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충망에 걸린 한 생명, 은총의 문을 열다 ― 늘샘 안혜초 시인의 「비 오는 날의 어떤 은혜」 를 읽다
방충망에 걸린 한 생명, 은총의 문을 열다 ― 늘샘 안혜초 시인의 「비 오는 날의 어떤 은혜」 를 읽다 2026.07.23
□ 안혜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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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의 어떤 은혜
늘샘 안혜초
한줄금의 소낙비가
한여름 무더위를 어느정도
식혀주고간 오후, 매아미 한마리 우리집 주방의 방충망 한구석에 매달려
젖은 날개를 힘없이 퍼덕이며
떨어질세라 떨어질세라
바둥거리고 있다
매앰 매앰 매애애앰
도와주소서 도와주소서
제발제발 도와주소서
자칫건드렸다간
떨어질세라
나 역시 조심 또 조심 안간힘을 쓰는 어느 순간
감사합니다 하나님
드디어 매아미를 창문안쪽으로 구출하는데
성공하였다.
■
방충망에 걸린 한 생명, 은총의 문을 열다
― 늘샘 안혜초 시인의 「비 오는 날의 어떤 은혜」 를 읽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늘샘 안혜초 시인의 「비 오는 날의 어떤 은혜」 는 거창한 기적을 말하지 않는다. 하늘이 갈라지거나 바다가 길을 내는 장면도 없다. 한여름 소낙비가 지나간 오후, 주방 방충망 한구석에 매달린 매미 한 마리와 그것을 살려 내기 위해 애쓰는 한 사람의 손길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작다 할 수 없다.
생명의 크기는 몸집으로 결정되지 않으며, 은혜의 깊이는 사건의 규모로 측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시인은 “한줄금의 소낙비”라는 표현으로 작품의 문을 연다. ‘한줄금’은 굵고 짧게 지나간 비의 흔적을 떠올리게 한다. 하늘이 한 줄의 물빛 문장을 대지 위에 긋고 지나간 듯하다. 무더위에 지친 여름은 그 빗줄기에 잠시 이마를 식힌다.
비는 더위를 누그러뜨렸으나, 한 생명에게는 새로운 위기를 가져왔다.
사람에게 소낙비는 반가운 냉수 한 사발이지만, 작은 매미에게는 날개를 무겁게 하는 홍수일 수 있다. 자연은 한 존재에게 축복이면서 다른 존재에게 시련이 된다. 안혜초 시인은 바로 이 엇갈린 생의 표정을 놓치지 않는다.
소낙비가 지나간 뒤 시인의 시선은 거대한 하늘에서 주방의 작은 방충망으로 내려온다.
그곳에 매미 한 마리가 매달려 있다.
젖은 날개를 힘없이 퍼덕이며 떨어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매미의 모습은 단순한 곤충 관찰을 넘어선다. 그것은 생의 가장자리에서 마지막 힘을 짜내는 모든 존재의 모습이다.
우리 역시 살아가며 수없이 방충망 같은 경계에 매달린다.
지탱할 힘은 줄어들고, 발아래에는 추락의 어둠이 입을 벌린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병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가난이며, 이별이나 절망일 수 있다.
겉으로는 사소해 보이는 매미 한 마리의 몸짓 속에 인간 존재의 연약함이 겹쳐진다.
“떨어질세라 떨어질세라”라는 반복은 매미의 불안한 움직임을 생생하게 되살린다. 같은 말이 두 번 이어지며 숨이 가빠지고, 독자의 마음도 매미의 작은 발끝에 함께 매달린다.
이때 작품 속 매미 울음은 놀라운 변화를 일으킨다.
“매앰 매앰 매애애앰”
매미의 울음은 곧바로
“도와주소서 도와주소서
제발제발 도와주소서”
라는 기도로 번역된다.
여기에서 안혜초 시인의 신앙적 상상력이 가장 빛난다.
사람들은 매미의 울음을 여름의 소음으로 듣는다. 시인은 그 소리 속에서 구조를 청하는 생명의 기도를 듣는다. 인간의 언어를 갖지 못한 존재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려 달라고 외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시인은 매미에게 인간의 말을 억지로 입히지 않는다. 외려 자신의 귀를 낮추어 매미의 울음 속에 감추어진 절박함을 알아듣는다.
이것이 연민이다.
연민은 불쌍한 존재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감정이 아니다. 그의 작은 떨림 가까이 자신의 마음을 내려놓고, 말 없는 고통까지 들어 주는 능력이다.
시인은 매미의 퍼덕임을 구경하지 않는다. 자신이 그 생명의 구조에 참여해야 한다는 책임을 느낀다.
“자칫 건드렸다간
떨어질세라”
이 구절에는 생명을 다루는 손의 윤리가 담겨 있다.
살리겠다는 선한 의도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성급한 손길이 외려 생명을 다치게 할 수 있다. 도움에도 섬세함이 필요하며, 사랑에도 기술과 기다림이 필요하다.
시인은 자신의 힘을 앞세우지 않는다.
“나 역시 조심 또 조심 안간힘을 쓰는” 모습은 생명을 구하는 일이 얼마나 경건해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작은 매미 한 마리를 향한 이 조심스러움은 신앙의 본질과도 맞닿아 있다. 신앙은 큰 목소리로 하나님을 말하는 데만 있지 않다. 자기 앞에 놓인 연약한 생명을 함부로 다루지 않는 손끝에 있다.
기도는 입술에서만 시작되지 않는다.
떨어지려는 매미 아래로 내미는 손,
다치지 않도록 숨을 죽이는 몸짓,
한 생명이 다시 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주는 마음도
기도의 한 형식이다.
