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숲이 무너지기 전에 먼저 숫자가 무너졌다 ― 이서빈 시인의 「각설하고」 를 읽다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숲이 무너지기 전에 먼저 숫자가 무너졌다 ― 이서빈 시인의 「각설하고」 를 읽다 2026.07.20
숲이 무너지기 전에 먼저 숫자가 무너졌다 ― 이서빈 시인의 「각설하고」 를 읽다

각설하고

시인 이서빈

여우가 말했다

투표는 공정하다

닭들은 새벽을 믿고 각자의 울음을 횃대에 걸어 두었다

뻐꾸기는 남의 둥지에 자신의 새끼를 슬쩍 밀어넣었다

밤이 깊어지자 부엉이는 눈을 감고,

두더지는 땅속에서 숫자를 뒤적였다

아침이 되었다

닭들은 분명 열 번 울었는데

장부에는 스무 번의 울음이 적혀 있었다

사슴이 물었다

저 숫자는 어디서 왔는가?

숫자는 숫자일 뿐, 묻지 말라

여우는 꼬리를 흔들며 웃었다

그날 이후 숲은 더 이상 숲이 아니었다

짐승들은

배고픔보다 의심을 먼저 먹었고,

바람조차 나뭇잎을 셀 때 한 번 더 세어 보았다

숲속 여우가 말했다

어리석기는, 선거란 승자가 태어나는 날이 아니라

권력자의 조작을 맛보는 날인 걸 몰랐단 말인가!

그날 이후, 사자의 왕관도 독수리의 날개도 여우의 지혜도

결국, 썩은 도토리를 숨겨 놓고

겨울을 기다리는 다람쥐의 거짓말보다 초라해지고 있었다

이서빈 시인

경북 영주의 산과 강이 품어 낸 이서빈 시인은, 삶의 결을 언어의 결로 바꾸어 온 시인이자 소설가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작은 떨림을 포착하는 시적 감수성과, 한 시대를 아우르는 서사적 상상력을 함께 지닌 보기 드문 작가로 평가받는다.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시단에 등단한 그는, 등단 이후에도 한곳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언어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해 왔다. 그의 시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기보다, 비유와 상징을 통해 현실의 이면을 드러내는 데 탁월한 힘을 보여 준다. 상징은 장식이 아니라 그의 사유가 숨 쉬는 방식이며, 비유는 기교가 아니라 삶과 하나가 된 언어의 본성이다.

시집

『달의 이동경로』, 『함께』, 『울컥』, 『올챙이를 산란하는 비요일』 등은 서로 다른 결을 지니면서도 인간과 자연, 시대와 양심을 응시하는 일관된 문학정신을 보여 준다. 그의 시는 서정에 머물지 않고 사회를 성찰하며, 현실을 고발하면서도 문학적 품격을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한편 그는 장편소설에서도 남다른 역량을 펼쳐 왔다. 대하소설 『소백산맥』 전 17권은 영주신문 연재를 거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으며, 한 지역의 역사와 인간 군상을 폭넓은 시야로 담아낸 역작으로 주목받았다. 시인의 섬세한 언어와 소설가의 치밀한 서사가 만나, 시대와 인간을 함께 기록하는 장대한 문학 세계를 펼쳐 보인다. 이 밖에도 『창의력 사전』 등 다양한 저술을 통해 문학의 영역을 넓혀 왔다.

현재 한국문인협회 인성교육위원으로 활동하며 문학의 사회적 역할을 실천하고 있으며, 『모던포엠』, 『시인뉴스』, 『스토리문학』의 편집위원으로서 후학을 발굴하고 문단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힘쓰고 있다.

이서빈의 문학은 단순히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데 머물지 않는다. 시대의 모순을 응시하는 비판정신과 인간을 향한 따뜻한 연민, 그리고 우화와 상징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독창적 상상력이 그의 작품 세계를 지탱하는 세 기둥이다.

오늘도 그는 시와 소설이라는 두 개의 강을 함께 건너며, 현실과 문학, 서정과 서사를 하나의 언어로 엮어 가는 작가로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다.

