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깃털은 왜 조용히 날아가는가 — 고정애 시인의 《어느 새》를 읽다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시간의 깃털은 왜 조용히 날아가는가 — 고정애 시인의 《어느 새》를 읽다 2026.05.09
□ 고정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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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새
시인 고 정 애
마시던 커피가 차가워졌다
어느 새 식었는지
싸늘한 커피
해 떠서 일어나
지지고 볶고 하는 그 사이
낮밤이 그리 길고, 넉넉하던 하루가
노루꼬리 만큼 작아지더니
어느 새 저무는 하루
어느 새 바뀌는 계절
어느 새 사라지는 한 해
벽공碧空에 푸드득 높이 날아
아득히 사라져 보이지 않는
저기 저
어느
새


■
시간의 깃털은 왜 조용히 날아가는가
— 고정애 시인의 《어느 새》를 읽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시간은 발소리를 남기지 않는다.
문득 돌아보면 이미 지나가 있고, 붙잡으려 하면 손끝에서 새의 깃털처럼 흩어진다. 인간은 늘 시간을 살고 있다고 믿지만, 실은 시간의 뒤편에서 겨우 숨을 고르고 있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고 정애 시인의 《어느 새》는 바로 그 보이지 않는 시간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는 시다.
이 작품은 거대한 철학을 앞세우지 않는다.
뜨거웠던 커피 한 잔이 식어 있는 순간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그 단순한 일상의 발견 속에는 인간 존재 전체를 흔드는 깊은 자각이 숨어 있다. “마시던 커피가 차가워졌다”는 첫 문장은 단순한 상태 묘사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의 체온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식어가는 것을 바라보는 일이라는 사실을 시인은 너무도 담담하게 꺼내 놓는다.
특히 “지지고 볶고 하는 그 사이”라는 표현은 놀랍다.
삶의 분주함을 이렇게 생활의 냄새로 붙잡아내는 시어는 흔치 않다. 대단한 비극도 아니고 거창한 사건도 아니다. 사람은 늘 그렇게 하루를 살아낸다. 밥 짓고, 일하고, 걱정하고, 누군가를 챙기고, 또 견디는 동안 어느새 하루는 저문다. 시인은 바로 그 틈을 본다. 인간이 삶을 살아내느라 정작 삶이 지나가는 순간을 놓치고 있다는 사실을.
“노루꼬리 만큼 작아지더니”라는 표현 또한 압권이다.
하루의 길이를 숫자가 아니라 감각으로 줄여낸다. 노루꼬리라는 토속적 이미지 안에는 한국어만이 지닌 정서의 탄력이 살아 있다. 짧고도 귀여운 그 이미지 속에서 인생의 허망함과 애잔함이 동시에 스민다. 이것이 고 정애 시인의 힘이다. 거창한 언어로 삶을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오래 살아낸 사람만이 건져 올릴 수 있는 생활의 비유로 독자의 가슴을 흔든다.
무엇보다 이 시의 백미는 마지막 연이다.
“어느
새”
시인은 끝내 “어느새”를 해체한다.
이것은 단순한 행갈이가 아니다. 하나의 언어 속에 숨어 있던 두 개의 존재를 꺼내는 작업이다. “어느”는 알 수 없음이다. 인간의 인식 너머다. 그리고 “새”는 날아감이다. 시간이며 생명이며 계절이다. 결국 “어느새”란 알 수 없는 사이에 날아가 버리는 존재의 시간인 셈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배치다.
“어느”와 “새” 사이에 생긴 침묵의 간격. 바로 그 여백에서 독자는 늙음과 상실과 인생의 속도를 동시에 마주하게 된다. 시인은 말을 멈춘 자리에 더 큰 울림을 숨겨 놓았다. 언어보다 침묵이 더 많은 것을 말하는 순간이다.
고 정애 시인은 아흔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시 속에서 소녀다.
그의 시심은 비 오는 날 처마 밑에 숨어 수줍게 웃는 아이 같다가도, 어느 순간 동백꽃 속 점순이처럼 짓궂고 생기 있게 독자를 툭 건드린다. 그 맑은 천진성과 깊은 연륜이 한 몸 안에서 동시에 살아 움직인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늙음의 체념이 아니라 생의 투명함이 있다.
무엇보다 고 정애 시인은 시를 다루는 손끝이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다.
한 단어를 놓기 위해 얼마나 오래 마음속에서 문장을 씻어냈는지 보인다. 시어를 억지로 빛내지 않는다.
다만 가장 알맞은 자리에 놓는다. 그 절제와 조탁의 힘은 오늘의 많은 시인들이 쉽게 도달하지 못하는 경지다.
하여, 《어느 새》는 짧지만 오래 남는다.
읽고 나면 독자는 식어버린 커피잔 하나를 가만히 들여다보게 된다.
.”인생도 결국 그렇게 식어가고 있다.”
아무 소리 없이.
아무 예고 없이.
어느
새.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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