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구두통 위의 오후 ㅡ청람 김왕식

구두통 위의 오후 2026.05.31
구두통 위의 오후

구두통 위의 오후

탑골공원 뒷골목

구두 닦는 할아버지

햇살에 기대어

졸고 있다

예순 해쯤

아니,

한 생애쯤

구두와 함께 늙어온 사람

젊음은 어디로 갔을까

이마의 주름으로 가고

손등의 핏줄로 가고

등 굽은 그림자로 가고

낡은 나무 구두통 속으로

조금씩 스며들어 갔을 것이다

손때 묻은 구두통은

오래된 나무 한 그루 같다

수많은 발걸음이

나이테처럼 박혀 있다

장관의 구두도 닦았을 것이고

막노동꾼의 구두도 닦았을 것이다

출세를 향해 뛰어가던 구두도

실연의 눈물을 품은 구두도

그 손을 한 번쯤 거쳐 갔을 것이다

오늘은

하루 종일

구두를 맡기는 사람이 없다

세상은 운동화를 신고

바쁘게 지나간다

구두보다

속도를 닦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먼 산을 본다

아니

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산 너머로 흘러간

자기 젊음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북악산은 말이 없고

골목의 시간도 말이 없다

오후는 천천히

할아버지의 어깨 위에 내려앉는다

그때

김광섭이 품어온

늙은 성북동 비둘기 한 쌍

낡은 구두통 위에 앉아

가만히 입맞춤을 한다

할아버지는

그 장면을 보았는지

보지 못했는지

눈꺼풀은 반쯤 감겨 있고

햇살은 반쯤 기울어 있다

세상은

젊은 것들의 소음으로 가득한데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아무도 찾지 않는 골목에서

늙은 비둘기 두 마리가

늙은 구두통 위에 남겨놓은

한 번의 입맞춤이었다

해가 저물면

비둘기는 날아가고

북악산은 어둠을 입겠지만

구두통 곁에 남은 할아버지의 침묵은

오래도록

저녁놀보다 붉게

골목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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