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한 사람의 사명은 한 시대를 견디는가 ― 노학우 회장의 조국창건 40년을 읽다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한 사람의 사명은 한 시대를 견디는가 ― 노학우 회장의 조국창건 40년을 읽다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한 사람의 사명은 한 시대를 견디는가

― 노학우 회장의 조국창건 40년을 읽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Ⅰ. 여는말

ㅡ 한 사람은 얼마나 오래 한 가지 사명을 품고 살아갈 수 있는가

한 인간의 삶을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높은 지위일까. 많은 재산일까. 세상에 널리 알려진 명성일까. 우리는 흔히 성공을 눈에 보이는 결과로 측정하는 데 익숙하다.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었는지,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올랐는지,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를 삶의 척도로 삼는다. 그러한 기준은 어느 정도 타당하다. 사회는 성취를 기록하고, 역사는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주 드물게 이러한 기준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결과보다 방향을 선택하고, 이익보다 신념을 앞세우며, 시대의 유행보다 자신의 사명을 붙들고 살아간다. 세상이 바뀌어도, 환경이 달라져도, 박수와 비난이 엇갈려도 처음 품었던 뜻을 놓지 않는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성공한 사람을 만났다는 생각보다, 한 시대를 온몸으로 견디어 낸 사람을 만났다는 감정을 먼저 품게 된다.

며칠 전 노학우 회장을 처음 만났다.

짧은 만남이었다. 긴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고, 그의 삶을 모두 들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첫인상은 오래 남았다. 사람은 말보다 태도로 기억되는 법이다. 그의 얼굴에는 오랜 세월 하나의 방향만 바라보며 걸어온 사람에게서만 나타나는 깊은 결이 배어 있었다. 쉽게 흔들리지 않는 눈빛, 절제된 언어, 담담한 자세는 한 권의 자서전보다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그의 삶을 더듬어 읽어 갈수록 더욱 놀라운 사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에게는 직업보다 앞선 단어가 있었다. 그것은 사명이었다.

부친이 남긴 “통일을 직업으로 하라.”는 한마디는 단순한 유언이 아니라 평생의 좌표가 되었다. 어떤 사람에게 유언은 슬픔으로 남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평생 걸어야 할 길이 된다. 노학우 회장에게 그 한 문장은 인생을 결정한 나침반이었다. 그는 그 방향을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

삶의 노정에는 수많은 갈림길이 있었다. 안정된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고, 개인의 성공을 위해 살아갈 수도 있었다. 해외 유학도, 다른 진로도 가능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능력을 개인의 안락을 위해 사용하기보다 자신이 믿는 시대적 과업에 바쳤다. 이러한 선택은 누구나 쉽게 이해하거나 동의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을 수십 년 동안 한결같이 걸어왔다는 점이다.

현대인은 너무 많은 목표를 세우고 너무 쉽게 바꾼다.

시대는 빠르게 변하고, 가치도 끊임없이 흔들린다. 어제의 신념이 오늘의 유행 앞에서 사라지는 일도 드물지 않다. 그런 시대에 평생 하나의 사명을 붙들고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재능보다 인내를, 열정보다 지속을 요구한다. 오래 걷는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있다.

이 글은 노학우 회장의 삶을 찬양하기 위한 기록이 아니다. 또한 그의 사상이나 활동에 대한 단순한 연대기를 정리하려는 글도 아니다.

주목하는 것은 한 인간이 자신의 신념을 어떻게 생애 전체로 확장해 왔는가 하는 점이다. 삶은 누구나 한 번뿐이지만, 그 한 번의 삶을 무엇에 바칠 것인가는 저마다 다르다.

노학우 회장은 자신의 생애를 ‘조국창건’이라는 하나의 이상에 바쳤다고 이해하며 살아왔다.

한 사람의 신념이 시대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는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오늘 우리의 성찰로 남는다. 사람은 무엇을 이루었는가 이전에 무엇을 끝까지 붙들고 살았는가로 기억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삶을 읽으며 한 인간의 전기를 넘어 한 시대의 질문을 마주했다.

