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진성 시인의 《달과 6펜스》 — 낮의 은화에서 밤의 달로 돌아가는 영혼의 항해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배진성 시인의 《달과 6펜스》 — 낮의 은화에서 밤의 달로 돌아가는 영혼의 항해 2026.05.08
□ 배진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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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시인 배진성
은화가 환하다
은화가 환하게 반짝인다
은화는 대낮에 반짝인다
은화는 태양을 좋아한다
은화들이
태양을 향해
줄을 서고 있다
태양은 은총을 내린다
달은 밤에 더 환하다
낮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밤에는 은화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나도 한 때
짤랑거리던 은화였다
이제는 돌아가야만 한다
나는 밤과 더 어울린다
이어도공화국에
달이 환하게 피어난다
고요는 넓이보다
깊이가 더욱 아름답다
고요는 고독하다
고독해서 깊어진다
이어도공화국이
더욱 환하게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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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성 시인의 《달과 6펜스》
— 낮의 은화에서 밤의 달로 돌아가는 영혼의 항해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사람들은 대개 태양 아래에서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려 한다.
더 밝은 자리, 더 많은 박수, 더 높이 걸린 명패를 향해 몸을 기울인다. 세상은 오래도록 그것을 성공이라 불러 왔다.
어떤 사람들은, 한 생의 중턱을 지나면서 비로소 깨닫는다. 태양이 모든 빛의 완성은 아니라는 것을. 너무 환한 빛은 존재의 깊이를 지워버린다는 것을.
배진성 시인의 《달과 6펜스》는 바로 그 깨달음 이후의 언어다. 이 시는 세상의 중심을 향해 달려가는 시가 아니다. 외려 중심에서 비켜나, 자기 영혼의 적막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한 인간의 내면 기록이다. 짧은 시지만, 그 안에는 한 사람의 생애와 철학, 그리고 문학적 귀향이 응축되어 있다.
“은화가 환하다 / 은화가 환하게 반짝인다”
시는 처음부터 눈부시다.
그 빛은 따뜻하지 않다. 은화는 대낮에 반짝이며 태양을 좋아한다. 여기서 은화는 단순한 화폐가 아니다. 세속의 가치이며, 인간이 서로를 평가하는 차가운 기준이다.
사람들은 태양 아래 줄을 선 은화처럼 살아간다. 인정받기 위해 빛나고, 선택받기 위해 반짝인다. 태양은 그 위에 은총처럼 빛을 내린다. 그 빛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늘 더 강한 빛 앞에서 흔들리는 반사된 영광에 불과하다.
그러나 시인은 어느 순간 그 환한 대열에서 몸을 뺀다.
“달은 밤에 더 환하다 / 낮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 전환은 단순한 분위기 변화가 아니다. 존재의 방향 자체가 바뀌는 순간이다. 달은 태양처럼 세상을 압도하지 않는다. 스스로 불타오르지도 않는다.
다만 어둠 속에서 고요히 떠 있다. 이상하게도 인간은 가장 깊은 밤에야 비로소 달을 올려다본다. 낮의 빛은 사물의 외곽을 드러내지만, 밤의 빛은 인간의 내면을 비춘다.
달은 외로운 존재들의 상징이 된다. 낮의 세계에서 밀려난 자들, 소란보다 침묵을 선택한 자들, 넓이보다 깊이를 택한 영혼들 말이다.
“나도 한 때 / 짤랑거리던 은화였다”
이 고백에 이르면 시는 갑자기 뜨거워진다. 시인은 스스로를 숨기지 않는다. 한때 자신 역시 세상의 중심 가까이에서 짤랑거리며 존재를 증명하려 했음을 인정한다. ‘짤랑거리다’라는 말에는 묘한 슬픔이 있다. 그것은 살아 있다는 소리이면서 동시에 비어 있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속이 빈 금속만이 그렇게 가볍게 흔들린다.
그는 돌아가려 한다. 어디로 돌아가는가.
밤으로 돌아간다. 고요로 돌아간다. 인간이 끝내 혼자여야만 만날 수 있는 자기 본성의 자리로 돌아간다.
이 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어는 단연 “이어도공화국”이다. 그것은 현실의 국가가 아니다. 지도에도 없는 나라다. 욕망과 속도가 지배하는 문명 바깥에 조용히 떠 있는 정신의 섬이다.
제주에서 작은 텃밭을 일구며 살아가는 배진성 시인의 삶은 바로 그 이어도의 실제 풍경처럼 느껴진다. 그는 세상을 버린 은둔자가 아니다. 세속의 소음을 오래 통과한 끝에, 인간이 마지막으로 지켜야 할 고요를 발견한 사람에 가깝다.
특히 이 작품은 제목부터 깊은 문학적 전이를 품고 있다.
W. Somerset Maugham의 소설 《달과 6펜스》는 화가 Paul Gauguin의 삶을 모티프로 삼아, 현실의 안정과 예술적 본능 사이에서 끝내 달을 선택한 인간의 이야기였다. 많은 이들이 바닥의 6펜스를 줍기 위해 고개를 숙일 때, 어떤 존재는 하늘의 달을 바라본다. 배진성 시인은 그 오래된 문학적 상징을 자신의 삶 안으로 조용히 환치한다.
그의 달은 성공의 반대편에 떠 있는 실패의 달이 아니다.
소음을 벗어난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깊이의 달이다.
“고요는 넓이보다 / 깊이가 더욱 아름답다”
이 문장은 단순한 시구가 아니다. 현대 문명 전체를 향한 느린 반론처럼 읽힌다. 사람들은 더 넓어지려 하지만, 시인은 더 깊어지려 한다. 넓이는 비교를 낳지만, 깊이는 침묵을 낳는다. 인간은 침묵 속에서야 비로소 자기 영혼의 숨소리를 듣게 된다.
마지막 구절에 이르면 이어도공화국은 하나의 이상향이 된다.
“이어도공화국이 / 더욱 환하게 고요하다”
얼마나 역설적인 문장인가.
고요한데 환하다. 외로운데 따뜻하다. 보이지 않는데 더욱 선명하다.
이 시가 말하는 것은 하나다. 인간을 끝내 빛나게 하는 것은 태양 아래의 박수가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는 밤에도 스스로 무너지지 않는 내면의 달빛이라는 사실이다.
시를 덮고 나면 오래도록 마음속에 잔광 하나 남는다.
짤랑거리던 은화의 소리는 사라지고, 대신 깊은 바다 위에 뜬 한 개의 달이 흔들린다.
그 달은 세상의 중심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가장 깊은 밤을 지나온 사람들에게는 끝내 가장 환한 얼굴로 떠오른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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