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계 손현수 시인의 《혼란》을 읽다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윤계 손현수 시인의 《혼란》을 읽다 2026.05.15
□ 윤계 손현수 시인
■
혼란
시인 윤계 손현수
스쳐간 혼란의 바람 같은 그 이름 섬섬한 사랑
그가
불어주던 젊음의 멋 낭만을 띄운 하모니카 소리
한번 더 듣고 싶은
추억의 입김
아련히 성큼 지나갑니다
조용한 대숲 뒤 이지러진 달빛 사이로
이미 감춘 님의 기척
적막이 흐르는 깊은 저 하늘 끝에
쓸쓸히 웃는 별 하나
아슬히 보이는듯
오늘밤도 느리게 깜박입니다
■
달빛이 늙지 않는 이유
— 윤계 손현수 시인의 《혼란》을 읽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늦가을 저녁 산사에 가면,
바람조차 소리를 낮추는 시간이 있다.
대숲은 흔들리되 어지럽지 않고, 달빛은 희미한데도 이상하게 마음을 밝힌다.
윤계 손현수 시인의 《혼란》은 바로 그런 고요 속에서 들려오는 한 자락 하모니카 소리 같다.
크게 울리지 않는데 오래 가슴에 머문다.
이 시를 읽고 있으면 먼저 ‘늙음’이라는 말이 부끄러워진다.
세상은 자꾸 나이를 숫자로 세려 하지만, 어떤 영혼은 세월 속에서 오히려 더 맑아진다. 오래 비워낸 우물물처럼, 오래 닦인 놋그릇처럼, 손현수 시인의 시어는 군더더기를 잃어버린 대신 투명한 울림을 얻었다.
“스쳐간 혼란의 바람 같은 그 이름 섬섬한 사랑”
첫 문장부터 시는 우리를 억지로 끌어당기지 않는다.
대신 바람처럼 스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스침 하나가 오래 남는다.
‘섬섬한 사랑’이라는 표현은 참 곱다.
뜨겁다고도 하지 않고, 눈물겹다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 손끝에 닿았다가 사라지는 실바람처럼 사랑을 놓아둔다.
하여, 더 슬프고 더 아름답다. 젊은 날의 사랑이 불꽃이었다면, 이 시 속 사랑은 오래 말린 국화꽃 향기 같다. 눈에 띄지 않지만 가까이 가면 은은히 번진다.
“그가 불어주던 젊음의 멋 낭만을 띄운 하모니카 소리”
이 구절에서는 문득 오래된 흑백영화 한 장면이 떠오른다.
강변 둑길 어디쯤, 해 저무는 바람 속에서 누군가 하모니카를 불고 있고, 젊은 날의 웃음은 이미 저녁놀 너머로 건너갔는데도 그 숨결만은 아직 남아 있는 풍경.
하모니카는 사람의 숨으로 우는 악기다.
하여, 더 인간적이다.
손현수 시인은 그 숨결 하나로 지나간 청춘의 강물을 다시 흔들어 놓는다.
특히 아름다운 것은 이 시가 슬픔을 크게 울부짖지 않는다는 점이다.
“조용한 대숲 뒤 이지러진 달빛 사이로 이미 감춘 님의 기척”이라는 대목은 마치 수묵화의 여백 같다. 시인은 다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 말하지 않기에 오히려 더 많은 것이 마음에 번진다.
대숲은 바람을 숨기고,
달빛은 그리움을 숨긴다.
독자는 그 숨겨진 침묵 속에서 자기 삶의 그리움까지 함께 꺼내 보게 된다.
마지막의 “쓸쓸히 웃는 별 하나”는 이 시의 심장 같은 구절이다.
별은 울지 않는다.
다만 멀리서 천천히 깜박인다.
그 모습이 꼭 손현수 시인의 삶 같다.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시를 쓰고, 시를 낭송하고, 춤을 추며 살아가는 그의 모습은 단순한 예술 활동이 아니다. 그것은 생을 끝까지 아름답게 사용하려는 한 인간의 깊은 품격이다.
어떤 사람은 나이를 먹으며 점점 어두워지지만, 어떤 사람은 세월을 오래 통과한 뒤 오히려 달빛처럼 맑아진다. 손현수 시인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의 마음은 깊은 산골 암자 뒤편에서 흐르는 샘물 같다.
소리내어 자기를 자랑하지 않지만, 바라보고 있으면 절로 마음이 맑아진다.
그의 시를 읽으면 독자의 가슴도 함께 씻긴다. 오래 묵은 슬픔과 미움이 천천히 가라앉고, 잊고 있던 그리움 하나가 조용히 피어난다.
좋은 시는 사람을 흔드는 것이 아니라 맑게 만든다.
윤계 손현수 시인의 《혼란》은 바로 그런 시다.
이 시를 읽노라면
어느새
마음속에 작은 별 하나 켜진다.
시인은 슬며시 독자에게 다가가
소색인다.
“아름다운 노년이란
세월에 닳아가는 삶이 아니라,
점점 더 맑은 빛으로
사람의 마음을 비추는 일이라고”
ㅡ청람 김왕식

■
달빛을 불어 넣는 사람
— 윤계 손현수 시인께
청람 김왕식
세월은
사람의 어깨 위에
안온히 눈처럼 내려앉지만
어떤 영혼은
끝내 늙지 않는다는 것을
선생님을 뵈며 알았습니다
깊은 산사 뒤편
대숲 흔들리는 저녁이면
누군가
하모니카 하나 꺼내어
젊은 날의 바람을 불어 넣는 듯했습니다
그 숨결 지나간 자리마다
잊고 살던 별빛 하나
가슴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선생님의 시는
크게 울지 않습니다
다만
늦은 달빛처럼
조용히 사람 곁에 앉아
오래 아픈 마음을
천천히 쓰다듬습니다
세상은 자꾸
늙음을 저무는 일이라 말하지만
선생님은
낡아가는 시간을
맑아지는 빛으로 바꾸며 살아오셨습니다
춤추는 발끝에도 시가 흐르고
낭송하는 숨결마다
한 시대의 그리움이 맑게 씻겨 나갑니다
선생님은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삶 전체를
한 편의 서정으로 살아내는
드문 별빛 같은 분입니다
오늘도
적막한 하늘 끝 어디선가
선생님의 하모니카 소리
느리게 번져오면
지친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조용히
달 하나 떠오를 것입니다
부디 오래도록
그 맑은 숨결로
우리의 어두운 저녁마다
늙지 않는 달빛 하나
불어 넣어 주십시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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