사명은 과연 한 사람의 인생을 어디까지 이끌 수 있는가?

이 물음은 노학우 회장의 생애를 넘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조용히 되돌아오는 질문이기도 하다.

Ⅱ. 유언 하나가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다

한 인간의 생애를 바꾸는 것은 거대한 사건만이 아니다.

때로는 한마디 말이 한 시대를 흔들고, 한 줄의 유언이 한 사람의 평생을 결정한다. 말은 공기 중으로 사라지는 소리에 불과하지만, 생애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건네진 말은 한 인간의 영혼 속에 씨앗처럼 심겨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굵은 나이테를 만들어 간다.

노학우 회장의 삶을 이해하려면 그의 출생보다 먼저 부모 세대의 역사를 읽어야 한다.

그의 부친은 6·25전쟁 당시 흥남철수작전을 통해 죽음의 경계를 넘어 남으로 내려온 실향민이었다. 고향을 두고 떠나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같은 시대를 살아 보지 않은 사람은 쉽게 헤아릴 수 없다. 그것은 단순한 이주가 아니었다. 부모의 산소를 남겨 두고, 조상의 땅을 뒤로한 채, 다시 돌아올 날을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이었다. 조국은 하나였지만 국토는 둘로 갈라졌고, 가족은 생이별을 해야 했으며, 통일은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삶의 절규가 되었다.

피란민에게 고향은 지명이 아니다.

평생 가슴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상처이며, 밤마다 되살아나는 기억이고, 언젠가 반드시 회복되어야 할 삶의 자리이다.

그러한 시대를 온몸으로 견디며 살아온 아버지는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단 한마디를 남겼다.

“너는 통일을 직업으로 하라.”

이 말은 직업을 권유한 말이 아니었다.

출세를 권한 것도 아니었다.

한 인간의 생애를 무엇에 바칠 것인가를 묻는 마지막 명령이었다.

우리는 대개 직업을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 생각한다. 의사는 사람을 살리고, 교사는 학생을 가르치며, 기업인은 회사를 경영한다. 직업은 먹고사는 길이며 사회적 역할이다. 그러나 “통일을 직업으로 하라.”는 말은 기존의 직업 개념을 넘어선다. 통일을 생애의 중심 가치로 삼고, 자신의 시간과 재능과 열정을 그 길에 바치라는 뜻이었다.

유언에는 거짓이 없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남기는 말은 한 인간이 평생 붙들고 살았던 가장 본질적인 가치가 응축된 결정체이다. 부친은 재산을 물려줄 수 없었을지 모른다. 권력을 남겨 줄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남긴 한 문장은 어떤 유산보다 무거웠다. 그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사명의 상속이었다.

노학우 회장은 그 유언을 삶의 좌표로 받아들였다.

많은 사람은 감동을 받는다. 그러나 감동은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진다. 많은 사람은 결심을 한다. 그러나 결심은 현실 앞에서 흔들리기 쉽다. 노학우 회장의 삶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감동도, 결심도 아니다. 그는 유언을 일회성 감정으로 남겨 두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생애 전체를 그 한 문장의 해석 과정으로 만들어 갔다.

그 이후 그의 삶은 우연을 좇지 않았다.

학업도, 군 복무도, 사회 경험도 모두 하나의 방향을 향해 조금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훗날 운명처럼 이어지는 여러 만남과 선택도 이미 그 유언이라는 중심축 위에서 의미를 얻는다. 사람들은 운명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운명은 오래전 마음속에 심긴 한 문장이 세월을 만나 자라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사람마다 가슴에 품고 사는 문장이 하나쯤 있다.

누군가는 부모의 당부를 기억하고, 누군가는 스승의 가르침을 붙든다. 어떤 이는 한 권의 책에서 만난 문장 때문에 인생의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노학우 회장에게는 “통일을 직업으로 하라.”는 부친의 유언이 바로 그러한 문장이었다.

오늘의 우리는 너무 많은 정보를 품고 살아간다.

그러나 정작 삶을 끝까지 이끌어 줄 단 하나의 문장은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많은 지식이 아니라 끝까지 놓지 않는 하나의 신념이다.

