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인사동 사람들 ― 마지막 조선의 거리에 아직도 사람이 산다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인사동 사람들 ― 마지막 조선의 거리에 아직도 사람이 산다 2026.05.31
인사동 사람들 ― 마지막 조선의 거리에 아직도 사람이 산다

인사동 사람들

― 마지막 조선의 거리에 아직도 사람이 산다

청람 김왕식

인사동은 서울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서울이 인사동 곁에 잠시 머물고 있을 뿐이다.

인사동 골목을 오래 걸어본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이곳의 시간은 서울의 시간과 다르게 흐른다. 광화문의 빌딩 유리창에는 오늘의 햇빛이 반짝이지만, 인사동 골목의 햇빛은 어딘가 오래된 색을 띤다.

골목 모퉁이를 돌 때마다 조선의 그림자가 슬며시 나타났다 사라지고, 사람들의 목소리 사이로 백 년 전 찻잔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인사동은 피맛골과 이어져 있다.

말 탄 양반을 피해 백성들이 몸을 비켜 걷던 길.

역사는 늘 대로변에 기록되지만, 삶은 언제나 골목에서 피어난다.

조선의 임금과 대신들이 나라를 움직였다면, 백성들은 피맛골에서 하루를 버텼다.

그 길 위로 장돌뱅이의 땀이 떨어졌고, 주모의 한숨이 스며들었으며, 이름 없는 선비들의 꿈이 지나갔다.

인사동은 바로 그 삶의 기억을 품고 있는 마지막 조선의 거리다.

그래서 이곳의 골목은 길이 아니라 나이테처럼 보인다.

수백 년의 시간이 겹겹이 쌓인 나무의 단면 같다.

그 나이테 사이를 걸어가는 사람들 또한 범상하지 않다.

어떤 이는 시를 쓰고,

어떤 이는 그림을 그리고,

어떤 이는 붓을 들고,

어떤 이는 평생 모은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인사동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나이를 먹어도 아직 꿈을 꾼다는 것이다.

대개 사람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현실을 말한다.

그러나 인사동 사람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오히려 꿈을 이야기한다.

좋은 시 한 편.

좋은 그림 한 점.

좋은 사람 한 명.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인사동 한가운데에는 특별한 집이 하나 있다.

천상병 시인의 숨결이 아직도 머물러 있는 귀천.

그 이름만으로도 한 편의 시다.

귀천은 간판이 아니라 문장이고, 공간이 아니라 영혼이다.

그곳에 앉아 있노라면 어디선가 천상병 시인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세상을 다 잃고도 꽃 한 송이 앞에서 행복할 수 있었던 사람.

막걸리 한 사발에도 우주를 담아낼 수 있었던 사람.

그가 남긴 시는 이미 교과서 속에 들어갔지만, 그의 정신은 여전히 귀천의 의자와 찻잔 사이를 거닐고 있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그 문장은 아직도 인사동 저녁놀 속을 천천히 걸어 다닌다.

귀천 옆에는 또 하나의 작은 우주가 있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시가연.

겉으로 보면 작은 공간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수많은 인생이 겹쳐 앉아 있는 곳이다.

어떤 날은 시인이 와서 시를 읽고,

어떤 날은 화가가 와서 그림 이야기를 하고,

어떤 날은 이름 없는 여행자가 와서 인생 이야기를 남긴다.

그리고 그 공간을 묵묵히 지키는 두 사람이 있다.

봄비와 뜨락 부부.

그들을 볼 때마다 오래된 느티나무를 떠올린다.

느티나무는 꽃을 자랑하지 않는다.

열매를 과시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늘을 내어준다.

지친 새가 쉬어 가고,

길 잃은 바람이 머물고,

지나는 사람이 잠시 등을 기대도록 자리를 내어준다.

봄비와 뜨락 부부도 그렇다.

그들은 문화예술계의 전면에 나서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나 수많은 예술가와 문인들이 그들의 공간에서 위로를 얻고, 용기를 얻고, 다시 길을 떠난다.

생각해 보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늘 이런 사람들이다.

무대 위의 주인공보다 무대 뒤에서 불을 켜주는 사람들.

꽃보다 흙.

별보다 밤하늘.

인사동의 진짜 주인은 어쩌면 그런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저녁이 되면 인사동은 더욱 아름다워진다.

화랑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고,

찻집 창문마다 노란 등이 내려앉는다.

낮 동안 북적이던 관광객들은 떠나고,

골목은 비로소 자기 목소리를 되찾는다.

그 시간의 인사동은 마치 오래된 수필 한 편 같다.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오래 읽힌다.

소리 높이지 않는다.

그러나 깊이 스며든다.

골목을 걷다 보면 보인다.

인사동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무엇인가를 잃어본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젊음을 잃었고,

사랑을 잃었고,

친구를 잃었고,

세월을 잃었다.

그러나 대신 다른 것을 얻었다.

사람을 얻었다.

이야기를 얻었다.

기다림을 얻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삶을 천천히 바라보는 눈을 얻었다.

그래서 인사동은 관광지가 아니다.

사람의 박물관이다.

인생의 사랑방이다.

마지막 조선의 거리이자 마지막 인간의 거리다.

오늘도 귀천에는 누군가 차를 마시고 있고,

시가연에는 누군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며,

봄비와 뜨락 부부는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골목 어디선가 천상병의 시 한 줄이 바람에 실려 지나간다.

사람은 떠나도 향기는 남는다.

시인은 떠나도 시는 남는다.

시대는 바뀌어도 사람의 온기는 남는다.

인사동이 오래도록 사랑받는 이유도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곳에는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된 방식으로.

아주 따뜻한 방식으로.

아주 아름다운 방식으로.

ㅡ청람 김왕식

댓글

로그인 없이 바로 남길 수 있습니다. 나중에 본인이 수정·삭제하려면 이 댓글의 비밀번호를 정해 주세요. 서로 예의를 지켜 주세요.

  1.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