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구름이 머물던 오후, 오래 머물고 싶은 사람 ㅡ청람 김왕식

구름이 머물던 오후, 오래 머물고 싶은 사람 2026.05.31
구름이 머물던 오후, 오래 머물고 싶은 사람

구름이 머물던 오후, 오래 머물고 싶은 사람

가을도 겨울도 아닌 어느 늦은 계절의 오후였다.

햇빛은 따뜻했으나 어딘가 쓸쓸했고, 바람은 차갑지 않았으나 이미 먼 곳의 겨울을 품고 있었다. 언덕 아래 길을 따라 한 중년의 신사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은갈색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가볍게 흔들렸다. 젊음의 검은빛이 모두 사라진 자리에 세월이 남긴 은빛과 갈색이 포개져 있었다. 그것은 늙음의 색이 아니었다. 수많은 계절을 지나온 나무의 결이었고, 오래된 시집 사이에 눌린 마른 꽃잎 같은 시간의 색이었다.

갈색 뿔테 안경테 너머로는 유난히 맑은 눈동자가 보였다. 세상을 오래 바라본 사람의 눈이었다.

그 눈에는 피로보다 호기심이 먼저 머물러 있었다. 아직도 길가의 들꽃 하나를 발견하면 걸음을 늦추고, 구름 한 조각에도 마음을 빼앗길 줄 아는 사람의 눈이었다.

그는 소매에 금장단추가 달린 네이비색 신사 재킷을 입고 있었다. 짙은 바다를 닮은 색이었다. 그 아래 옅은 겨자색 바지는 늦가을 들녘의 볕 마른 억새를 떠올리게 했다. 갈색 리갈 구두에는 수많은 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인생은 얼마나 높이 올랐느냐보다 어떤 길을 걸어왔느냐로 설명된다는 듯했다.

그의 손에는 시집 한 권이 들려 있었다. 표지는 소박했고 두께도 얇았다.

그는 그것을 귀한 보석함처럼 조심스럽게 품고 있었다. 세상에는 계약서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있고 숫자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 그는 시집 한 권을 들고 길을 걷고 있었다. 어쩌면 그 모습 자체가 이미 한 편의 시였는지 모른다.

신사는 언덕 위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길가의 들꽃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꽃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지나갈 때마다 작은 목례를 건네는 것 같았다.

언덕 꼭대기 가까이에는 낡은 벤치 하나가 놓여 있었다. 비와 바람을 오래 견딘 나무 벤치였다. 세월이 패놓은 주름은 마치 오래 살아온 사람의 얼굴 같았다.

신사는 그 벤치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난 사람처럼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앉았다. 무릎 위에는 시집을 올려놓고 두 손을 포갰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세상이 조용해졌다.

멀리서 들리던 자동차 소리도, 도시의 분주한 숨결도 한 장면의 영화가 끝난 뒤 천천히 사라지는 배경음악처럼 멀어졌다.

그의 시선은 먼산으로 향했다.

산등성이 위로 구름이 걸려 있었다. 햇살과 그림자가 섞여 은빛과 회색 사이를 천천히 떠도는 구름이었다. 그것은 산에 걸린 구름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억 위에 걸린 구름처럼 보였다.

젊은 날의 설렘.

첫사랑의 떨림.

가슴 아팠던 이별.

끝내 말하지 못한 그리움.

그 모든 것들이 형태를 잃고 하늘로 떠올라 구름이 된 듯했다.

신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바라보았다. 구름을 바라보고, 산을 바라보고, 바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의 생애를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모습 바라보며 불현듯 떠올린다.

사람은 누구나 아름다운 풍경을 좋아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그리운 것은 풍경이 아니라 사람이 된다. 여행지의 바다보다, 이름난 산보다,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결국 한 사람의 체온이다.

살다 보면 그런 사람이 있다.

처음 만났는데도 오래 알고 지낸 듯 편안한 사람. 특별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데도 자꾸 떠오르는 사람. 곁에 있으면 마음의 소음이 잦아드는 사람.

아마도 지금 저 벤치에 앉아 있는 신사가 그런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무엇을 가졌기에 저토록 평안할까.

아니, 어쩌면 무엇을 내려놓았기에 저토록 평안한 것일까.

오래 머물고 싶은 사람들은 대개 삶을 움켜쥐지 않는다. 손바닥을 펴고 살아간다. 더 많이 가지려 하기보다 이미 가진 것의 소중함을 안다. 그래서 그들의 얼굴에는 경쟁보다 평안이 먼저 깃든다.

그들은 말을 아끼고 침묵을 가꾼다.

깊은 강이 소리를 높이지 않듯,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듯, 삶을 오래 이해한 사람은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기보다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그래서 그들의 침묵은 차갑지 않다. 따뜻하다. 겨울 저녁 아궁이에 남아 있는 잔불처럼 은은한 온기를 품고 있다.

그들은 작은 것들에서 행복을 발견한다.

커피 한 잔의 향기, 비 온 뒤 흙냄새, 창가에 머문 햇살, 구름 한 조각, 저녁노을 하나.

누군가에게는 하찮은 풍경일지 모르지만 그들에게는 하루를 선물로 바꾸는 기적이다.

그들은 자연과 가까이 산다.

나무가 꽃을 피우고 잎을 떨구는 모습을 보며 삶을 배운다. 봄이 아무리 화려해도 결국 여름을 지나고, 여름이 아무리 뜨거워도 가을을 맞는다.

하여, 인생의 굴곡 앞에서도 지나치게 흔들리지 않는다. 모든 계절은 지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자기 안에 작은 우주를 품고 산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함께 있어도 자신을 잃지 않는다. 책 한 권과도 친구가 되고, 구름 한 조각과도 대화를 나눈다.

해서,사람들은 이상하게도 그들 곁에 오래 머물고 싶어 한다.

그때 바람이 불었다.

은갈색 머리카락 몇 가닥이 이마 위로 흩날렸다. 구름도 천천히 움직였다. 신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치 구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구름처럼 흘러온 자신의 시간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오후의 햇살은 점점 기울고 있었다.

네이비 재킷 위로 금빛이 내려앉고, 겨자색 바지 위로는 저녁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무릎 위의 시집은 아직 펼쳐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책 속의 시를 읽으러 온 것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세상이라는 더 큰 시집을 읽으러 왔는지도 모른다.

산은 한 줄의 시가 되고, 구름은 한 편의 은유가 되고, 바람은 보이지 않는 행간이 되어 그의 앞에 천천히 펼쳐지고 있었다.

그 풍경 속의 신사 또한 하나의 시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아름다운 얼굴을 매력이라 말한다.

그러나 세월이 알려주는 진실은 다르다.

오래 머물고 싶은 사람은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욕심과 화해하고, 외로움과 화해하고, 세월과 화해한 사람이다. 꽃처럼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으면서도 나무처럼 그늘을 내어주는 사람이다.

그날

고즈넉한 둔덕 위 벤치에 앉아 먼산의 구름을 바라보던 은갈색 머리의 신사는 어쩌면 한 사람이라기보다 인생이 오랫동안 정성껏 써 내려간 한 편의 시였다.

그 시는 지금도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조용히, 아주 안온히 읽히고 있다.

ㅡ청람 김왕식

댓글

로그인 없이 바로 남길 수 있습니다. 나중에 본인이 수정·삭제하려면 이 댓글의 비밀번호를 정해 주세요. 서로 예의를 지켜 주세요.

  1.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