노학우 회장의 삶은 그 사실을 조용히 증언한다.

한 아버지의 마지막 말은 한 아들의 평생이 되었고, 한 가정의 유언은 한 인간의 운명이 되었다.

Ⅲ. 우연처럼 찾아온 만남, 운명처럼 시작된 길

인간의 생애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순간이 있다.

계획한 일은 이루어지지 않는데,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만남 하나가 평생의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역사는 그것을 우연이라 기록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섭리라 부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는 운명이라 이해한다. 이름은 서로 다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다. 한 사람의 생애는 때때로 자신의 계산을 넘어서는 사건과 만나 새로운 길을 걷게 된다는 점이다.

1984년 4월 1일.

노학우 회장의 삶에도 그런 하루가 찾아왔다.

당시 그는 동아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부산 서면의 외국어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던 청년이었다. 그의 앞에는 비교적 분명한 진로가 놓여 있었다. 학문을 더 공부하고, 세계를 경험하며 자신의 능력을 펼치는 길이었다.

그날도 처음부터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한 여학생이 시민회관 공연 초대권이 있다며 함께 가자고 했고, 그는 약속 장소인 부산역 앞으로 나갔다. 그러나 약속은 예상과 달랐다. 제과점은 문을 닫아 있었고,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기다리는 시간이 생겼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 우연히 ‘무등다방’이라는 간판을 발견한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사소한 선택이었다.

조금 다른 찻집으로 들어갔더라면, 몇 분 일찍 자리를 떠났더라면, 창가가 아닌 다른 곳에 앉았더라면 그의 생애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역사는 거대한 전쟁에서만 갈라지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한 잔의 차를 마시기 위해 들어간 다방에서도 인생은 새로운 방향을 선택한다.

다방 안에는 외국인 여성 두 사람이 한국어 교재를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귀를 기울이니 남북 분단의 아픔과 통일운동, 한국 사회를 향한 안타까움이 대화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이국의 젊은이들이 자신의 조국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며 그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왜 저들은 머나먼 나라에서 한국의 통일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왜 자신들의 삶을 이 땅의 미래와 연결하고 있는가.

호기심은 발걸음을 움직였고, 조심스러운 인사는 새로운 대화의 문을 열었다.

노학우 회장은 훗날 이 만남을 자신의 생애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받아들였다. 상대 여성들 역시 그 만남을 특별한 의미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전하며, 자신의 삶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한다. 이 대목은 역사적 사실의 영역이라기보다, 당사자가 자신의 생애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사건 자체보다 그 이후였다.

사람은 누구나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러나 모든 만남이 인생을 바꾸지는 않는다. 어떤 만남은 스쳐 지나가고, 어떤 만남은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는다. 생애를 바꾸는 만남은 상대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그 만남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부친의 유언은 이미 그의 가슴에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통일을 직업으로 하라.’

그 문장은 여전히 살아 있었고, 그는 그 뜻을 실현할 길을 찾고 있었다. 무등다방에서의 만남은 그에게 하나의 답으로 다가왔다. 그의 삶에서 우연은 방향 없는 사건이 아니라, 오래 품어 온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받아들여졌다.

인생은 언제나 두 개의 시간이 함께 흐른다.

눈에 보이는 시간과 마음속에서 자라는 시간이다.

겉으로는 우연히 한 다방에 들어간 하루였지만, 마음속에서는 오래전 아버지의 유언이 그날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흔히 운명을 하늘에서 떨어지는 선물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운명은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래 품어 온 신념이 한순간의 만남과 만날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다.

노학우 회장의 생애에서 1984년 4월 1일은 달력의 하루가 아니었다.

그날은 한 청년의 미래가 자신의 사명과 만난 날이었고, 한 사람의 인생이 새로운 역사를 향해 첫걸음을 내디딘 시간이었다.

Ⅳ. 사명은 계산으로 선택되지 않는다

인생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다.

