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바늘 끝에 세운 우주 ― 연월 유숙희 시인의 시 세계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바늘 끝에 세운 우주 ― 연월 유숙희 시인의 시 세계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바늘 끝에 세운 우주

― 연월 유숙희 시인의 시 세계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문학의 역사를 오래 들여다보면 시인들은 대개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를 썼다.

누군가는 별을 따라갔고,

누군가는 강물을 따라갔으며,

누군가는 꽃잎 한 장의 떨림 속에서 우주의 비밀을 엿보려 했다.

그런데

유숙희 시인은 조금 다르다.

그는 하늘보다 먼저 옷깃을 바라본다.

바람에 해진 소매 끝을 바라보고,

세월에 닳아버린 무릎 자락을 바라보며,

사람이 살아온 흔적이 남아 있는 옷 한 벌 앞에 오래 머문다.

그곳에서 시가 태어난다.

그의 시는 별빛보다 실밥에 가깝고,

구름보다 바늘귀에 가깝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다.

그토록 작은 바늘귀를 통과한 시가

끝내 인간의 생애 전체를 꿰뚫는다.

유숙희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바늘로 세상을 깁다》를 읽는 일은 마치 오래된 다락방의 나무 궤짝을 여는 일과도 같다.

그 안에는 화려한 보석이 없다.

대신 오래 입어 반질반질해진 저고리 하나,

어머니의 손때가 묻은 골무 하나,

가난했던 시절의 실타래 하나가 놓여 있다.

시인은 그 사소한 것들을 함부로 지나치지 않는다.

사람들이 버린 천 조각에서도 시간을 읽고,

끊어진 실끝에서도 인연의 숨결을 듣는다.

해서

그의 시에는 눈부신 언어보다 오래된 체온이 먼저 만져진다.

문장을 읽고 있다는 느낌보다

누군가의 삶을 손끝으로 더듬고 있다는 느낌이 앞선다.

유숙희 시인의 시 세계를 떠받치는 기둥은 단연 바느질이다.

허나,

그것은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철학이다.

삶은 누구에게나 찢어지는 순간이 있다.

사랑이 해어지고,

믿음이 닳아가고,

기억의 솔기가 터지는 날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지만,

시인은 안온히 바늘을 든다.

아픔을 피하지 않는다.

상처 한복판을 통과한다.

그리고

다시 잇는다.

그의 바늘은 상처를 내는 도구가 아니다.

상처를 통과하여 치유에 이르게 하는 작은 다리이다.

하여,

그의 시 속 바늘은 금속이 아니라 연민이며,

실은 섬유가 아니라 사랑이다.

유숙희 시인의 작품을 읽다 보면

불현듯

조선의 긴 밤이 떠오른다.

기름등잔 하나 켜 놓고 바느질하던 규방의 여인들.

말보다 침묵이 많았고,

눈물보다 인내가 많았던 시간들.

내방문학은 그 침묵이 남긴 문학이었다.

유숙희 시인은 그 오래된 불씨를 오늘의 언어로 되살린다.

단순히 전통을 답습하지 않는다.

그는 규방을 공방으로 옮겨놓았다.

바늘은 그대로 남겨두되 시대를 바꾸었다.

그의 시는 내방문학의 후예이면서도 동시에 현대 노동의 서사이다.

손으로 일하는 사람의 존엄,

묵묵히 견디는 사람의 아름다움,

그리고 이름 없이 살아가는 존재들의 품격이 그의 시 속에서 새롭게 태어난다.

특히 주목할 점은 120편의 시가 모두 바느질이라는 하나의 중심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보통 하나의 소재를 오래 다루면 언어가 마모되기 쉽다.

유숙희 시인은 다르다.

그는 같은 우물을 파되 매번 다른 물맛을 길어낸다.

어느 시에서는 바늘이 어머니가 되고,

어느 시에서는 세월이 되며,

어느 시에서는 인간의 운명이 된다.

같은 소재가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뿌리에서 새로운 꽃이 피어난다.

그의 시 세계는 테마문학의 성취를 넘어 하나의 독립된 우주를 형성한다.

유숙희 시인의 가장 큰 미덕은 성실함이 아니다.

진실함이다.

매일 시를 쓰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매일 자기 안의 거짓을 덜어내며 쓰는 사람은 드물다.

그는 시를 쓰기 전에 삶을 먼저 꿰맨다.

찢어진 마음을 먼저 다독이고,

흐트러진 하루를 먼저 정리한다.

그 후에야 한 줄의 시를 놓는다.

그의 시는 머리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손에서 태어난다.

손에서 태어나 가슴으로 건너간다.

그것이 유숙희 시의 힘이다.

오늘날 시는 점점 화려해지고 있다.

언어는 높아지고,

비유는 복잡해지고,

기교는 정교해진다.

유숙희 시인은 반대 방향으로 걷는다.

그는 높아지기보다 깊어지려 한다.

복잡해지기보다 따뜻해지려 한다.

그의 시를 읽고 나면 감탄보다 안도가 남는다.

세상이 아직 살 만하다는 안도.

사람이 아직 사람을 잇고 있다는 안도.

어쩌면

유숙희 시인은 평생 옷을 만든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는 사람을 지어왔다.

실 한 올로 하루를 꿰매고,

바늘 한 자루로 기억을 잇고,

시 한 편으로 상처 난 영혼을 감싸며 살아왔다.

재봉틀이 멈춘 밤에도 그의 시는 계속 움직인다.

보이지 않는 해진 곳을 찾아다니며

세상의 찢어진 가장자리를 조용히 잇는다.

하여

오늘도

한 사람의 마음이 다시 이어지고,

한 사람의 삶이 다시 견뎌지고,

한 사람의 내일이 다시 시작된다.

유숙희 시인의 바늘 끝에는 옷보다 큰 것이 매달려 있다.

그것은 한 시대의 기억이며,

한 인간의 온기이며,

끝내 사랑이라는 이름의 작은 우주이다.

그 우주는 오늘도 바늘귀를 통과하며

별빛처럼 커지고 있다.

2026, 6, 6

—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