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복 대신 법전을 입고, 판결문 밖에서 마음을 심리하다 ― 삼일선원(三一禪院)과 선재 박준수 법사의 조사선 법문에 나타난 ‘영원한 지금’의 인간학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법복 대신 법전을 입고, 판결문 밖에서 마음을 심리하다 ― 삼일선원(三一禪院)과 선재 박준수 법사의 조사선 법문에 나타난 ‘영원한 지금’의 인간학 2026.07.31
□ 삼일선원 선재 박준수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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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복 대신 법전을 입고, 판결문 밖에서 마음을 심리하다
― 삼일선원(三一禪院)과 선재 박준수 법사의 조사선 법문에 나타난 ‘영원한 지금’의 인간학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Ⅰ. 여는말
ㅡ법정에서는 사건을 판결했으나 선원에서는 ‘나’라는 피고를 끝내 찾지 못하다
한 사람의 생애에는 서로 만나지 않을 것 같은 두 강이 흐를 때가 있다.
한쪽에는 법률의 강이 흐르고, 다른 한쪽에는 선(禪)의 강이 흐른다. 법률은 사실을 분별하여 책임의 자리를 정하고, 선은 그 분별을 일으키는 마음의 근원을 살핀다. 법정은 누가 옳고 그른지를 가려야 하지만, 선방은 옳고 그름이 생겨나기 이전의 자리를 향한다.
선재(善財) 박준수 법사의 삶은 이 두 강이 한 사람의 가슴에서 만난 드문 경우다.
그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1971년 제13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1973년부터 2000년까지 판사로 재직했으며, 이후 변호사로 활동했다. 대학 시절에는 탄허 스님에게 화엄학을 배웠고, 중년에는 백봉 김기추 거사로부터 받은 화두인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를 참구했다. 청광 선사에게 화두를 점검받았고, 이후 무심선원 김태완 선생의 법문을 들으며 조사선 공부를 이어 갔다. 2011년부터 삼일선원과 선불장에서 조사선 법문을 해 왔으며, 그 법문 가운데 백여 편을 추려 2023년 《영원한 지금 마음을 밝히다》를 펴냈다.
법률가는 사회의 문장을 읽는다.
계약서의 쉼표와 증언의 흔들림, 행위와 책임 사이의 인과를 살핀다. 선 수행자는 마음의 문장을 읽는다. 분노가 일어나기 전 무엇이 있었는지, ‘나’라고 부르는 존재는 어디에 있는지, 고통은 현실에서 오는지 아니면 현실에 붙인 이름에서 오는지를 살핀다.
박준수 법사의 법문은 법률과 불교가 어색하게 결합된 지적 장식이 아니다.
오랜 법조인의 분별 능력이 마침내 분별 그 자체를 심문하는 자리로 이동한 결과다.
법정에서 수많은 피고인을 만났던 사람이 선방에서는 가장 오래된 피고인인 ‘나’를 불러 세운다.
“너는 누구냐.”
직함도 아니고, 가족관계도 아니며, 몸과 마음이라는 대답조차 최종적인 답이 될 수 없다면, 우리는 도대체 누구인가.
삼일선원의 법문은 이 물음을 종교적 장식품으로 걸어 두지 않는다. 듣는 사람의 의자 밑에 놓아, 쉽게 일어서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돌로 만든다.
Ⅱ. 삼일선원(三一禪院)
ㅡ절집의 산문이 아니라 도시 한복판에 열린 마음의 법정
삼일선원은 일반적인 산중 사찰과 다른 모습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 서초동 서울변호사회관에서 매주 일요일 조사선 법문이 열렸고, 공개된 안내에 따르면 법회는 오전 10시 30분부터 정오까지 진행되며 법회 뒤에는 ‘야단법석’이라는 이름의 대화 시간이 이어졌다. 법문은 유튜브를 통해서도 공개되어 왔다. 박준수 법사는 이곳에서 재가 수행자와 법조계 인사,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법문을 이어 왔다.
삼일선원의 특별함은 건물의 형식보다 공간의 성격에 있다.
법복을 입은 출가승이 산문 안에서 설법하는 전통적 장면이 아니라, 평생 법률을 다룬 재가 법사가 변호사회관에서 마음의 법을 말한다. 법률의 문장이 오가던 건물 안에서 언어 이전의 진리를 이야기한다.
이것은 하나의 역설이다.
사회법이 가장 치밀하게 사용되는 자리에서, 모든 이름과 개념은 실체가 아니라는 법문이 펼쳐진다. 유죄와 무죄, 원고와 피고, 승소와 패소가 명확히 구분되는 장소에서 선악(善惡) · 시비(是非) · 유무(有無)의 분별 이전을 살핀다.