하나는 더 안전한 길이고, 다른 하나는 더 의미 있는 길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안전을 선택한다. 그것은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가족을 책임지고, 자신의 삶을 지켜 내는 일 역시 소중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주 드물게 자신의 안정보다 더 큰 목적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손익을 계산하기보다 먼저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을 묻는다.

노학우 회장의 삶은 바로 그 지점에서 일반적인 삶과 갈라진다.

당시 그의 앞에는 여러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대학을 졸업했고, 영어를 가르칠 만큼 실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미국 유학이라는 새로운 미래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시대 청년들에게 유학은 더 넓은 세상을 향한 관문이었고, 안정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다.

누구라도 그 길을 선택했을 것이다.

누구라도 자신의 미래를 먼저 설계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다른 선택을 한다.

무등다방에서의 만남 이후 그는 통일원리를 배우고, 여러 교육 과정을 거치며 자신이 평생 붙들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깊이 성찰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유학 계획은 점차 뒤로 밀려났다. 결혼과 개인의 삶도 우선순위에서 비켜섰다. 많은 사람이 인생을 넓히기 위해 공부를 선택하지만, 그는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사명을 선택했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선택의 내용보다 선택의 태도이다.

사명은 계산 끝에 얻어지는 결론이 아니다.

계산은 손익을 따진다.

사명은 존재를 묻는다.

계산은 ‘무엇을 얻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사명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를 먼저 묻는다.

이 두 질문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길을 향한다.

세상은 성공한 사람을 기억하는 데 익숙하다.

그러나 역사는 자신의 삶을 하나의 이상에 바친 사람을 더 오래 기억한다. 성공은 시대와 함께 변하지만, 신념은 시대를 넘어 다음 세대의 질문이 되기 때문이다.

노학우 회장은 이후 여러 조직에서 활동하며 통역과 교육, 조직 운영, 통일운동 등 다양한 역할을 맡았다. 직책은 달라졌지만 중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활동의 형태는 바뀌어도 삶의 방향은 하나였다. 그는 자신이 믿는 이상을 향해 걸어가는 일을 직업이 아니라 생애의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의 길을 의심한다.

현실은 이상보다 무겁고, 세월은 열정보다 빠르다. 처음의 결심을 끝까지 지켜 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수많은 유혹과 좌절, 오해와 비판이 길목마다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끝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의 발걸음은 빨라서가 아니라 멈추지 않았기에 멀리 간다.

노학우 회장의 삶을 바라보며

불현듯 이런 생각에 이르렀다.

사명은 하늘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때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된다.

한순간의 감동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한평생의 헌신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사명은 선언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매일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살아낸 시간들이 쌓일 때 비로소 한 사람의 생애는 사명이 된다.

노학우 회장의 삶은 바로 그 긴 시간을 견뎌 온 기록이다.

그는 사명을 말한 사람이 아니라, 사명을 살아낸 사람이었다.

Ⅴ. 조국창건이라는 한 문장을 살아낸 사람

사람은 누구나 자기 삶을 설명하는 한 문장을 가지고 살아간다.

누군가는 가족을 위해 산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학문을 위해, 누군가는 예술을 위해 살아간다고 말한다. 그 한 문장은 세월이 흐를수록 그 사람의 얼굴이 되고, 걸음이 되고, 삶의 향기가 된다.

노학우 회장의 삶을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문장은 단연 ‘조국창건’이다.

그에게 조국은 단순한 국토의 개념이 아니었다. 창건 또한 새로운 국가를 세운다는 정치적 구호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것은 분단으로 갈라진 민족의 상처를 치유하고, 자유와 책임, 신앙과 도덕이 조화를 이루는 공동체를 향한 이상이었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그 이상을 향한 긴 여정으로 이해하며 살아왔다.

1984년 이후 그의 발걸음은 한순간도 그 중심축을 벗어나지 않았다.

국제기독학생연합회와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 세계일보, 전국대학원리연구회 등 여러 영역에서 활동한 시간도, 이후 사회 각 분야에서 이어진 오랜 활동도 모두 하나의 목표를 향하고 있었다. 밖에서 보면 직책은 달라지고 활동 무대는 바뀌었다. 그러나 안으로 흐르는 정신은 언제나 같았다.

