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식 문학평론] 윤동주 시인 ㅡ 제3부 영혼의 푸른 하늘 (1편)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윤동주 시인 ㅡ 제3부 영혼의 푸른 하늘 (1편) 2026.07.11
[김왕식 문학평론] 윤동주 시인 ㅡ 제3부
영혼의 푸른 하늘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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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八福
ㅡ마태복음5장 3-12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1940.12)
■
슬픔을 축복이라 부를 수 있는가
― 윤동주 〈팔복八福〉
윤동주의 〈팔복八福〉은 그의 대표작들에 비해 짧고 단순하다.
이 짧음 때문에 외려 가장 위험한 작품이 되었다. 단 여덟 줄의 반복과 한 줄의 결말. 시의 외형만 본다면 누구나 쉽게 읽고 지나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윤동주 시 세계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된다. 이 시는 성경을 그대로 옮긴 듯하면서도, 가장 윤동주다운 방식으로 다시 써낸 시이기 때문이다.
이 시는 마태복음의 팔복에서 출발한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예수의 선언은 슬픔으로 끝나지 않는다. 반드시 위로가 뒤따른다. 고난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다. 눈물은 영원하지 않다.
그런데 윤동주는 그 약속을 끝까지 가져가지 않는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여기서 독자는 멈춰 선다.
이것은 성경을 부정한 것일까.
아니다.
윤동주는 1940년이라는 역사적 현실에서 성경을 다시 읽은 것이다.
1940년.
조국은 식민지였고, 언어는 빼앗기고 있었으며, 젊은이들은 자신의 이름조차 지키기 어려웠다. 하늘의 약속은 분명했지만 땅의 현실은 너무도 냉혹했다. 위로는 믿고 싶었지만 현실은 아직 위로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윤동주는 미래의 하나님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대를 고발한 것이다.
“지금은 슬픔이 끝나지 않았다.”
그 한 문장이 바로 “영원히 슬플 것이오”라는 역설 속에 숨어 있다.
이 작품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반복이다.
같은 문장을 여덟 번 반복한다.
대부분의 시인은 반복을 통해 감정을 증폭시킨다.
윤동주는 다르다.
반복할수록 감정이 사라진다.
처음에는 기도처럼 들리고,
두 번째는 독백처럼 들리며,
세 번째는 탄식이 되고,
네 번째부터는 시대의 메아리가 된다.
여덟 번째에 이르면 더 이상 개인의 울음이 아니다.
민족 전체의 슬픔이 된다.
이 반복은 음악이 아니다.
기도도 아니다.
마치 교회의 종이 계속 울리는데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침묵 같다.
그래서 마지막 한 줄은 더욱 차갑다.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영원히’라는 단어는 신학적으로 보면 매우 위험한 표현이다.
기독교 신앙에는 영원한 슬픔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눈물을 닦아 주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윤동주는 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영원은 시간의 무한이 아니라 인간이 체감하는 절망의 길이였다.
밤이 끝날 줄 모르던 시대.
해방이 보이지 않던 시대.
청년의 하루는 곧 영원이었다.
하여, ‘영원히’는 절망의 과장이 아니라 시대의 체감 온도다.
윤동주는 여기서 신앙을 버리지 않는다.
외려 신앙을 더욱 절실하게 만든다.
희망이 너무 가까우면 믿음은 얕아진다.
희망이 너무 멀리 있을 때 믿음은 깊어진다.
윤동주의 신앙은 응답받은 신앙이 아니라 기다리는 신앙이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환호가 거의 없다.
침묵이 많고,
기다림이 많고,
부끄러움이 많다.
이 작품을 읽으며 떠오르는 것은 예언자들의 탄식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지만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윤동주 역시 하나님의 나라를 믿었지만 식민지 조선의 밤을 감추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시는 종교시가 아니라 역사를 통과한 신앙시가 된다.
〈팔복〉은 짧지만 윤동주 문학 전체를 압축한 작품이다.
그는 슬픔을 미화하지 않는다.
슬픔을 이용하지도 않는다.
다만 슬픔 속에서도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그의 슬픔은 절망이 아니라 양심이 된다.
윤동주는 끝내 묻는다.
복은 웃음 뒤에 오는 것인가.
아니면 눈물을 끝까지 견디는 사람 안에서 이미 시작되는 것인가.
그 질문은 오늘도 끝나지 않았다.
윤동주의 〈팔복〉은 성경을 다시 쓴 시가 아니다.
성경을 붙들고 시대 앞에서 울었던 한 청년의 기도다.
그래서 이 짧은 시는 읽는 사람의 가슴속에서 오래 울린다.
슬픔은 축복이 아니지만,
슬픔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사람은
이미 축복의 길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
달삼과 오산학교 문예교사 청람의 대화 ― “왜 윤동주는 성경을 고쳤을까요?”
오산학교 문예반실에는 늦가을 햇빛이 길게 비스듬히 들어와 있었다.
