 누군가의 손끝에 남아 있는 기억, 함께 웃었던 시간, 그리고 기다림 속에서 배운 삶의 방식으로 남는다.

그녀의 장은 발효되고 있었고, 그녀의 삶 또한 여전히 익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숙성의 향기는 이미 많은 사람들의 삶 속에 스며들고 있었다.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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