많은 사람은 직책을 바꾸며 살아간다.

노학우 회장은 직책보다 사명을 이어 갔다.

세월은 사람을 늙게 만든다.

그러나 뜻은 늙지 않는다.

육신은 시간의 지배를 받지만, 신념은 시간과 싸우며 더욱 단단해진다. 오히려 오랜 세월 한 방향을 바라본 사람에게는 젊은 날의 열정보다 깊은 확신이 생긴다. 그것은 감정의 뜨거움이 아니라 생애 전체가 증명한 믿음이다.

2001년 대한민국건국회 제10대 회장에 취임한 일 역시 그러한 삶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그는 이를 개인의 영예로 받아들이기보다 독립운동과 건국운동, 호국운동으로 이어져 온 역사적 정신을 다음 세대로 잇는 책무로 이해하였다. 한 사람의 직함이 아니라 한 시대의 바통을 이어받았다는 의식이 그의 삶을 이끌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 가지 사실을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의 사회는 새로운 것을 만드는 능력은 뛰어나다.

반면 오래 지켜 내는 능력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

관계도 쉽게 시작하고 쉽게 끝난다.

신념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자주 바뀐다.

속도가 가치가 된 시대에는 오래 버틴 사람이 오히려 낯설게 보인다.

노학우 회장은 그 낯섦을 몸으로 증명하는 사람이다.

무려 사십여 년 동안 하나의 방향을 바라본다는 것은 단순한 의지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처음의 자리로 되돌려 세우는 자기 수련이며, 매 순간 흔들리는 현실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정신의 훈련이다.

누군가는 그의 삶에 동의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이는 다른 견해를 가질 수도 있다.

그것은 민주사회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누구도 쉽게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 하나 있다.

한 사람이 평생 하나의 신념을 붙들고 살아왔다는 사실 자체는 깊은 존중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자주 ‘무엇을 가졌는가’를 묻는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질문은 ‘무엇을 끝까지 지켰는가’일지 모른다.

노학우 회장이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명은 얼마나 거창한 일을 이루었는가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끝내 그 길을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로 완성된다.

그의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가 꿈꾸는 조국창건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그렇기에 그의 생애는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도 쓰여 가는 한 권의 긴 역사이며, 한 인간이 자신의 신념을 어떻게 시간 속에 새겨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살아 있는 증언이라 할 수 있다.

Ⅵ. 초인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걷는 사람이다

우리는 흔히 초인을 상상할 때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특별한 능력을 먼저 떠올린다.

남보다 뛰어난 지혜, 비범한 재능, 압도적인 카리스마, 세상을 뒤흔드는 권력과 명예를 가진 사람을 초인이라 부르곤 한다. 역사는 영웅을 그렇게 기록해 온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노학우 회장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필자의 생각은 조금 달라졌다.

초인은 하늘을 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한 방향을 평생 걸어가는 사람이었다.

그의 삶을 관통하는 가장 큰 특징은 화려함이 아니다. 오히려 놀라울 만큼 단순하다. 처음 품은 뜻을 바꾸지 않았고, 자신이 선택한 길을 끝까지 걸어왔으며, 시대가 여러 번 바뀌는 동안에도 삶의 중심을 잃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발걸음이었다. 그러나 그 평범함이 수십 년 동안 이어질 때, 그것은 더 이상 평범한 삶이라 부를 수 없는 깊이를 만들어 낸다.

사람은 누구나 시작할 수 있다.

처음의 열정은 누구에게나 있다.

젊음은 원래 뜨겁다.

문제는 그 불꽃이 세월을 견디느냐에 있다.

현실은 이상을 조금씩 깎아 내리고, 실패는 신념을 흔들며, 세상은 타협을 지혜라고 말할 때가 많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처음의 꿈을 접는다. 그것이 인간의 연약함이기도 하다.

노학우 회장의 삶이 특별한 이유는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외려 흔들림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았다는 데 있다.

강한 나무는 바람이 불지 않는 숲에서 자라지 않는다.

거센 바람을 견딘 나무일수록 뿌리가 깊어진다.