삼일선원의 ‘삼일(三一)’이라는 이름 또한 상징적으로 읽힌다.
셋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셋이라는 화엄적 관계를 연상하게 한다. 법사와 청중, 법문이 서로 분리된 듯 보이지만 법문이 살아나는 순간 셋은 하나의 현존(現存)이 된다.
말하는 사람만 법을 소유하지 않는다.
듣는 사람만 법을 받는 것도 아니다.
말과 침묵, 질문과 당혹, 이해와 이해되지 않음이 한자리에서 움직일 때 선원은 건물이 아니라 사건이 된다.
삼일선원은 마음을 설명하는 학원이 아니다.
설명으로 만들어 놓은 마음의 벽을 한 장씩 철거하는 현장에 가깝다.
Ⅲ. 법조인에서 조사선 법사로
ㅡ법률의 저울을 오래 들었던 사람이 마침내 저울을 들고 있는 손을 바라보다
박준수 법사의 수행 여정은 대학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서울대학교 재학 중 청담 스님과 탄허 스님의 법문을 들으며 불교 공부에 들어갔고, 탄허 스님에게 화엄학을 배웠다. 오랜 도반인 고준환 교수는 그를 화려한 활동보다 한결같이 공부에 전념한 사람으로 회고하며 ‘봄볕 같은 사람’이라 표현했다.
화엄학(華嚴學)은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광대한 세계를 보여 준다.
조사선(祖師禪)은 그 광대한 세계를 머리로 이해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바로 지금 그것을 보고 듣는 주체가 누구인지 직면하게 한다.
박준수 법사는 화엄의 넓은 하늘을 배운 뒤 조사선의 바늘구멍을 통과한 셈이다.
그의 중심 화두 가운데 하나는 다음이다.
만법귀일 일귀하처
(萬法歸一 一歸何處)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간다면,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이 화두는 답을 요구하는 시험문제가 아니다.
생각이 의지하던 벽을 끝까지 밀어붙여 더는 논리로 나아갈 수 없게 만드는 장치다. ‘모든 것은 하나’라는 대답에 안주하지 못하게 하고, 그 하나마저 붙잡지 못하게 한다.
법률가는 증거를 통하여 결론에 이른다.
조사선 수행자는 결론을 만드는 마음 자체가 증거가 될 수 있는지를 살핀다.
법정에서는 언어가 사실을 드러내는 중요한 도구다.
선에서는 언어가 사실을 드러내는 동시에 가릴 수 있음을 본다.
박준수 법사의 삶에는 이 두 태도가 함께 들어 있다.
사회의 현실에서는 책임을 분명히 가려야 한다. 마음의 근원에서는 책임을 가르는 수많은 이름과 개념이 절대적 실체가 아님을 보아야 한다.
이 긴장은 모순이 아니다.
현실의 분별을 충실히 사용하되, 그 분별을 진리의 전부라고 착각하지 않는 성숙이다.
Ⅳ. “너는 누구냐”
ㅡ명함을 모두 벗은 뒤에도 남아 있는 한 사람의 맨몸
박준수 법사의 공개 법문에서 반복되는 핵심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이다.
2023년 출판기념 법문에서도 그는 직함, 가족관계, 종교, 직업, 행위로 자신을 설명하려는 한 인물의 이야기를 가져와 질문을 밀고 나간다. 누구의 아내이고 어머니이며 교사이고 종교인이라는 대답은 모두 그 사람이 맺은 관계와 역할을 설명할 뿐, 그가 본래 누구인지를 밝히지 못한다. 몸과 마음이라는 대답도 끊임없이 변한다는 이유로 최종적인 자아가 되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을 명함으로 설명한다.
이름 아래 직함을 적고, 학력과 경력, 재산과 관계를 줄 세운다. 세상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까 두려워 몸에 수많은 이름표를 붙인다.
명함은 사회생활에 필요하다.
명함이 존재의 피부가 될 때 인간은 자신이 맡은 역할의 감옥에 갇힌다.
판사는 판사라는 이름이 사라진 뒤에도 존재하는가.
교수는 강단에서 내려온 뒤 누구인가.
부모는 자녀가 떠난 뒤 자신의 삶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작가는 책이 읽히지 않을 때에도 작가인가.
박준수 법사의 물음은 모든 직함을 무가치하게 만들지 않는다.
직함이 나의 전부라는 착각을 걷어 낸다.
