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인사동, 사람의 향기로 늙어가는 거리 ㅡ청람 김왕식

인사동, 사람의 향기로 늙어가는 거리 2026.05.31
인사동, 사람의 향기로 늙어가는 거리

인사동, 사람의 향기로 늙어가는 거리

청람 김왕식

인사동은

길이 아니다

사람이 오래 걸어

길이 된 곳이다

피맛골에서 건너온 바람 하나

주막의 막걸리 냄새를 품고

선비의 먹향기를 품고

백성의 땀 냄새를 품고

오늘도 골목 끝에 걸터앉아 있다

골목을 걷다 보면

돌담이 말을 걸고

기와가 기침을 하고

처마 끝에서는

조선의 저녁놀 하나가

아직도 마르지 않고 매달려 있다

귀천에는

천상병 시인이 남기고 간 웃음 하나

찻잔 가장자리에 앉아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행복을

천천히 우려내고

시가연 창가에는

시인 몇 사람이 둘러앉아

시보다 사람 이야기를 먼저 하고

문학보다 인생을 먼저 꺼내 놓는다

봄비와 뜨락은

골목의 주인이 아니다

오래된 느티나무처럼

지나는 사람들에게

잠시 그늘을 빌려주는 사람들

누군가는 시를 잃고 와서

사람을 찾고

누군가는 사람을 잃고 와서

시를 만난다

이름난 화가도

무명 시인도

퇴직한 교장도

골동품 가게 노인도

이 골목에 들어서면

모두 한 잔 차가 된다

인사동은

높은 사람의 거리가 아니다

오래된 사람의 거리다

명함보다 주름이 많고

직함보다 이야기가 많고

돈보다 추억이 많은 곳

해 질 무렵이면

노을이 기와지붕에 내려앉고

골목마다

사람들의 그리움이 불을 켠다

그 불빛 아래

세상에 치인 영혼들이

잠시 신발을 벗어두고

마음을 쉬어간다

사람들은 안다

서울이 아무리 높아져도

인사동은 끝내 사라지지 않을 것을

사람을 잃어버린 시대일수록

사람 냄새 나는 골목 하나가

더 귀해지는 법이니까

인사동은

서울 한복판에 남겨진

마지막 조선이 아니라

서로의 안부를 묻는 마음이

아직 살아 있는

마지막 사람의 거리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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