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솔내 시인ㅡ종이 위에만 머무는 시인은 오래 기억되지 않는다.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임솔내 시인ㅡ종이 위에만 머무는 시인은 오래 기억되지 않는다. 2026.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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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 연적硯滴
시인 임솔내
풍경 줄 끊고 나와
어느 선비의 붓 끝을 적셔 놀았도다
허공에 매달려 온 몸으로 쇠 종을 칠 때도
화선지 뽀얀 몸에 정사를 풀 때도
까무룩 ~ 까무러쳤었다
꽃물 듬뿍 찍어
한 번의 생 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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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빛으로 울어본 적 있는가
ㅡ임솔내 시인, 그의 시는 읽는 순간보다 읽은 뒤 오래 귓속에 남는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먹 한 방울이 검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침묵이 먼저 죽어야 했을까.
임솔내 시인의 「물고기 연적硯滴」은 단 몇 줄로 이루어진 짧은 시이지만, 그 안에는 한 예술가의 생애 전체가 응축되어 있다. 이 시는 단순히 연적을 의인화한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예술이 자기 몸을 어떻게 소모하며 한 줄의 생을 완성하는가를 보여주는 고백에 가깝다.
첫 행부터 낯설다.
“풍경 줄 끊고 나와”라는 구절은 이미 일상의 중력을 벗어난 존재의 탈주를 암시한다. 절집 처마 끝에서 흔들리던 풍경은 바람의 언어를 전하던 존재다. 시 속의 물고기는 그 줄을 스스로 끊고 나온다. 이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다. 정해진 울림의 세계를 떠나, 자기 운명의 먹빛 속으로 뛰어드는 존재의 결단이다.
이어 “어느 선비의 붓 끝을 적셔 놀았도다”에 이르면, 물고기 연적은 더 이상 사물이 아니다. 시인의 내면에서 살아 움직이는 또 하나의 혼이다. 연적은 물을 품어 붓을 적시는 존재다. 이 시에서 그것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언어 이전의 숨결이며 예술의 모태로 기능한다. 붓끝을 적신다는 것은 곧 한 인간의 사유와 정신을 깨우는 일이다. 물고기 연적은 시인을 시인 되게 하는 근원적 생명의 상징이다.
임솔내 시인의 진가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허공에 매달려 온 몸으로 쇠 종을 칠 때도 / 화선지 뽀얀 몸에 정사를 풀 때도”라는 대목은 예술 행위의 양면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하나는 허공을 향한 울림이고, 다른 하나는 육체를 통과한 욕망의 흔적이다.
여기서 “정사”라는 표현은 자극을 위한 언어가 아니다. 존재와 존재가 가장 깊숙이 서로를 스며드는 순간의 은유다. 시인은 정신과 육체, 성스러움과 관능, 수행과 욕망을 분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이 한 몸이라는 사실을 물고기 연적이라는 상징 안에 함께 녹여낸다.
특히 “까무룩 ~ 까무러쳤었다”는 구절은 놀랍다.
이 문장은 단순한 감탄이 아니다. 붓끝에서 생이 소진되는 황홀경이며, 예술이 자신을 태워 한순간 빛나는 극점의 상태다.
임솔내 시인의 시 세계가 왜 음악과 낭송, 퍼포먼스와 결합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녀의 시는 읽는 언어 이전에 먼저 몸으로 통과하는 리듬과 호흡을 지닌다. 그것은 활자보다 떨림에 가까운 언어다.
마지막 행은 압권이다.
“꽃물 듬뿍 찍어 / 한 번의 생 살고 싶었다”
여기서 꽃물은 단순한 색채가 아니다. 한 인간이 끝내 자기 생에 물들이고 싶었던 뜨거운 혼의 색이다. 이 시는 오래 사는 삶을 말하지 않는다. 단 한 번이라도 진하게 타오르는 생을 꿈꾼다. 예술이란 어쩌면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오래 남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번 깊게 물드는 일.
임솔내 시인은 한국 현대시 안에서 드물게 ‘몸의 예술’을 구현해온 시인이다.
그는 시를 종이 위에만 가두지 않았다. 낭송으로 호흡하게 했고, 음악으로 흔들리게 했으며, 퍼포먼스로 살아 움직이게 했다. 차마고도의 바람과 룽다의 기도, 재즈와 창, 무대와 침묵이 그의 시 안에서 서로 다른 장르의 경계를 허문다. 그래서 그의 시는 읽는 순간보다 읽은 뒤 오래 귓속에 남는다.
