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강은 왜 아래로 흐르는가 ― 서정춘 시인의 《하류》를 읽으며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강은 왜 아래로 흐르는가 ― 서정춘 시인의 《하류》를 읽으며 2026.05.31
강은 왜 아래로 흐르는가 ― 서정춘 시인의 《하류》를 읽으며

□ 서정춘 시인의 시집 《하류》

하류

시인 서정춘

옷 벗고

갈아입고

도로 벗고

하르르

여울 물소리

강은 왜 아래로 흐르는가

― 서정춘 시인의 《하류》를 읽으며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어떤 시인은 언어를 쌓아 탑을 만든다.

어떤 시인은 언어를 깎아 창문을 만든다.

서정춘 시인은 후자에 가깝다.

그는 시를 쓰지 않는다.

시 주변을 둘러싼 불필요한 말들을 하나씩 걷어낸다.

마치 오래된 목수가 나무를 다듬듯, 석공이 돌을 쪼듯, 침묵이 드러날 때까지 언어를 덜어낸다.

하여, 그의 시를 읽고 나면 작품을 읽었다는 느낌보다 문득 창문 하나를 열어놓고 나온 느낌이 남는다.

바람은 보이지 않는데 방 안의 공기가 달라져 있다.

《하류》는 그런 시다.

옷 벗고

갈아입고

도로 벗고

하르르

여울 물소리

시는 여섯 줄인데,

그 뒤에 숨어 있는 세월은 여든 해쯤 되어 보인다.

처음 읽으면 허전하다.

무엇인가 빠뜨린 듯하고, 아직 쓰다 만 초고처럼 보인다.

오래 바라볼수록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비어 있는 줄 알았던 자리마다 강물이 차오른다.

그 빈칸 속에서 독자는 자신의 생애를 만나게 된다.

‘옷 벗고’

이 첫 행은 생각보다 무겁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옷을 입는다.

이름이라는 옷

직업이라는 옷

체면이라는 옷

신념이라는 옷

명예라는 옷

심지어 슬픔마저 하나의 옷이 되어 몸에 걸친다.

인간은 옷 입는 존재다

강은 옷을 입지 않는다

바람도 입지 않는다

구름도 입지 않는다

하여,

자연은 늙지 않는다.

늙는 것은 옷을 벗지 못하는 인간이다.

시인은 벗는다

갈아입는다

그리고

다시 벗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벗음이다.

입음이 아니다.

삶의 후반부에 이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비밀 하나가 있다.

얻는 것보다 버리는 일이 더 어렵다는 사실이다.

젊은 날에는 무엇을 가질 것인가가 중요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무엇을 내려놓을 것인가가 더 중요해진다.

이 시는 짧은 시가 아니라 수행의 기록처럼 읽힌다.

욕망을 벗고

아집을 벗고

집착을 벗고

마침내 자기 자신마저 벗어내는 과정.

갑자기 등장하는 단어 하나.

‘하르르’

이 시의 중심 단어이다.

‘하르르’는 바람 소리도 아니고,

낙엽 소리도 아니고,

옷자락 스치는 소리도 아니다.

그것은 무게가 떠나는 소리다.

오랫동안 붙들고 있던 무엇인가가 손에서 빠져나가는 소리다.

세월이 인간에게 가르치는 마지막 예절 같은 소리다.

참 신기하다.

시인은 철학을 설명하지 않는다.

헌데, 한 단어가 철학서 한 권보다 깊다.

그리고 마침내 나타나는 한 글자.

‘먼’

보통 시인은 여기서 설명을 붙인다.

먼 산

먼 강

먼 길

서정춘 시인은 멈춘다.

그냥

‘먼’이다.

이 얼마나 대담한 절제인가.

그 순간 “먼”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 된다.

먼 젊음이 되고

먼 사랑이 되고

먼 어머니가 되고

먼 생애가 된다.

독자마다 다른 강을 건너게 된다.

좋은 시는 시인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 안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마지막.

‘여울 물소리’

시는 물소리 하나로 끝난다.

아니,

시작된다.

여울은 강의 자랑이 아니다.

강의 성취다.

폭포는 젊음의 언어다.

여울은 노년의 언어다.

폭포는 소리를 높이지만

여울은 소리를 낮춘다.

낮아질수록 넓어지고

넓어질수록 깊어진다.

그것이 강의 마지막 공부다.

서정춘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남긴 말은 시보다 더 시처럼 들린다.

‘나는 하류가 좋다.

멀리 보고 오래 참고 끝까지 가는 거다.’

이 말은 그저 인생관이 아니다.

그의 시 세계 전체를 꿰뚫는 한 줄의 선언이다.

세상은 늘 상류를 동경한다.

높은 자리

빠른 성공

화려한 명성

강은 끝내 아래로 흐른다.

낮은 곳을 향해 흐르면서도 누구보다 멀리 간다.

산은 제 자리에 머물지만,

강은 바다에 닿는다.

하여, 서정춘 시인의 시는 상류의 시가 아니다.

하류의 시다.

앞서려 하지 않고

드러나려 하지 않고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오래 흐른다

묵묵히 흐른다

끝까지 흐른다.

이 시를 읽으며 문득 한 그루 오래된 버드나무를 떠올렸다.

수백 마리 새들이 와서 쉬었다 가고,

수많은 계절이 지나갔지만,

나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그늘을 내어준다.

서정춘 시인의 시도 그렇다.

읽고 나면 남는 것은 해설이 아니다.

그늘이다.

그 아래 잠시 앉아 있으면

인생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조용한 물소리 하나가

오래 귓가에 흐른다.

아마 그것은 여울 소리가 아니라,

평생 언어를 벗고 또 벗으며

마침내

침묵에 이른 한 시인의 숨결일 것이다.

ㅡ청람

댓글

로그인 없이 바로 남길 수 있습니다. 나중에 본인이 수정·삭제하려면 이 댓글의 비밀번호를 정해 주세요. 서로 예의를 지켜 주세요.

  1.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