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웃음은 영광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 이종식 작가의 《영광에서 꾸었던 짧은 봄》을 읽다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웃음은 영광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 이종식 작가의 《영광에서 꾸었던 짧은 봄》을 읽다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이종식 작가

영광에서 꾸었던 짧은 봄

이종식

새벽 다섯 시.

아직 어둠이 마당을 떠나지 않았을 때 공구와 자재를 하나둘 챙겨 차에 실었다. 지난번 두 번이나 다녀오고도 끝내 마무리하지 못한 현장이 마음에 걸렸다.

직원들에게조차 말하지 못했다.

괜한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혼자 조용히 길을 나섰다.

아홉 시쯤이면 도착할 줄 알았는데, 찾지 못한 부속 하나 때문에 길은 또 꼬였다. 시계는 어느새 오전 열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머릿속 계산은 자꾸 엇나가고, 자신감도 함께 길가에 떨어뜨린 듯했다.

‘그냥 돌아갈까.’

잠시 그런 생각도 스쳤다.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끝을 보자.

부속도 구하고 점심도 먹을 겸 영광읍내로 들어갔다.

새로 문을 연 아리랑 추어탕.

축하 화환들이 골목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우렁추어탕에 돌솥밥을 주문했다.

잠시 뒤 음식이 나왔다.

그런데 우렁이 보이지 않았다.

“우렁이 빠졌네요.”

말을 건네자 젊은 여직원 두 사람이 금세 달려왔다.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며 우렁을 한 국자 듬뿍 담아 넣어 준다.

“원래 끓일 때 넣어야 국물이 우러나는데….”

웃으며 말을 건네니, 미안하다는 미소가 먼저 돌아온다.

이상했다.

충청도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살고, 부산과 경남을 오가며 살아왔지만 이런 친절은 처음이었다.

연세 많은 손님에게는 “아버님”, “어머님” 하며 허리를 굽히고, 누구에게나 환한 웃음을 건넨다.

그 웃음은 음식보다 먼저 사람의 마음을 데웠다.

불현듯 생각이 든다.

남은 청춘이 있다면….

영광에서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천문학적인 반도체 투자가 예정된 서남권.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땅.

그곳에서 인생 2막을 시작하는 상상도 슬며시 피어올랐다.

식당 주인에게 농담처럼 말했다.

“음식도 맛있고 인심도 좋으니 영광으로 이사 와야겠네요.”

주인은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당장 오세요.”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러면 같이 살 색시 한 분도 구해 주시는 겁니까?”

주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웃었다.

“그라제. 암, 그라제.”

순간 식당 안은 웃음으로 가득 찼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받아 들고 식당을 나섰다.

주변 아파트도 둘러보며 혼자 상상의 집을 지어 본다.

‘정말 이곳에 살게 되면 집에는 뭐라고 둘러대야 하나.’

혼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바로 그 순간.

“앗, 뜨거워!”

시동을 거는 순간 커피가 팔과 바지 위로 쏟아졌다.

뜨거운 현실이 달콤한 상상을 단숨에 깨웠다.

아,

인생이란 이런 것인가.

행복은 오래 머무는 것이 아니라, 문득 찾아와 한 모금 웃음을 남기고 가는 커피 향 같은 것.

잠깐의 봄꿈도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

옷을 툭툭 털고 다시 핸들을 잡았다.

“정신 차리소, 이 철딱서니 없는 양반.”

어디선가 차가 먼저 웃는 것 같았다.

나도 따라 웃었다.

그 웃음 하나면,

오늘 현장은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웃음은 영광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 이종식의 《영광에서 꾸었던 짧은 봄》 을 읽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수필은 대개 사건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이 아주 조금 움직인 자리에서 비로소 태어난다. 세상은 큰 성공과 거대한 실패를 기록하지만, 문학은 그 사이를 스쳐 지나간 작은 미소 하나를 오래 붙잡는다. 그 미소는 꽃보다 먼저 피고, 말보다 먼저 사람을 알아본다. 이종식의 《영광에서 꾸었던 짧은 봄》은 바로 그 미소가 한 사람의 하루를 어떻게 바꾸는지를 보여주는 생활문학의 아름다운 표본이다.

이 작품은 화려한 서사도, 극적인 갈등도 없다. 지난번 마무리하지 못한 현장을 다시 찾는 기술자의 발걸음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발걸음에는 책임감이 묻어 있고, 홀로 길을 나선 뒷모습에는 말하지 못한 자존심이 배어 있다. 작가는 자신의 허점을 감추지 않는다. 그 솔직함이 독자의 마음을 가장 먼저 연다.

이 수필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영광이라는 지역이 아니라 영광 사람들의 온기다. 우렁을 빠뜨린 실수보다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은 미안함을 전하는 젊은 직원들의 태도이며, 허리를 굽혀 손님을 맞이하는 몸짓이다. 친절은 서비스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격이 언어가 되는 순간임을 이 작품은 자연스럽게 보여 준다. 결국 도시를 기억하게 만드는 것은 높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의 말투와 눈빛이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운다.

작품의 백미는 식당에서 피어난 농담이다. “색시도 구해 주시겠느냐”는 익살스러운 한마디와 “암, 그라제.”라는 넉넉한 답변은 짧은 대화이지만, 그 안에는 남도의 해학과 인정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그 장면은 독자에게도 미소를 건네며 수필 전체에 따뜻한 숨결을 불어넣는다.

이어지는 커피 장면은 더욱 인상적이다. 영광에서의 새로운 삶을 상상하던 순간, 뜨거운 커피가 현실로 불쑥 뛰어든다. 그 장면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다. 인생은 언제나 꿈과 현실이 한순간에 자리를 바꾸는 무대임을 상징하는 절묘한 장치다. 작가는 그 상황마저 웃음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을 웃을 줄 아는 사람은 삶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작품의 웃음은 가볍지 않고 깊다.

문체 또한 담백하다. 꾸밈없는 문장은 실제 삶의 결을 닮아 있으며, 과장된 감동을 강요하지 않는다. 독자는 이야기를 읽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함께 걸어가는 기분을 느낀다. 이것이 생활수필이 지녀야 할 가장 큰 미덕이다.

다만 문학적 완성도를 한층 높이기 위해서는 설명보다 이미지가 조금 더 살아나면 좋겠다. 영광의 바람, 골목의 빛, 추어탕의 김, 커피 향 같은 감각적 묘사가 조금 더 깊어질 때 작품은 체험의 기록을 넘어 오래 기억되는 문학으로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종식의 《영광에서 꾸었던 짧은 봄》은 행복은 거창한 성공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낯선 사람의 친절과 자신을 향해 웃을 수 있는 여유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조용히 들려준다. 봄은 계절이 아니라 마음의 온도이며, 영광은 지명이 아니라 사람의 인심이 만들어 낸 하나의 풍경이다.

이 수필은 그 풍경을 독자의 가슴속에도 오래 피어나게 하는, 잔잔하면서도 품격 있는 생활문학의 성과라 할 만하다.

ㅡ청람

□ 이종식 작가와 청람 ㅡ 밀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