숲이 무너지기 전에 먼저 숫자가 무너졌다

― 이서빈 시인의 「각설하고」 를 읽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좋은 풍자는 현실을 직접 고발하지 않는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우화를 창조한다. 독자는 그 우화를 읽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시대를 발견한다. 이서빈 시인의 「각설하고」 는 바로 그러한 계열의 작품이다. 특정한 사건을 기사처럼 기록하지 않고, 숲이라는 우화적 공간을 빌려 권력과 신뢰, 숫자와 진실의 관계를 집요하게 성찰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동물들의 배치다. 여우, 닭, 뻐꾸기, 부엉이, 두더지, 사슴, 다람쥐는 단순한 등장인물이 아니다. 각각은 하나의 성격이며 하나의 사회적 기능이다. 시인은 인간을 한 사람도 등장시키지 않았음에도 인간 사회의 풍경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것이 우화의 힘이며, 시인 이서빈 시가 지닌 상징 운용의 특징이다.

특히 “닭들은 분명 열 번 울었는데 / 장부에는 스무 번의 울음이 적혀 있었다.”는 대목은 이 작품의 심장이다. 여기서 숫자는 단순한 계산이 아니다. 숫자는 권력이 되고, 기록이 되고, 진실을 대신하는 언어가 된다. 화자는 기록과 실제 사이의 간극을 통해 제도에 대한 불신과 의혹이 어떻게 공동체를 흔들 수 있는지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다. 이 시의 관심은 어떤 사실을 입증하는 데 있다기보다, 신뢰가 무너질 때 공동체가 어떤 균열을 겪는가를 보여 주는 데 있다.

이 작품의 미학은 비판보다 구조에 있다.

시인은 “부정”이라는 단어를 거의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의심이 숲을 잠식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짐승들은

배고픔보다 의심을 먼저 먹었고,

바람조차 나뭇잎을 셀 때 한 번 더 세어 보았다.”

이 구절은 이 시의 백미다. 배고픔은 생존의 문제지만, 의심은 공동체의 문제다. 먹을 것이 부족한 사회보다 신뢰가 사라진 사회가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세 줄로 응축해 낸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바람까지 숫자를 다시 세기 시작했다는 상상력이다. 자연마저 신뢰를 잃는 순간, 숲은 더 이상 숲이 아니다. 그것은 생태의 붕괴가 아니라 윤리의 붕괴이다.

시인 이서빈 시의 개성은 언제나 비유를 설명하지 않는 데 있다. 그는 상징을 독자에게 넘겨준다. 독자는 여우를 권력으로 읽을 수도 있고, 제도로 읽을 수도 있으며, 인간 내면의 욕망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이러한 개방성은 작품의 해석 가능성을 넓혀 준다. 좋은 시는 하나의 정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래 생각하게 만드는 질문을 남긴다.

이 작품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부분은 언어의 절제다. 문장은 짧고 건조하다. 감정을 앞세우지 않는다. 외려 차가운 문장일수록 풍자의 온도는 더 높아진다. 웃고 있는 것은 여우지만, 독자는 웃지 못한다. 바로 이 거리감이 작품의 긴장을 끝까지 유지한다.

마지막 연은 더욱 인상적이다.

“사자의 왕관도 독수리의 날개도 여우의 지혜도

결국 썩은 도토리를 숨겨 놓고

겨울을 기다리는 다람쥐의 거짓말보다 초라해지고 있었다.”

여기에는 권력도, 명예도, 지혜도 신뢰를 잃는 순간 아무 의미가 없다는 통찰이 담겨 있다. 왕관은 권위를 상징하고, 날개는 힘을 상징하며, 지혜는 통치를 상징한다. 그러나 공동체의 신뢰가 무너지면 그 모든 상징은 허물어진다.

시인은 마지막까지 직접 심판하지 않는다. 다만 상징들을 나란히 세워 놓음으로써 독자가 스스로 결론에 이르게 한다.

이서빈 시인은 오래전부터 시와 소설을 넘나들며 서사적 상상력과 압축된 시적 언어를 함께 구축해 온 작가다. 이러한 이력은 「각설하고」 에서도 드러난다.

