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의 끝에서 우리를 받아내는 한 줄의 은총 ― 정순영 시인의 「난간」 을 읽다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추락의 끝에서 우리를 받아내는 한 줄의 은총 ― 정순영 시인의 「난간」 을 읽다 2026.07.23
□ 정순영 시인
■
난간
시인 정순영
하늘이 가까운 지붕에서
곡식을 거두어 배불리 먹고 춤추다가
비가 내리면 미끄러져
어둠 바다로 떨어진다네
지붕에 오를 때는 모르다가
하늘 거울 앞에 낮게 엎드려 회개하니
먹구름 비에 미끄러져도
주님이 난간으로 받쳐주시네
■
추락의 끝에서 우리를 받아내는 한 줄의 은총
― 정순영 시인의 「난간」 을 읽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정순영 시인의 「난간」 은 짧다.
그 짧음은 생각의 빈곤이 아니라, 오랜 생애를 몇 개의 상징 속에 눌러 담은 정신의 압축이다.
이 시에는 지붕이 있고, 곡식이 있으며, 춤과 비와 추락이 있다. 그 아래에는 어둠의 바다가 입을 벌리고 있다. 마지막에는 한 존재의 몰락을 막아 주는 난간이 세워진다.
표면적으로 읽으면 높은 지붕에서 먹고 즐기던 사람이 비에 미끄러져 떨어질 뻔했으나 주님의 도움으로 구원을 얻는 신앙시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이 작품은 인간의 번영과 교만, 위기와 회개, 추락과 은총을 한 편의 짧은 우화로 형상화한 존재론적 고백이다.
시의 첫 행은 “하늘이 가까운 지붕”에서 시작한다.
지붕은 땅보다 높지만 하늘은 아니다.
인간이 오를 수 있는 자리이되, 영원히 머물 수 있는 자리는 아니다.
이 공간적 특성이 중요하다.
인간은 성공했을 때 자신이 하늘 가까이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재산과 명예, 지위와 권력을 얻으면 세상을 아래로 내려다본다. 발밑의 높이를 자신의 크기로 착각하며, 지붕 위에 올라 하늘의 일부를 소유했다고 믿는다.
지붕은 인간의 성취가 세운 높은 자리이면서 동시에 추락의 가능성이 가장 가까운 자리다.
낮은 곳에서는 넘어져도 흙을 짚고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높이 오른 사람의 미끄러짐은 곧 낭떠러지와 맞닿는다. 성공은 사람을 빛나게도 하지만, 한순간에 깊은 어둠으로 밀어 넣을 위험한 경사면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 지붕에서 “곡식을 거두어 배불리 먹고 춤추다가”라고 쓴다.
곡식은 생존을 위한 양식이다. 농부의 땀과 계절의 인내가 맺은 결실이다. 본래 감사와 나눔의 대상이어야 할 곡식이 이 시에서는 배부름과 춤으로 이어진다.
배부름 자체가 죄는 아니다.
문제는 배부름이 은혜의 근원을 잊게 할 때다.
곡식을 거둔 사람이 씨앗과 햇빛과 비, 땅과 농부의 수고를 잊고 모든 결실을 자신의 능력으로만 여기는 순간, 풍요는 감사의 식탁에서 교만의 무대로 변한다.
그 무대 위에서 인간은 춤춘다.
이 춤은 생의 기쁨인 동시에 자기 도취의 몸짓이다. 발아래 지붕이 얼마나 미끄러운지 모른 채, 자신에게는 추락이 없을 것처럼 움직이는 오만의 리듬이다.
시인은 인간의 교만을 거창한 철학 용어로 꾸짖지 않는다. 배불리 먹고 춤추는 한 장면으로 보여 준다. 그 소박한 장면 속에 문명의 욕망과 개인의 허영이 함께 들어 있다.
이윽고 비가 내린다.
비는 곡식을 자라게 한 생명의 물이면서, 지붕을 미끄럽게 만드는 위기의 물이다. 같은 비가 들판에서는 축복이 되고, 높은 지붕에서는 추락의 원인이 된다.
여기에 정순영 시인의 시적 역설이 있다.
세상의 사물은 스스로 선하거나 악하지 않다. 그것을 맞이하는 인간의 자리와 태도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낮은 땅에서 비를 맞으면 생명이 자란다.
교만의 지붕에서 비를 맞으면 발이 미끄러진다.
