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를 하면서 전화기를 찾는 사람들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전화를 하면서 전화기를 찾는 사람들 2026.06.01
■
전화를 하면서 전화기를 찾는 사람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늦은 오후였다.
햇살은 찻집 유리창에 기대어 졸고 있었고, 사람들의 대화는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처럼 천천히 공기 속으로 번지고 있었다.
창가 쪽 둥근 탁자에 일흔을 바라보는 아낙네 서넛이 둘러앉아 있었다.
오래된 친구들 특유의 편안함이 있었다.
굳이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서로의 말을 알아듣고,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지난 세월을 함께 공유하는 사람들의 느긋함이었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건강 이야기로 흘러갔다.
“요즘 자꾸 깜빡깜빡해.”
한 사람이 한숨처럼 말했다.
기다렸다는 듯 다른 이가 맞장구를 친다.
“말도 마. 냉장고 문을 열어놓고 한참 동안 텔레비전 보고 있더라니까.”
모두 웃었다.
또 다른 이가 나섰다.
“나는 가스레인지 불을 켜놓고 방에 들어갔다가 한 시간 만에 생각났어.”
이번에는 웃음이 조금 더 커졌다.
“그 정도는 약과야. 나는 세탁기 돌려놓고 사흘 만에 빨래를 꺼냈어.”
“사흘?”
“응. 빨래가 세 번쯤 다시 태어났을 거야.”
탁자가 흔들릴 만큼 웃음이 터졌다.
진짜 압권은 마지막에 나왔다.
“나는 더 심해.”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그녀는 마치 큰 비밀이라도 털어놓는 사람처럼 목소리를 낮췄다.
“전화하면서 전화기를 찾았어.”
순간 정적이 흘렀다.
곧 찻집 천장이 들릴 만큼 웃음이 터졌다.
“어머, 세상에.”
“그래서 찾았어?”
“응. 한참 찾다가 상대방이 그러더라. 귀에 대고 있는 게 전화기라고.”
그 말에 모두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그때였다.
옆자리에서 조용히 차를 마시던 중년 신사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잠시 웃더니 차분하게 한마디를 보탰다.
“놀랄 일 아닙니다.”
아낙들은 동시에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새로운 증언자가 등장한 재판정 같았다.
신사는 다시 말했다.
“그건 치매가 아니라 인간의 기본 설정입니다.”
탁자 위에 또 웃음이 번졌다.
신사는 태연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은 원래 찾으면서 사는 존재입니다.”
“무슨 말이에요?”
“젊을 때는 사랑을 찾고, 중년에는 돈을 찾고, 노년에는 안경을 찾습니다.”
모두 웃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문제는 안경을 찾다가 머리에 올려놓은 안경을 못 찾는다는 거죠.”
이번에는 자신도 웃었다.
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다.
사람은 달에 우주선을 보내고,
인공지능을 만들고,
바닷속 수천 미터를 탐사하면서도
정작 자동차 열쇠 하나는 매일 찾는다.
냉장고 문을 열어놓고 잊어버리는 일도,
세탁기를 돌려놓고 까먹는 일도,
전화를 하면서 전화기를 찾는 일도
어쩌면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에 가까운 것인지 모른다.
사람은 원래 한 가지를 생각하면서 다른 것을 놓치는 동물이다.
젊을 때는 미래를 생각하느라 현재를 놓쳤고,
중년에는 성공을 생각하느라 건강을 놓쳤으며,
노년에는 추억을 생각하느라 안경을 어디에 뒀는지 놓친다.
전화기를 찾는 일쯤은 놀랄 일도 아니다.
외려, 정상적이다.
세월이 흐르면 기억력보다 기억이 많아진다.
젊은이의 머릿속에는 앞으로 채워질 공간이 많지만,
노인의 머릿속에는 이미 쌓인 계절들이 많다.
봄이 있고,
여름이 있고,
첫사랑도 있고,
아이를 낳던 날도 있고,
눈물과 기쁨이 켜켜이 들어차 있다.
그러니
가끔 냉장고 문 하나쯤 잊어버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창고가 가득 차면 물건 찾기가 어려운 법이다.
불현듯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 깜빡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너무 많은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잠시 헷갈리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 많은 기억들 사이를 오가다 보면
현재의 한순간이 잠깐 길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때
중년 신사가
말을 거들었다.
“사실 더 걱정해야 할 건 다른 겁니다.”
“뭔데요?”
“사람을 잊는 거죠.”
순간 모두 조용해졌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냉장고 문은 열어놓아도 다시 닫으면 됩니다. 가스불도 끄면 됩니다. 전화기는 결국 찾게 됩니다.”
잠시 말을 멈춘 그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사람을 향한 정까지 잊어버리면 그건 다시 찾기 어렵습니다.”
창밖에서는 초여름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고 있었다.
아낙들은 다시 웃기 시작했지만 이번 웃음은 조금 달랐다.
세월을 향한 웃음이었고,
자신을 향한 웃음이었으며,
언젠가 모두가 걸어갈 길을 향한 따뜻한 웃음이었다.
인생은 참 우습다.
평생 무언가를 찾다가 끝난다.
사랑을 찾고,
행복을 찾고,
안경을 찾고,
전화기를 찾고.
마지막에 안다.
정작 찾아야 했던 것은 물건이 아니라
곁에 있는 사람의 온기였다는 것을.
그러니
오늘 전화기를 찾다가 웃게 되거든 너무 걱정하지 말 일이다.
전화를 하면서 전화기를 찾는 사람은 아직 괜찮다.
누군가와 통화할 사람이 있다는 뜻이니까.
ㅡ청람
댓글
로그인 없이 바로 남길 수 있습니다. 나중에 본인이 수정·삭제하려면 이 댓글의 비밀번호를 정해 주세요. 서로 예의를 지켜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