옷은 사람을 보호하지만 사람이 될 수 없다. 직함과 관계, 몸과 생각은 삶의 중요한 옷이지만 존재의 최종적 주인이 될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정답을 얻기 위한 질문이 아니다.
지금까지 자신이라고 믿어 온 것들이 얼마나 쉽게 바뀌고 사라지는지를 비추는 거울이다.
이 질문 앞에 오래 서 있으면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잃는 것이 아니라 이름보다 넓은 자기를 만날 가능성을 얻는다.
Ⅴ. 영원한 지금
ㅡ시간은 흘러가는 강이 아니라 모든 과거와 미래가 몸을 씻는 한 방울의 현재다
박준수 법사의 법문집 제목은 《영원한 지금 마음을 밝히다》이다.
책은 2011년 이후 삼일선원에서 이어 온 조사선 법문 가운데 백여 편을 묶은 것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 질문과 ‘있는 그대로’를 확인하여 안심입명에 이르는 길을 중심으로 삼는다. 출판 소개 자료들은 그가 시종일관 둘이 아닌 자리, 곧 불이(不二)의 세계와 지금 여기의 실재를 강조한다고 설명한다.
‘영원한 지금’은 현재만 즐기라는 생활구호가 아니다.
과거와 미래가 실제로 경험되는 자리가 언제나 지금이라는 통찰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지만 기억으로 지금 나타난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기대와 두려움으로 지금의 마음에 들어온다.
인간이 직접 만날 수 있는 시간은 늘 지금뿐이다.
그럼에도 사람은 지나간 일의 무덤을 등에 지고 다니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관 속에 미리 눕는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끼인 얇은 종이가 아니다.
모든 시간이 출입하는 유일한 문이다.
박준수 법문의 ‘지금’은 시계의 초침으로 잘라 낸 한 순간이 아니다. 생각이 ‘과거’와 ‘미래’라는 이름을 붙이기 전, 보고 듣고 느끼는 생명의 현전(現前)이다.
비가 내릴 때 ‘비’라는 개념보다 먼저 젖음이 있다.
새가 울 때 ‘새소리’라는 판단보다 먼저 들림이 있다.
아픔을 이름 짓기 전에 아픔의 생생한 떨림이 있다.
조사선은 이 생생함을 말로 소유하지 않는다.
바로 지금의 생명으로 확인하게 한다.
‘영원한 지금’이란 시간이 멈춘 상태가 아니다.
시간에 붙인 생각의 쇠사슬이 풀린 자리다.
Ⅵ. 언어는 길이면서 벽이다
ㅡ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다가 손톱의 모양만 연구하는 인간
박준수 법사의 법문에서 두드러지는 주제는 언어와 개념에 대한 경계다.
그는 인간이 아는 것은 주로 이름과 말, 개념과 이미지이며, 유무(有無), 선악(善惡), 시비(是非), 미추(美醜), 우열(優劣), 귀천(貴賤) 같은 구분이 삶의 갈등을 만든다고 말한다. 말과 개념을 실재로 믿고 자신과 타인을 비교할 때 우월감과 열등감, 갈등과 고통이 생긴다는 것이다.
언어는 인간이 만든 가장 위대한 다리다.
보이지 않는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건너가게 하고, 죽은 사람의 생각을 후대에 전달한다.
같은 언어가 존재의 생생함을 납작한 이름표로 만들기도 한다.
한 사람에게 ‘실패자’라는 이름을 붙이면 그가 견뎌 온 수많은 날과 다시 일어설 가능성이 지워진다.
‘성공한 사람’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그의 두려움과 외로움, 아직 끝나지 않은 생의 위험이 보이지 않는다.
언어는 지도를 만든다.
지도는 길을 찾는 데 유용하다.
지도를 실제 산과 강으로 착각하면 종이 위의 푸른 선을 마시고도 갈증이 해소되기를 기다리게 된다.
박준수 법사는 경전과 성경, 종교적 언어조차 진리 그 자체라기보다 진리의 물가로 안내하는 지도라는 취지로 설한다. 말과 문헌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안내에 머물러 실제의 물을 마시지 않는 태도를 경계하는 것이다.
조사선에서 언어도단(言語道斷), 불가사의(不可思議), 개구즉착(開口卽錯)을 말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입을 여는 순간 어긋난다는 것은 침묵만이 진리라는 뜻이 아니다.
말이 진리를 모두 담았다고 믿는 순간 어긋난다는 뜻이다.
말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달을 보기 위해 손가락이 필요할 수 있다.
평생 손가락의 굵기와 손톱만 연구한다면 밤하늘은 끝내 열리지 않는다.