비가 사람을 떨어뜨린 것이 아니다. 이미 높이 올라 자신을 잊고 춤추던 삶이 비 한 방울에도 중심을 잃은 것이다.
인간의 몰락은 거대한 폭풍에서만 시작되지 않는다. 작은 빗방울 하나, 사소한 유혹 하나, 방심한 선택 하나가 오래 쌓아 올린 삶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시인은 그 추락의 아래를 “어둠 바다”라고 명명한다.
이 표현은 낯설고 깊다.
지붕 아래에는 본래 마당이나 골목이 있어야 한다. 시인은 그 현실적 공간을 지우고 어둠의 바다를 펼쳐 놓는다. 추락은 단순히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지는 물리적 사건이 아니다. 삶의 방향과 의미를 잃고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으로 가라앉는 영혼의 붕괴다.
바다는 넓이를 알 수 없고, 어둠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어둠 바다’는 실패, 절망, 죽음, 죄의식, 고독이 서로 섞여 출렁이는 내면의 심해다. 인간은 그곳에 빠진 뒤에야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구할 수 없음을 절감한다.
첫 연이 인간의 교만과 추락을 그렸다면, 둘째 연은 회개와 구원으로 방향을 돌린다.
“지붕에 오를 때는 모르다가”라는 구절은 인간의 무지를 정확하게 찌른다.
올라갈 때는 높이만 보인다.
떨어질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성공을 향해 달릴 때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잃고 있는지 잘 모른다. 높아지는 동안 곁에 있던 사람을 놓치고, 박수를 듣는 동안 양심의 작은 목소리를 잊는다. 정상에 도착한 뒤에도 자신이 산을 오른 것인지, 낭떠러지 위에 선 것인지 분간하지 못한다.
알게 되는 순간은 대개 미끄러진 뒤다.
고통은 인간을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잘못된 높이를 비추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추락의 공포 앞에서 사람은 비로소 자기 삶의 기울기를 살펴본다.
시인은 이를 “하늘 거울 앞에 낮게 엎드려 회개하니”라고 표현한다.
하늘은 이제 가까이 있다고 자랑할 대상이 아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 된다.
보통 거울은 얼굴을 비춘다.
하늘 거울은 영혼을 비춘다.
세상의 거울 앞에서는 옷매무새를 고치지만, 하늘 거울 앞에서는 삶의 방향을 고친다. 인간의 눈은 외모와 성취를 보지만 하늘의 눈은 숨겨 둔 욕망과 마음의 균열까지 비춘다.
시인이 선택한 동작은 ‘엎드림’이다.
지붕에 오를 때의 몸은 위를 향했다.
회개할 때의 몸은 아래를 향한다.
높아지려던 몸이 낮아질 때, 영혼은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다. 회개는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다. 거짓된 높이에서 내려와 진실한 바닥에 무릎을 대는 일이다.
이 시에서 낮아짐은 패배가 아니라 구원의 시작이다.
주목할 것은 비가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회개했다고 먹구름이 즉시 걷히는 것은 아니다. 신앙은 모든 고난을 제거하는 마술이 아니다. 믿음이 있다고 삶의 지붕이 더 이상 미끄럽지 않은 것도 아니다.
시인은 “먹구름 비에 미끄러져도”라고 말한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인간은 여전히 미끄러질 수 있다. 회개한 사람도 실패할 수 있고, 믿는 사람도 절망의 가장자리에 설 수 있다.
달라진 것은 날씨가 아니다.
추락의 끝에 난간이 생긴 것이다.
“주님이 난간으로 받쳐주시네.”
이 마지막 행에서 시 전체의 상징이 완성된다.
난간은 길을 대신 걸어 주지 않는다. 비를 멈추게 하지도 않으며, 지붕을 평평하게 바꾸지도 않는다. 난간은 사람이 가장자리에서 떨어지려 할 때 몸을 받아 준다.
이것이 정순영 시인이 노래하는 은총의 형식이다.
은총은 인간에게 추락이 없는 생을 약속하지 않는다. 추락이 영원한 파멸이 되지 않도록 붙들어 준다.
주님은 시인의 머리 위에 군림하는 권력자로 나타나지 않는다. 미끄러지는 몸 아래에서 받쳐 주는 난간으로 현현한다.
이 이미지는 매우 따뜻하다.
신은 가장 높은 하늘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인간이 떨어지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기다리는 분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붙드는 것보다 먼저 하나님이 사람의 무너지는 몸을 받아 낸다.
