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 ㅡ 수필가 정명순
비오는 날 ㅡ 수필가 정명순 2026.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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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
수필가 정명순
진짜 비가 온다
요즘 일기 예보는 거의 맞다
혹여나 비가 오지 않을 것인가 싶어 조금 의심할 여지없이 온다
흐리거나 비가 오면 모든 게
가라앉는다 마음이든 미세 먼지든 날리는 것들도 젖어서 납작 땅에 붙어 버린다
뜨거운 물을 마시던 나도 오늘은 부드러운 밀크커피를 마시고 있다
그냥 이것이 마시고 싶어졌다
창밖엔 어두침침하다 버스정류장엔 한 줄이 아닌 두줄이다 아마 우산 때문인 것 같다
버스가 쓰윽하고 지났는데도 전과는 달리 몇몇은 못 탔다
이유는 모르겠다
또 한 사람이 와 정류장 속으로 들어가 서있다
바람은 그리 불지 않는 것 같다
나무들은 더 초록색이 환해진다
초록색을 보고 있는 내 눈은 더 맑아지는 데 마음은 무겁다
비가 오면 냉면가게는 손님이 없다
그 이유도 있을 것이다
이 시간은 모든 의지들을 불러들이는 침묵의 시간이다
침울한 마음도 비 오는 날씨도 아랑곳없이 나의 의지가 단단하게 엮여서 슬픔 하나 없이 털털 털어 버리고 자리를 벅차고 일어나 새 마음으로 일터로 가리라
오늘을 향하는 저 먼 곳을 향하리라
저 잔바람에 납작 붙었던 것들도 들썩 거리는 것을 보았다
천만근 무거웠던 마음이나 저 젖었던 비닐들이나 천만근은 같다
모는 것은 잔바람에 들썩인다
바람은 치유의 미덕이 있는 듯하다
살짝만 불어줘도 마음이든 빨래든 비닐이든 뽀송뽀송해 진다
비가 내렸다 하더라도 바람이 있어
저절로 파도쳐
티끌하나 없이 쓸어 갔으니
오늘은 우리 모두가 무엇이 된듯이 멋진 꿈을 꾸며 다시 하루를 살아내 보기로 한다 비오는 날에
2026, 5. 20. 수요일. 비
□ 붙인 말
수요일엔 수채화 비가 내리고 있으니 수채화를 그리고 싶어지는 날인가 싶다
창밖으로 내려다보니
바람은 불고 너는 나무 같고
너의 머리는 풀 같이 그리고 싶어지는 마음이 든다
오늘은 그냥 풀 같은 너의 머리를 보며 풀 같이 풀어지는 너그러운 하루가 되길 바란다
ㅡ 비오는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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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물은 하늘에서 떨어지지만, 어떤 문장은 마음의 바닥에서 천천히 젖어 나온다.
이 글은 바로 그런 종류의 산문이다. 거창한 사건도 없고 극적인 갈등도 없다. 그러나 조용히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독자의 마음에도 비 한 줄기 스며든다. 그것은 날씨의 기록이 아니라 존재의 기압을 기록한 문장이기 때문이다.
「비오는 날」은 일상의 풍경을 통하여 인간 마음의 움직임을 섬세하게 포착한 생활 산문의 미덕을 지닌다. 무엇보다 이 글이 아름다운 이유는 비를 단순한 자연현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인간 내면의 무게와 연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흐리거나 비가 오면 모든 게 가라앉는다 마음이든 미세 먼지든”
이라는 문장은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정조다. 마음과 미세먼지를 나란히 놓는 감각은 참으로 생활적이면서도 시적이다. 인간의 우울 또한 공기 중 먼지처럼 떠다니다가 비를 만나 비로소 바닥으로 가라앉는다는 통찰이 숨어 있다.
특히 이 글은 사소한 장면을 매우 살아 있는 감각으로 붙든다.
“버스정류장엔 한 줄이 아닌 두줄이다 아마 우산 때문인 것 같다”라는 대목은 도시의 비 오는 풍경을 단숨에 눈앞에 세운다. 비 때문에 사람들의 간격이 달라지고, 우산 때문에 질서가 변형되는 모습은 아주 평범한 장면 같지만 그 안에는 인간 군상의 조용한 풍경화가 숨어 있다.
또 “버스가 쓰윽하고 지났는데도 전과는 달리 몇몇은 못 탔다”라는 문장은 이유를 설명하지 않기에 오히려 더 삶 같다. 세상에는 설명되지 않는 놓침들이 있기 때문이다. 인생 또한 늘 그렇게 지나간다. 이유를 다 알지 못한 채 몇 사람은 버스를 놓치고, 몇 사람은 다음 차를 기다린다.
이 산문이 더욱 깊어지는 지점은 후반부다. 글은 단순한 우울의 묘사에 머물지 않고, 비와 바람을 통해 존재 회복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천만근 무거웠던 마음이나 저 젖었던 비닐들이나 천만근은 같다”라는 문장은 매우 인상적이다. 마음과 비닐을 같은 무게로 바라보는 시선 속에는 삶을 거창하게 과장하지 않는 담백한 철학이 있다. 인간의 슬픔도 결국은 젖은 비닐처럼 바람 한 번에 들썩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뛰어난 부분은 바람에 대한 해석이다.
대개의 비 오는 산문들이 우울과 정적에 머문다면, 이 글은 바람을 등장시키며 정서를 환기한다.
“바람은 치유의 미덕이 있는 듯하다”
이 문장은 단순하지만 오래 남는다. 치유를 거대한 구원이나 철학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살짝 스쳐 가는 바람 하나로 설명한다. 마음이든 빨래든 비닐이든 결국은 마르게 된다는 깨달음. 이것은 오랜 삶 끝에야 도달하는 생활의 철학이다.
문장의 결 또한 좋다. 지나치게 꾸미지 않았고, 일부러 문학적이려 하지 않는다. 외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호흡 속에서 생활의 체온이 살아난다. 그래서 읽는 이로 하여금 “맞아, 나도 그런 날이 있었지” 하고 자기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좋은 산문은 설명보다 공감을 먼저 불러오는데, 이 글은 바로 그 힘을 지닌다.
뒤에 「붙인 말」 역시 흥미롭다.
“수요일엔 수채화 비가 내리고 있으니”라는 문장은 날씨를 회화적 감각으로 전환시킨다. 비를 단순한 기상이 아니라 수채화의 번짐처럼 받아들이는 시선이다.
또한 “너는 나무 같고 / 너의 머리는 풀 같이”라는 표현은 상대를 자연물로 바라보는 따뜻한 시적 감수성을 드러낸다. 인간을 경쟁과 기능의 존재가 아니라 바람에 흔들리는 풀과 나무처럼 바라보는 태도 속에서 이 글의 정서적 뿌리가 드러난다.
「비오는 날」은 비에 관한 글이 아니다.
젖어 있는 인간 마음이 어떻게 다시 들썩이며 살아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비는 내렸지만
끝내
절망으로 가라앉지 않는다.
ㅡ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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