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왜 인간의 목소리를 오래 듣고 있는가 ― 시백 박정상 시집 《하늘의 귀》를 읽는다는 것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하늘은 왜 인간의 목소리를 오래 듣고 있는가 ― 시백 박정상 시집 《하늘의 귀》를 읽는다는 것 2026.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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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왜 인간의 목소리를 오래 듣고 있는가
― 시백 박정상 시집 《하늘의 귀》를 읽는다는 것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낮은 언어가 오래 살아남는 이유
문학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고들 말한다. 진짜 문학은 거울이기 이전에 ‘귀’에 더 가깝다. 사람의 울음과 숨결, 차마 말하지 못한 사연과 오래 묻어둔 침묵까지 가만히 듣고 있는 존재. 시백 박정상 시인의 시집 《하늘의 귀》는 바로 그런 문학이다.
이 시집은 세상을 향해 먼저 외치지 않는다. 오래 귀 기울이며 인간의 안쪽에서 들려오는 작은 떨림들을 천천히 받아 적는다.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누군가 우리 삶의 오래된 방 안에 조용히 들어와 가만히 등을 쓰다듬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오늘의 시단은 때때로 지나치게 화려한 언어와 관념의 미로 속으로 들어간다. 난해함은 깊이로 오해되고, 복잡한 수사는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소비되기도 한다. 박정상 시인의 시는 그 반대편에 서 있다. 그의 언어는 어렵지 않다. 너무 쉬워 자칫 스쳐 지나갈 수도 있다.
그 단순함 속에는 오랜 세월 살아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체온과 숨결이 배어 있다. 그것은 머리로 만든 문장이 아니라, 삶 속에서 오래 마모되고 단단해진 언어다. 마치 수십 년 손때 묻은 농기구처럼 투박하지만 믿음직하고, 오래 사용한 놋그릇처럼 닳았으나 깊은 빛을 품고 있다.
《하늘의 귀》를 읽다 보면 문득 잊고 살던 풍경들이 되살아난다. 허물어진 고향집 담장, 늦가을 밭고랑, 어머니의 손등, 겨울 저녁의 아궁이 불빛, 섬진강 물안개, 눈발 사이 흔들리는 국화 한 송이. 그의 시는 거대한 사건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살아오며 지나쳤던 작은 것들의 숨결을 다시 불러낸다. 그리고 그 평범한 풍경 속에서 인간 존재의 깊이를 발견하게 만든다.
특히 이 시집이 특별한 이유는 자연을 단순한 배경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박정상 시인에게 자연은 인간과 분리된 대상이 아니다. 사람과 함께 숨 쉬고, 함께 늙어가며, 함께 아파하는 또 하나의 생명이다. 강물은 사람의 마음처럼 흐르고, 꽃은 인간의 운명처럼 피고 지며, 별빛은 잃어버린 그리움처럼 오래 밤하늘에 남아 있다. 그의 시 속에서 자연은 풍경이 아니라 존재론이다. 인간이 끝내 돌아가야 할 자리이며, 삶의 본질을 다시 배우는 학교다.
무엇보다 《하늘의 귀》를 관통하는 가장 깊은 정서는 ‘회복’이다. 이 시집에는 절망이 없지 않다. 상처와 외로움, 후회와 그리움이 곳곳에 배어 있다. 시인은 그 슬픔 앞에서 무너지지 않는다. 무너진 밭고랑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폐허가 된 뜰에 다시 꽃을 심으며, 끝내 사람을 향해 마음을 내민다. “심으면 돼” “꽃이라도 피거라” 같은 문장은 단순한 생활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을 견디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오래된 위로이며, 다시 살아가게 하는 다짐이다.
박정상 시인의 시를 읽고 있으면 어느 순간 독자는 자신의 삶 또한 그 시 속에 놓여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는 잊고 있던 어머니를 떠올리고, 누군가는 끝내 하지 못했던 말을 생각하며, 또 누군가는 오래 닫아 두었던 마음의 문을 조용히 열게 된다. 좋은 시는 독자를 압도하지 않는다. 대신 독자의 삶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하늘의 귀》는 바로 그런 시집이다.
이 시집은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남긴다.
지금 당신은 무엇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가.
세상의 소음 속에서 정말 귀 기울여야 할 가장 낮고 작은 숨결을, 아직 잊지 않고 있는가.
《하늘의 귀》는 화려하게 빛나는 시집이 아니다. 그러나 오래 남는 시집이다. 달빛처럼 조용히 스며들어 어느새 마음 깊은 곳을 밝히는 시집. 오늘의 시대가 점점 사람의 목소리를 잃어갈수록, 박정상 시인의 시는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인간은 결국, 끝내 자기 마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언어를 그리워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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