Ⅶ. 불이(不二)의 세계
ㅡ둘이 아닌 것은 차이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차이가 싸우기 이전의 뿌리를 보는 일이다
박준수 법문의 또 다른 중심은 불이(不二)이다.
그의 책과 공개 법문은 ‘있는 그대로’, ‘둘이 아닌 자리’, ‘상즉(相卽)·상의(相依)·상입(相入)’의 세계를 강조하며, 독자가 지금 여기의 생명을 확인하여 안심입명으로 나아가도록 이끈다고 소개된다.
불이는 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숫자의 부정이 아니다.
나와 세계, 주체와 객체, 성스러움과 평범함을 절대적으로 갈라놓는 마음의 습관을 넘어서는 사유다.
사람은 세상을 둘로 나눈다.
내 편과 네 편, 성공과 실패, 고귀함과 비천함, 성자와 중생으로 나눈다. 구분은 생활에 필요하지만, 구분이 존재의 본질이라고 믿으면 차이는 적대가 된다.
불이의 시선은 차이를 지우지 않는다.
파도와 바다는 다른 이름을 갖지만 파도 밖에 바다가 따로 있지 않고, 바다 밖에 파도가 따로 일어나지 않음을 본다.
인간과 세계도 이와 같다.
나는 세계를 바라보는 주체라 생각하지만, 나의 몸과 언어와 생각 모두 세계가 들어와 만든 것이다. 흙과 물, 부모와 사회, 역사와 관계가 없다면 ‘나’라는 존재도 없다.
둘이 아니라는 통찰은 윤리적 책임으로 이어진다.
타인의 고통이 나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다면, 그의 아픔을 외면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함께 사는 세계의 한 부분을 병들게 하는 일이다.
불이는 모든 판단을 포기하는 무책임이 아니다.
현실에서 옳고 그름을 분별하면서도, 그 분별 때문에 상대의 존재 전체를 악으로 굳히지 않는 지혜다.
행위에는 책임을 요구하되 사람에게 돌아올 문을 남겨 둔다.
Ⅷ. 안심입명(安心立命)
ㅡ짐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짐을 들고 있다고 믿었던 허깨비가 가벼워지는 일
박준수 법사는 불교의 핵심을 안심입명(安心立命)으로 설명한다.
그는 ‘나’가 몸과 마음, 직함과 이미지로 구성된 고정된 실체라는 믿음에서 벗어날 때 짊어질 짐이 없음을 알게 되고, 이로써 몸과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안심은 모든 문제가 해결된 상태가 아니다.
병이 사라지고 관계가 뜻대로 되며 재산이 늘어나는 상태만을 뜻하지 않는다.
삶의 파도는 계속 일어난다.
몸은 늙고, 사랑하는 사람은 떠나며, 계획은 무너질 수 있다.
안심은 파도가 사라진 바다를 얻는 일이 아니다.
파도 하나를 바다의 전부로 오해하지 않는 눈을 얻는 일이다.
우리는 슬픔이 일어나면 “나는 슬픈 사람”이라고 말한다.
실패하면 “나는 실패자”가 된다.
분노가 지나가는 동안 자신 전체가 분노라고 믿는다.
박준수 법문의 관점에서는 슬픔과 분노, 행복과 불안 역시 이름과 개념으로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조건에 따라 나타났다 사라지는 경험이다.
구름이 하늘을 덮었다고 하늘이 구름으로 변한 것은 아니다.
마음에 슬픔이 왔다고 존재 전체가 슬픔이 된 것도 아니다.
안심입명은 고통을 부정하지 않는다.
고통에게 자신의 주민등록증을 내어 주지 않는 일이다.
아픔은 머물 수 있지만 그 아픔을 ‘영원한 나’로 임명하지 않는다.
짐을 내려놓는다는 것도 세상의 책임을 버린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해야 한다’는 거대한 착각을 내려놓는 일이다.
Ⅸ. 쉽게 전하는 조사선
ㅡ높은 절벽에 놓인 선어를 사람의 식탁까지 데려오는 법문
조사선은 선문답과 화두, 역설적 언어 때문에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박준수 법사의 특징은 이러한 조사선의 핵심을 일상적 사례와 질문으로 풀어낸다는 데 있다. 불교방송은 그의 법문집 출간을 소개하며 ‘어려운 조사선을 쉽게’ 전달하는 활동에 주목했고, BTN은 2023년 그를 삼일선원 법사로 초대해 수행과 법문 활동을 조명했다.
그의 법문에는 법률가의 논리와 선사의 부정법(否定法)이 함께 나타난다.
먼저 듣는 사람이 믿고 있는 자아의 정의를 하나씩 검토한다.
