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박송희 시인의 연둣빛으로 남은 오후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박송희 시인의 연둣빛으로 남은 오후 2026.05.17
박송희 시인의 연둣빛으로 남은 오후

연둣빛

시인 박송희

고슬밥 따끈한 웃국

엄마 밥상 그랬듯

별 반찬 그립지 않은 조촐

마주 나뉘는 정빛

가슴 녹아 뚝딱 한 그릇

누그러진 온갖 허기 연둣빛 인다

잔잔히 스치는 눈빛 언어

뒤풀이 바람 더해 뭘 할까

바삐 나는 구름 찻종에 한몫

쉬이 떠날 시간 새기는 다연

연신 싣고 조잘거리는 종달이

옛말 지금말 붙들린 촌각

꽃바람 취기

내일 놓고 모레 더 오래 오래

아기노릇 어른 꽃나들이 한창이다

연둣빛으로 남은 오후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낡은 찻잔 하나에도 계절은 스민다.

누군가는 밥을 먹고 돌아서지만, 어떤 사람은 그 한 끼 속에서 인간의 온도와 시간의 결까지 읽어낸다.

박송희 시인의 《연둣빛》은 바로 그런 시다. 이 시는 거창한 사유를 앞세우지 않는다.

읽고 나면 이상하게 마음 한쪽이 오래 따뜻하다. 마치 늦봄 햇살이 다녀간 자리처럼, 조용한 연둣빛이 가슴 안에 번져간다.

“고슬밥 따끈한 뭇국 / 엄마 밥상 그랬듯”이라는 첫 구절은 이미 한 편의 풍경화다. 여기에는 화려한 성찬도, 과장된 감탄도 없다.

다만 오래 사람을 살려온 생활의 체온이 있다. 시인은 뭇국 한 그릇을 통해 유년의 기억과 사람의 정을 동시에 끌어온다.

특히 ‘엄마 밥상’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가장 경계 없이 사랑받았던 원형의 자리다. 이 시의 따뜻함은 인위적이지 않다. 삶 깊숙한 곳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난다.

박송희 시인의 시를 읽고 있으면 자꾸 먼산을 바라보게 된다.

왜 그럴까.

아마 그의 시어들이 급하게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언어에는 오래 침잠한 사람의 숨결이 있다. 불경을 읽으며 마음을 낮추고, 서도와 전각으로 한 획 한 획 정신을 다듬어온 시간들. 먹빛이 번지는 화선지 앞에서 마음의 속도를 늦출 줄 아는 사람만이 이런 시를 쓸 수 있다. 박송희 시인의 문장은 설명보다 여백이 먼저 숨 쉰다. 그래서 읽는 이의 마음 또한 자연스레 고요해진다.

“마주 나뉘는 정빛”이라는 표현은 참으로 박송희다운 시어다.

정(情)을 빛으로 본 것이다.

사람 사이를 오가는 따뜻함을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은은히 번지는 빛의 결로 형상화했다. 그 빛 앞에서 “온갖 허기”가 누그러진다고 말하는 대목은 더욱 깊다. 인간의 허기는 단지 배고픔만이 아니다. 외로움이고, 그리움이며, 이해받고 싶은 마음이다. 시인은 뭇국 한 그릇과 눈빛 하나로 그 허기를 잠시 쉬게 만든다.

이 시의 진짜 아름다움은 ‘차담’의 순간에 있다.

인사동 어느 고즈넉한 공간에서 지인들과 둘러앉아 나눈 뭇국과 차 한 잔.

시인은 그것을 단순한 일상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구름 찻종”이라는 표현 속에서 찻잔은 이미 하늘이 되고, 사람들의 대화는 바람이 된다. 그렇게 현실은 시인의 내면을 통과하며 서정으로 변모한다.

“옛말 지금말 붙들린 촌각”이라는 구절 또한 놀랍다.

촌각처럼 짧은 시간 안에 옛사람의 정서와 지금의 숨결이 함께 앉아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단순한 대화 이상의 것이 흐른다. 인간과 인간이 서로를 오래 바라봐온 시간의 결이 있다. 이 시의 공간은 단순한 뒤풀이 자리가 아니라, 마음들이 잠시 세속의 속도를 내려놓고 숨을 고르는 작은 수행처처럼 느껴진다.

마지막 연의 “아기노릇 어른 꽃나드리 한창이다”는 참으로 환하다.

나이를 잊고 웃는 사람들, 잠시 세상 짐을 내려놓고 꽃바람 속을 걷는 존재들. 박송희 시인은 그 모습을 꾸미지 않고 담백하게 그려내지만, 외려 그래서 더 깊다.

삶이란 다시 천진으로 돌아가는 일임을 시인은 알고 있는 듯하다.

박송희 시인의 시는 화려하게 빛나지 않는다.

오래 바라볼수록 은은한 먹향처럼 번져온다.

그의 시 속에는 사람을 이기려는 언어가 아니라, 사람을 품으려는 마음이 있다.

하여, 그의 시를 읽고 나면 문득 말수가 줄어든다. 그리고 한동안 먼산을 바라보게 된다.

아마 좋은 시란, 끝내 사람의 마음을 안온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ㅡ청람 김왕식

박송희 시인께

― 연둣빛 찻잔 곁에서

두어 달 전

인사동 골목 끝

늦은 햇살이 기와 처마에 기대어 있던 자리에서

우리는

따끈한 뭇국 한 그릇 앞에 둘러앉았습니다

김청 시인과 허태기 시인

그리고 박송희 시인과 청람

말은 조용히 오갔으나

그날의 공기는 오래된 다완茶碗처럼 깊었습니다

뭇국 위로 피어오르던 흰 김은

마치 사람의 생애에서

차마 다 말하지 못한 그리움 같았고

찻잔 가장자리마다

낡은 문장들이 천천히 녹아내렸습니다

특히

김청 시인 아버님의 작품을 펼쳐놓고

함께 이야기 나누던 순간은

한 편의 시보다 더 시 같았습니다

누군가 남긴 삶의 흔적 앞에서

함부로 소리를 높이지 않고

잠시 침묵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풍경들

그 조용한 존중의 시간 속에서

나는 문득 깨달았습니다

아,

시란

사람을 오래 바라보는 마음이구나

박송희 시인,

시인께서는 그날의 작은 차담을

그저 지나가는 뒤풀이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뭇국 한 숟갈 속에도

사람의 온기를 담아내고

눈빛 하나에도

연둣빛 숨결을 불어넣어

끝내 한 편의 깊은 서정으로 피워내셨습니다

하여,

시인의 시를 읽고 나면

마음이 이상하리만큼 안온해집니다

마치

전각篆刻의 칼끝으로

욕심을 조금씩 덜어낸 자리처럼

먹을 갈며 오래 침잠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맑은 향기가

시어마다 배어 있습니다

그날

우리는 단지 뭇국을 먹은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온도를 나누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시인께서는

그 따뜻한 순간을

끝내 연둣빛으로 남겨두셨습니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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