「물고기 연적」 또한 그렇다.
짧지만 쉽게 마르지 않는다.
먹빛처럼 번지고, 종소리처럼 오래 흔들린다.
시인은 독자에게 슬며시 다가와 소색인다.
“시란 한 존재가 자기 몸을 조금씩 깎아, 세상에 남기는 가장 뜨거운 물 한 방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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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솔내 시인은
종이 위에만 머무는 시인은 오래 기억되지 않는다.
어떤 시인은 자기 목소리로 시를 다시 태어나게 하고, 어떤 시인은 몸 전체를 악기처럼 흔들며 언어를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 임솔내 시인은 바로 그런 드문 예술가에 속한다.
임 시인을 떠올리면 먼저 한 사람의 시인보다, 오래 길 위를 걸어온 순례자의 이미지가 먼저 다가온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마다 언어를 주워 담고, 사람의 숨결이 머문 공간마다 시를 남겨두는 사람. 그의 시에는 활자 이전의 떨림이 있고, 낭송 이전의 호흡이 있다.
1999년 『자유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온 이후, 임솔내 시인은 쉼 없이 자신의 언어 세계를 넓혀왔다. 『나뭇잎의 QR코드』, 『아마존 그 환승역』, 『홍녀』 등 여섯 권의 시집은 단순한 작품집이 아니라, 한 예술가가 세계를 통과하며 남긴 감각의 기록들이다. 그의 시는 현실과 환상, 동양적 명상과 현대적 감각이 한 화면 안에서 공존한다. 그래서 어떤 시는 한 편의 불경 같고, 어떤 시는 재즈의 즉흥연주처럼 흐른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그녀가 시를 ‘읽는 언어’에만 가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현충일, 의병의 날, 창덕궁 인정전 행사, 명성황후 추모제, 청계천 오프닝 무대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국가적 행사와 역사적 공간에서 자신의 목소리로 시를 살아 움직이게 했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울려 퍼졌던 자작시 「아, 서울」은 단순한 낭송이 아니었다. 그것은 도시의 심장을 언어로 두드리는 하나의 퍼포먼스에 가까웠다.
그녀가 결성한 《한국시낭송총연합》 또한 의미가 깊다.
시를 혼자 빛나는 장르로 두지 않고, 더 많은 사람의 목소리 속으로 건네주려 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낭송가들이 그녀를 통해 배출되었다는 사실은, 임솔내 시인이 단순한 창작자를 넘어 ‘언어의 전달자’ 역할까지 수행해왔음을 보여준다.
2011년 차마고도 종주는 그녀의 예술 세계를 또 한 번 깊게 바꾸어 놓았다. 세계 각국의 전위 예술가들과 함께 25일 동안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시간과 숨결을 가장 느린 속도로 통과하는 일이다. 그 길 위에서 얻은 영감은 「차마고도」와 「룽다」 같은 작품으로 이어졌고, 다시 재즈와 창, 성악과 가곡으로 확장되었다. 시가 음악이 되고, 음악이 다시 시가 되는 순간이었다.
임솔내 시인의 작품을 읽다 보면 장르의 경계가 흐려진다.
시를 읽고 있는데 어느 순간 북소리가 들리고, 낭송을 듣고 있는데 문득 무용의 몸짓이 떠오른다. 그녀는 시를 활자에 가두지 않고 공기 속으로 흩뿌리는 시인이다.
세계 여러 나라로 번역된 「파란나비」, 「십장생 금침」, 「주홍불빛 우주」, 「반딧불이의 쇼생크탈출」, 「우화羽化」 등의 작품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그녀의 시가 국경을 넘을 수 있었던 이유는 언어의 기술보다 인간 보편의 숨결에 가까이 닿아 있기 때문이다. 슬픔과 황홀, 고독과 비상의 감각은 어느 나라 사람이든 결국 같은 가슴으로 이해하게 된다.
임솔내 시인의 시 세계를 한마디로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있다.
그녀는 시를 쓰는 사람에 머무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시를 읽게 했고,
시를 듣게 했고,
시를 걷게 했으며,
마침내 시를 살아 움직이게 만들었다.
하여, 그녀의 이름 앞에는 단순히 ‘시인’이라는 말만으로는 어딘가 부족하다.
그녀는 언어와 음악, 몸짓과 침묵을 함께 데리고 다니는 한 사람의 ‘종합 예술가’에 더 가깝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한 줄의 시를 품은 채,
세상의 바람 속을 천천히 건너가고 있을 것이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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