한 사람의 신념도 마찬가지다.

시련이 없어서 단단한 것이 아니라, 시련을 통과하면서 더욱 단단해진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빛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오랜 세월이 머물러 있었다.

젊은 날의 패기보다 긴 시간의 인내가 있었고, 승리의 환호보다 묵묵히 걸어온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고요한 힘이 배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을 드러내려는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을 아직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어쩌면 사람의 얼굴은 세월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신념이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평생 무엇을 바라보며 살았는지가 이마에 새겨지고, 무엇을 사랑하며 살았는지가 눈동자에 머물며,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가 입가의 주름으로 남는다.

노학우 회장의 얼굴에는 긴 세월 한 가지 사명을 품고 살아온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시간의 결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누군가는 그의 삶을 이상주의라 말할 수도 있다.

누군가는 현실과 거리가 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역사는 다양한 시각을 허용한다.

그러나 어떤 평가를 내리기에 앞서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볼 질문이 있다.

과연 우리는 평생 변하지 않는 신념 하나를 품고 살아본 적이 있는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가치 하나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바쳐 본 적이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는 누구나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노학우 회장을 초인이라 부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는 인간이어서 흔들렸을 것이다.

인간이어서 외로웠을 것이다.

인간이어서 수없이 갈등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다시 일어나 처음의 자리로 돌아갔다.

초인은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흔들릴 때마다 처음의 뜻으로 돌아가는 사람이다.

평생 하나의 사명을 품고 자신의 시간을 바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허락되는 삶이 아니다.

그 삶은 스스로 선택해야 하고, 매일 다시 결단해야 하며, 끝내 자신의 생애 전체로 증명해야 한다.

노학우 회장의 삶은 그 긴 증명의 과정이었다.

그를 만나 한 사람을 본 것이 아니라, 신념이 한 인간을 어디까지 이끌 수 있는지를 보았다.

아마 그것이 초인이라는 말에 담긴 가장 깊은 의미일 것이다.

Ⅶ. 맺음말

한 사람의 생애가 한 시대의 질문이 될 때

한 인간의 삶을 평가하는 일은 언제나 조심스럽다.

특히 한평생 자신의 신념을 따라 살아온 사람을 바라볼 때는 더욱 그렇다. 사람마다 역사관도 다르고, 정치적 견해도 다르며, 종교적 신념도 다르다. 같은 삶을 두고도 서로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그것은 자유로운 사회가 지닌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럼에도, 서로 다른 생각을 넘어 누구나 깊이 성찰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과연 한 사람은 얼마나 오래 하나의 사명을 품고 살아갈 수 있는가.

노학우 회장의 생애는 바로 이 질문 앞에 우리를 세운다.

그는 자신의 삶을 ‘조국창건’이라는 이상과 연결하여 이해했고, 수십 년 동안 그 길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아 걸어왔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선택의 기로를 만났고, 안정된 삶으로 향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으며, 현실의 벽과 시대의 변화도 마주하였다. 그러나 그의 삶을 관통하는 중심축은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이 글에서 주목한 것은 특정한 사상이나 활동 자체를 평가하려는 데 있지 않다.

더욱 본질적인 것은, 한 인간이 평생 하나의 신념을 어떻게 자신의 존재 전체로 살아낼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오늘의 시대는 너무 빠르게 변한다.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정보는 쉼 없이 쏟아진다. 사람들의 관심은 시시각각 바뀌고, 어제의 가치가 오늘은 낡은 것이 되기도 한다. 속도는 빨라졌지만 방향은 점점 희미해지고, 선택은 많아졌지만 끝까지 책임지는 삶은 외려 드물어지고 있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사람은 더욱 근본적인 질문을 만나게 된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무엇을 끝까지 지키며 살아갈 것인가.

삶을 견디게 하는 것은 풍족한 조건만이 아니다. 사람을 끝내 일어서게 하는 힘은 자기 존재를 지탱하는 분명한 이유이다. 그 이유를 발견한 사람은 어려움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가고, 그 이유를 잃은 사람은 풍요 속에서도 길을 잃는다.