난간은 화려하지 않다.
집의 중심도 아니며, 사람들이 오래 바라보는 장식도 아니다.
늘 가장자리에 서 있다.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자리에서 위험과 사람 사이를 지킨다. 난간은 자신이 높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의 마지막 추락을 막기 위해 묵묵히 몸을 내어 준다.
이 점에서 난간은 사랑과 닮았다.
참된 사랑은 삶의 중앙에서 박수를 받으려 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무너질 때 가장자리로 달려가 말없이 등을 받친다.
정순영 시인의 「난간」 은 짧은 신앙 고백을 넘어, 팔십 년 가까운 생의 굴곡을 통과한 노시인의 자기 성찰로 읽힌다.
1974년 『풀과 별』 추천을 완료한 뒤 열두 권이 넘는 시집을 펴내고, 부산시인협회와 한국자유문인협회를 이끌었으며, 국제PEN한국본부 부이사장, 동명대학교 총장, 세종대학교 석좌교수 등 문학과 교육의 높은 자리를 두루 거친 시인이다.
그가 이제 높은 지붕을 찬양하지 않고 난간을 노래한다는 사실은 의미가 깊다.
오랜 세월 높은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높음의 영광보다 추락의 가능성을 말하고, 자신의 성취보다 자신을 받쳐 준 은총을 고백한다.
진정한 원숙은 많이 가진 것을 자랑하는 일이 아니다. 내가 무너지지 않은 까닭이 오직 나의 능력 때문이 아니었음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시인은 자신을 지붕 위의 주인이 아니라 언제든 미끄러질 수 있는 한 인간으로 내려놓는다.
이 겸허함이 작품의 품격이다.
「난간」 에는 불필요한 수사가 없다. 설명도 길지 않다. 지붕과 곡식, 춤과 비, 어둠의 바다와 하늘 거울, 난간이라는 몇 개의 시어만으로 인간 존재의 상승과 추락, 참회와 구원을 그려 낸다.
특히 지붕에서 난간으로 이동하는 상징의 변화가 인상적이다.
지붕은 인간이 올라선 자리다.
난간은 하나님이 받쳐 주시는 자리다.
지붕은 성취의 구조물이며, 난간은 은총의 구조물이다.
인간은 지붕을 쌓으며 자신이 높아졌다고 생각한다. 그 높은 곳에서 살아남게 하는 것은 자신이 만든 지붕이 아니라, 추락의 경계에 세워진 보이지 않는 난간이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지붕 위에서 살아간다.
누군가는 재산의 지붕에 오르고, 누군가는 명예와 권력, 지식과 신앙의 지붕에 오른다. 높이 올라갈수록 하늘이 가까워진다고 믿는다.
시인은 귀띔한다.
“하늘은 높은 데 올라간 사람에게 가까운 것이 아니라, 낮게 엎드린 사람의 마음속에 가까워진다고.”
「난간」 은 교만한 인간을 꾸짖는 손가락이 아니다. 이미 미끄러지고 있는 우리에게 내미는 따뜻한 손이다.
비는 계속 내릴 것이다.
지붕은 여전히 미끄러울 것이다.
삶의 먹구름이 걷히지 않는 날도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완전히 절망하지 않아도 되는 까닭은,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가장자리에 누군가의 사랑과 기도와 은총이 난간처럼 서 있기 때문이다.
정순영 시인의 「난간」 은 바로 그 사실을 낮고 맑은 언어로 일러 준다.
인간의 생은 높이 오르는 기술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미끄러질 때 무엇이 나를 받치는지 아는 지혜로 완성된다.
지붕은 인간이 세운다.
난간은 은총이 세운다.
우리는 높이 오른 덕분에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미끄러질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를 받아 주었기에 오늘까지 살아 있다.
이 짧은 시는 그 오래된 진실을 한 채의 작은 집처럼 지어 놓았다.
그 집의 지붕 위에는 비가 내리고,
가장자리에는 한 줄의 난간이 서 있다.
그 난간이야말로
시인이 평생 끝내 붙들고 온 믿음이며,
추락하는 인간을 향해 주님께서 내미신
가장 낮고 따뜻한 팔이다.
ㅡ청람 김왕식

댓글
로그인 없이 바로 남길 수 있습니다. 나중에 본인이 수정·삭제하려면 이 댓글의 비밀번호를 정해 주세요. 서로 예의를 지켜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