교실 안은 조용했다. 창가에 놓인 화분의 잎사귀 하나가 바람을 받아 아주 조금 흔들릴 뿐이었다. 칠판에는 지난 시간에 적어 둔 문장이 아직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문학은 질문이 끝나는 곳이 아니라, 질문이 시작되는 곳이다.”
청람은 그 문장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책 한 권을 펼쳤다.
윤동주 전집이었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달삼이 교복 차림으로 들어왔다.
평소보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인사를 마친 뒤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윤동주의 〈팔복〉이었다.
달삼은 시를 한 번 읽고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한참 뒤 조용히 말했다.
“선생님.”
“응.”
“오늘은 시보다… 한 줄이 저를 붙잡았습니다.”
청람은 웃으며 물었다.
“마지막 줄이지?”
달삼은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떻게 아셨어요?”
청람은 대답 대신 시를 천천히 읽었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한 줄.
또 한 줄.
여덟 번.
그리고 마지막.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문예반실은 더 조용해졌다.
달삼이 입술을 깨물었다.
“선생님….”
“말해 보렴.”
달삼은 종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윤동주는… 성경을 고친 것 아닙니까?”
청람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창밖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공을 차고 있었다.
넘어지고 웃고 다시 일어났다.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달삼아.”
“성경을 고친 사람은 오래 기억되지 않는다.”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나 성경 때문에 울었던 사람은 오래 기억된다.”
달삼은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뜻입니까?”
청람은 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윤동주는 예수님의 말씀을 반박하려고 이 시를 쓴 것이 아니다.”
“그럼요?”
“너무 믿었기 때문이다.”
달삼의 눈이 커졌다.
“믿었기 때문에… 바꿨다고요?”
청람은 고개를 저었다.
“바꾼 것이 아니다.”
“시대가 그렇게 읽게 만들었다.”
문예반실 창문 밖으로 바람이 지나갔다.
낙엽 하나가 허공을 크게 돌다가 운동장 끝으로 사라졌다.
청람은 그 낙엽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수님은 위로를 약속하셨다.”
“그런데 윤동주가 살던 시대는 위로가 오지 않는 시대였다.”
“하늘은 약속했는데…”
“땅은 침묵하고 있었던 거군요.”
청람이 미소 지었다.
“그래.”
“윤동주는 하나님을 의심한 것이 아니라…”
“시대를 의심한 것이다.”
달삼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
“응.”
“시인은 거짓말을 해도 됩니까?”
청람이 웃었다.
“왜 그런 질문을 하니?”
달삼은 마지막 줄을 다시 가리켰다.
“‘영원히 슬플 것이오.’
결국 영원히 슬프지는 않았잖아요.
해방도 왔고…
부활도 있고…
천국도 있고요.
그런데 왜 이렇게 썼습니까?”
청람은 책을 덮었다.
“좋은 질문이다.”
잠시 침묵했다.
“달삼아.”
“문학은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요?”
“현재를 증언하는 것이다.”
달삼은 숨을 멈추었다.
청람은 계속 말했다.
“1940년 윤동주에게 하루는 영원이었다.”
“내일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하루는 영원처럼 길다.”
“절망은 시간을 늘려 놓는다.”
달삼은 종이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래서…”
“영원이군요.”
청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경의 영원과 시인의 영원은 다르다.”
“성경은 하나님의 시간을 말하고…”
“윤동주는 인간의 시간을 말하는군요.”
“바로 그거다.”
문예반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잠시 후 달삼이 또 물었다.
“선생님.”
“응.”
“왜 같은 문장을 여덟 번이나 반복했을까요?”
청람은 칠판 앞으로 걸어갔다.
분필 하나를 들었다.
칠판에 작은 점 하나를 찍었다.
“이게 슬픔 하나다.”
조금 떨어진 곳에 또 하나.
또 하나.
또 하나.
여덟 개의 점이 칠판에 생겼다.
청람은 분필을 내려놓았다.
“이제 어떻게 보이니?”
달삼은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
“점이 아닙니다.”
“무엇처럼 보이니?”
“별자리 같습니다.”
청람이 미소 지었다.
“그래.”
“슬픔 하나는 개인의 눈물이다.”
“슬픔이 여덟 번 반복되면…”
“민족의 운명이 된다.”
달삼은 그 말에 전율했다.
청람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달삼아.”
“만약 윤동주가 마지막을…”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오.’”
“…라고 그대로 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달삼은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성경 공부는 되었겠지만…”
“윤동주의 시는 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청람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
“문학은 진리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가 인간의 심장에서 어떻게 울리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창밖에서 종이 울렸다.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었다.
달삼은 가방을 메다가 다시 돌아섰다.
“선생님.”
“오늘 알았습니다.”
“무엇을?”
달삼은 시를 가슴에 품으며 말했다.
“윤동주는 성경을 고친 사람이 아니라…”
“성경 앞에서 가장 많이 울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청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늦가을 하늘은 유난히 높았다.
문득 낮은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래서 위대한 시는 성경을 흉내 내지 않는다.”
“성경을 살아낸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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