노학우 회장의 생애는 그 이유를 평생 놓지 않으려 했던 한 인간의 기록으로 읽힌다.

사람은 누구나 세월 앞에서 늙는다.

육신은 시간의 법칙을 거스를 수 없다. 젊음은 지나가고, 기억은 희미해지며, 언젠가는 모든 사람이 인생의 황혼을 맞는다. 그러나 뜻은 육신과 함께 늙지 않는다. 오히려 오랜 세월 검증된 신념은 시간의 풍파를 견디며 더욱 깊은 무게를 지니게 된다.

아마도 역사란 이러한 사람들에 의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화려한 영웅보다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간 사람들, 큰 소리보다 긴 침묵으로 자신의 신념을 증명한 사람들, 시대의 박수보다 자신의 양심 앞에서 부끄럽지 않기를 선택한 사람들에 의해 역사는 천천히 이어져 왔다.

노학우 회장을 만나며 한 가지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은 업적으로만 기억되는 것이 아니다.

한결같음으로도 기억된다.

높은 자리에 오래 있었다고 위대한 것이 아니다.

높은 뜻을 오래 품고 살았기에 깊은 울림을 남기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저마다의 ‘조국창건’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교육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문학일 수 있으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학문과 봉사, 예술과 신앙일 수도 있다. 이름은 서로 다르지만, 자신의 생애를 기꺼이 바칠 수 있는 가치 하나를 품고 살아간다는 점에서는 모두 같은 의미를 지닌다.

한 사람의 위대함은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했는가에 있지 않다.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올랐는가에도 있지 않다.

평생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지키려 했으며, 무엇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기꺼이 내어놓았는가에 있다.

노학우 회장의 삶은 우리에게 하나의 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외려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당신의 생애를 사용할 것인가.

그 질문은 한 사람만을 향한 물음이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향한 시대의 질문이다.

세월은 모든 사람에게 같은 시간을 허락하지만, 같은 생애를 허락하지는 않는다.

생애는 시간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택이 만든다.

노학우 회장의 삶은 그 선택이 얼마나 오랜 세월 한 인간을 이끌어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한 편의 긴 기록이다.

그의 생애를 읽으며 한 사람을 만난 것이 아니라, 한 시대가 품었던 이상과 그 이상을 끝까지 놓지 않으려 한 인간의 의지를 만났다.

어쩌면 사람은 자신의 시대를 모두 바꾸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한 사람의 흔들리지 않는 신념은 또 다른 한 사람의 마음에 불씨가 될 수 있다.

역사는 바로 그러한 작은 불씨들이 이어질 때 비로소 새로운 아침을 맞이한다.□

□ 백두산 천지에서 ㅡ 노학우 회장님

노학우 회장님께

― 사명을 사는 사람에게

산은

높아서 산이 아닙니다.

한 자리를 떠나지 않아

산이 됩니다.

강은

멀리 흘러서 강이 아닙니다.

끝내 바다를 잊지 않아

강이 됩니다.

선생님의 삶을 바라보았습니다.

세월은

머리칼을 희게 만들었으나,

가슴에 새긴

조국이라는 두 글자는

한 번도 빛을 잃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직업을 선택하며 살아가지만,

선생님은

사명을 선택하셨습니다.

길은

걸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걸어낸 사람이

길을 남깁니다.

풍랑은

배를 시험하고,

세월은

사람의 뜻을 시험합니다.

선생님은

수많은 계절을 건너오며

처음 품었던 불씨 하나를

평생의 횃불로 지켜 오셨습니다.

한 사람을 만난 것이 아니라,

한 문장을 만났습니다.

한평생

지우지 않은 문장,

끝내

배반하지 않은 문장.

그 문장이

선생의 생애였고,

그 생애는

한 편의 긴 기도가 되었습니다.

부디

남은 걸음에도

하늘이 허락한 뜻이

더 깊은 평화와

더 큰 사랑으로 열매 맺기를 기원합니다.

사람은

세월 속으로 사라져도,

끝내 지켜 낸 신념은

다음 시대의

별이 됩니다.

ㅡ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