안혜초 시인의 시적 화자는 매미를 구출한 뒤 “감사합니다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매미를 구한 사람은 시인 자신이다. 자신의 손과 노력으로 방충망에 매달린 생명을 창문 안쪽으로 옮겼다.
그럼에도 시인은 성공의 공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다.
“내가 살렸다”고 말하지 않고 “감사합니다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이 태도는 작품의 정신적 중심이다.
자신이 한 선행을 자랑하는 순간, 선행은 사람의 명예를 위한 장식이 되기 쉽다. 시인은 자신이 매미를 구했다기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을 잠시 빌려 한 생명을 받으셨다고 여긴다.
이때 인간은 구원자가 아니라 은총의 통로가 된다.
하나님은 때로 천둥으로 말씀하지 않으신다. 작은 생명을 발견한 한 사람의 시선을 통해 일하시고, 떨리는 손끝을 통해 자신의 자비를 세상에 건네신다.
이 작품의 제목은 「비 오는 날의 어떤 은혜」 이다.
‘그 은혜’가 아니라 ‘어떤 은혜’라고 표현한 점이 인상적이다. 시인은 은혜를 단정적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일상 가운데 스쳐 지나갈 뻔한 한 순간을 조심스럽게 가리킨다.
어쩌면 은혜는 매미가 구조된 일일 수 있다.
또한 시인이 한 생명의 절박함을 외면하지 않은 일일 수 있다. 매미를 살리려 애쓰는 동안 자기 안의 연민이 깨어난 사건일 수도 있다.
더 깊이 보면 구원받은 존재는 매미만이 아니다.
매미를 살려 내는 과정에서 시인의 마음도 무감각한 일상으로부터 구출된다.
사람은 바쁘게 살수록 작은 생명을 보지 못한다. 주방 방충망에 매달린 매미를 귀찮은 침입자로 여기거나 창문을 흔들어 떨어뜨릴 수도 있다.
안혜초 시인은 그 곤충을 골칫거리로 보지 않았다.
하나님이 잠시 자신의 집 앞에 보내신 작은 생명으로 받아들였다. 매미의 위기를 자신의 책임으로 품었고, 그 구조의 순간을 은혜로 해석했다.
이처럼 작품은 일상의 사소한 장면을 신앙적 사건으로 바꾸어 놓는다.
주방은 성전이 되고,
방충망은 생사의 경계가 되며,
매미의 울음은 기도가 되고,
시인의 손은 보이지 않는 사랑의 사다리가 된다.
그날의 소낙비는 단지 여름의 열기를 식힌 것이 아니다. 시인의 마음에 쌓인 무심함의 먼지를 씻어 냈다. 젖은 매미 한 마리는 생명의 존엄을 가르치는 작은 스승이 되었다.
안혜초 시인의 시는 언어의 매끈함보다 체험의 진실성을 앞세운다. 문장은 다소 거칠고 호흡은 산문적으로 이어지지만, 그 거친 결 속에는 현장의 숨결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매앰 매앰 매애애앰”과 “제발제발” 같은 반복은 문법적으로 정제된 표현을 넘어, 구조의 긴박함을 몸으로 전달한다. 작품은 잘 다듬어진 조각품이라기보다 빗속에서 막 데려온 생명의 체온을 그대로 품은 한 장의 기록에 가깝다.
이 생생함이 작품의 미덕이다.
특히 시의 끝을 “구출하는데 성공하였다”라고 맺은 점은 소박하다. 화려한 비유나 장엄한 결론으로 높이지 않는다. 한 생명을 살렸다는 사실 하나로 문장을 닫는다.
이 단순한 결말 속에 깊은 윤리가 있다.
문학은 언제나 거대한 구원을 노래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눈앞에서 떨어지려는 작은 생명 하나를 받아 내는 일도 충분히 위대한 서사가 될 수 있다.
한 생명을 살리는 동안 세계 전체가 잠시 구원받는다.
그 매미는 다시 여름 숲으로 돌아가 울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 울음을 시끄럽다고 했겠지만, 시인은 알았을 것이다.
그 소리는 살아남은 생명이 하늘에 올리는 감사의 찬송이라는 것을.
「비 오는 날의 어떤 은혜」 는 우리에게 낮은 곳을 바라보라고 일러 준다.
신의 은혜는 언제나 크고 눈부신 사건의 모습으로만 찾아오지 않는다. 비에 젖은 날개, 방충망에 걸린 작은 발, 떨어지지 않으려는 미세한 떨림 속에도 은혜는 숨어 있다.
그 은혜를 발견하려면 눈의 높이를 낮추어야 한다.
세상의 중심만 바라보는 사람은 작은 생명의 위기를 보지 못한다. 성공과 명예의 큰 소리만 듣는 사람은 매미의 절박한 기도를 알아듣지 못한다.
안혜초 시인은 주방 창가에서 생명의 가장 작은 목소리를 들었다.
그 순간 시인은 한 마리 매미를 구했고, 매미는 시인에게 은총을 보는 눈을 돌려주었다.
누가 누구를 구했는지 쉽게 말할 수 없다.
사람의 손이 매미를 떨어짐에서 구했다면,
매미의 젖은 날개는 사람의 마음을 무심함에서 구했다.
이 상호 구원의 장면이야말로 작품의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비가 그친 오후, 방충망에는 매미가 남긴 작은 물방울이 있었을 것이다. 그 물방울 하나에는 하늘과 사람과 한 생명이 함께 비쳤을 것이다.
안혜초 시인의 「비 오는 날의 어떤 은혜」 는 바로 그 물방울을 오래 들여다본 시다.
작은 생명을 살리려 내민 손끝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고,
매미의 떨리는 울음 속에서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기도를 듣는다.
은혜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떨어지는 생명 아래
내 손을 내어 주는 순간,
하늘은 이미 그 손 안으로 내려와 있다.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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