시 한 편이지만 인물의 배치와 사건의 전개, 결말의 반전에는 서사를 다루는 감각이 살아 있다. 한 편의 우화가 한 편의 장편소설처럼 독자의 기억 속에서 계속 이어진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특정한 시대의 논쟁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 가장 먼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것은 승리도 패배도 아니다. 신뢰가 흔들릴 때 사회는 가장 깊은 상처를 입는다는 오래된 진실이다. 이 시는 바로 그 지점을 우화와 상징으로 비춘다.

「각설하고」 는 현실을 직접 재현하는 시가 아니라, 현실을 비추는 거울을 만든 시다. 그 거울 앞에서 독자는 자신이 믿는 가치와 제도, 그리고 공동체의 신뢰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좋은 풍자는 상대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독자의 양심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그런 의미에서 「각설하고」 는 한 시대의 불안과 의심을 우화적 언어로 응축해 낸 작품이며, 상징과 풍자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현대 우화시의 한 가능성을 보여 준다. 시가 현실을 대신 판결할 수는 없지만, 현실을 다시 성찰하게 만드는 힘은 지닐 수 있다.

이서빈 시인의 「각설하고」 는 바로 그 문학의 역할을 끝까지 붙들고 있는 작품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만난 秀作이다. ㅡ청람

□ 이서빈 작가의 장편대하소설 《소백산맥》

이서빈 시인께

시에는 기술이 있습니다.

기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오래 살아남는 시를 쓸 수 없습니다.

선생님의 시를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하나입니다.

선생님은 비유를 사용하는 시인이 아니라, 비유 속에서 살아가는 시인이라는 것입니다. 상징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상징이 이미 선생님의 사유와 삶 속에 녹아 하나의 호흡이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여,

한 줄의 시어는 애써 꾸며낸 장치가 아니라, 오랜 세월 몸속에서 숙성된 언어처럼 자연스럽게 피어납니다.

「각설하고」 는 그러한 선생님의 문학세계를 집약적으로 보여 주는 대표작이라 생각합니다. 고도의 풍자와 치밀한 우화, 절제된 비유와 상징이 서로 맞물려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도, 단 한 줄도 현실의 언어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시는 끝까지 시로 남아 있으면서 독자의 양심을 흔듭니다.

이러한 작품은 누구나 쓸 수 있는 시가 아닙니다.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의 문을 연 이서빈이라는 이름이기에 가능한 언어의 깊이이며, 오랜 세월 시와 함께 호흡해 온 문학적 내공이 있었기에 가능한 경지입니다.

선생님의 시를 읽으면 비유는 장식이 아니라 사고의 방식이며, 상징은 기법이 아니라 존재의 언어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시와 시인이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순간, 언어는 비로소 생명을 얻습니다. 선생님의 작품에는 바로 그 ‘시와 몸의 일체’가 살아 있습니다.

더욱이 선생님은 시인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장편대하소설 『소백산맥』 전 17권을 통해 시인의 감수성과 소설가의 장대한 서사를 함께 증명해 보였습니다. 한 사람의 작가 안에서 서정과 서사가 서로를 북돋우며 더 큰 문학세계를 이루는 모습은 한국 문단에서도 흔치 않은 성취입니다.

문학은 인간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느냐의 예술입니다. 선생님의 시와 소설은 모두 그 질문을 향해 걸어갑니다. 그 길이 더욱 깊어지고 넓어진다면, 『소백산맥』 은 한국 문학을 넘어 세계 독자들에게도 충분히 다가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작품으로 평가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문학은 유행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견디는 일입니다. 선생님은 언제나 시대를 따라 쓰기보다 시대를 응시하는 언어를 선택해 오셨습니다. 그것이 이서빈 문학의 품격이며, 앞으로도 오래 기억될 이유일 것입니다.

앞으로도 선생님께서 우리 문단에 더 깊은 사유와 더 높은 언어의 지평을 열어 주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2026, 7, 20, 신새벽

청람 김왕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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