직함인가.
가족관계인가.
몸인가.
생각과 감정인가.
각 대답의 모순과 변화 가능성을 드러낸 뒤, 더 이상 개념으로 숨을 곳이 없는 자리까지 이끈다.
이 방식은 피고인의 알리바이를 하나씩 확인하는 법정의 심문과 닮았다.
마지막에는 피고인도 판사도 사라지고 오직 지금 이 물음만 남는다.
법문은 해답을 배달하는 택배가 아니다.
듣는 사람의 집에 오래 쌓인 불필요한 가구를 밖으로 끌어내, 창문으로 빛이 들어오게 하는 작업이다.
박준수 법사는 새로운 신념을 하나 더 얹기보다, 이미 마음을 무겁게 한 이름과 믿음을 살핀다.
그의 법문이 일상성을 얻는 까닭은 특별한 종교체험을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보고 듣고 느끼는 경험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뜰 앞의 잣나무와 똥 닦는 막대기, 놀라서 터져 나오는 탄성처럼 평범하고 낮은 현실에서 살아 있는 진리를 확인하게 한다.
조사선의 진리는 금으로 만든 불상 안에만 있지 않다.
사람이 컵을 놓는 소리,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 통증 앞에서 새어 나오는 한숨에도 있다.
일상이 진리를 감추는 것이 아니다.
일상에 붙인 개념이 생명의 맨얼굴을 가릴 뿐이다.
Ⅹ. 경전에도 머물지 말라
ㅡ뗏목을 숭배하다가 강을 건너지 못하는 신앙에 대하여
박준수 법문의 급진성은 종교언어 자체에 대한 집착도 경계한다는 데 있다.
그는 경전과 성경, 부처와 예수의 말씀을 귀중한 안내로 존중하면서도 말과 문헌을 진리 그 자체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지도는 보물로 가는 길을 알려 주지만 지도 자체가 보물은 아니며, 물가로 데려가는 안내서가 물을 대신 마셔 주지 못한다는 취지다.
이 지점에서 그의 법문은 불교 신자만을 향하지 않는다.
모든 종교와 철학, 이념과 학문에 적용될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을 자유롭게 해 준 가르침을 어느 순간 새로운 감옥으로 만들 수 있다.
경전을 통해 자비를 배웠으나 그 경전으로 다른 종교를 낮춘다면, 그는 자비를 배운 것이 아니라 경전의 표지를 소유한 것이다.
정의를 배웠으나 정의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모욕한다면, 정의는 새로운 폭력이 된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를 자신의 사유재산으로 등기하지 않는다.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여백을 남긴다.
경전에도 머물지 말라는 가르침은 경전을 버리라는 뜻이 아니다.
경전이 가리키는 곳으로 실제 걸어가라는 말이다.
자비를 읽었다면 자비를 행동으로 옮기고, 무아를 배웠다면 자신의 자랑을 덜며, 불이를 공부했다면 다른 사람을 적으로만 보지 않아야 한다.
경전이 삶으로 번역되지 않으면 문자는 향기 없는 조화(造花)가 된다.
Ⅺ. 법문과 문학
ㅡ좋은 법문은 설명문이 아니라 독자의 내부에서 계속 끝나지 않는 한 편의 시다
박준수 법사의 법문은 문학적 관점에서도 흥미롭다.
그의 중심 문장인 ‘영원한 지금’은 논리적 개념이면서 동시에 강한 시적 긴장을 품는다.
영원은 끝없이 긴 시간이고, 지금은 붙잡을 수 없이 짧은 순간이다. 서로 반대처럼 보이는 두 말이 만나 하나의 제목이 된다.
시도 본래 서로 멀리 있는 존재를 만나게 한다.
낙엽 속에서 이별을 보고, 강물에서 시간을 읽으며, 빈 의자에서 떠난 사람의 체온을 느끼게 한다.
선어(禪語)와 시어(詩語)는 모두 익숙한 언어의 자동운행을 멈추게 한다.
“뜰 앞의 잣나무”는 식물에 관한 설명이 아니다.
대답을 찾아 멀리 달려가던 생각을 지금 눈앞의 존재로 되돌려 놓는 언어의 급정거다.
좋은 문학은 독자에게 정답을 주지 않는다.
독자 안에 오래 잠들어 있던 질문을 깨운다.
좋은 법문도 같다.
법사의 말을 많이 기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자기 삶의 문장을 새로 읽게 한다.
박준수 법문의 문학성은 화려한 수사에 있지 않다.
개념의 옷을 한 겹씩 벗겨 마지막에 살아 있는 질문 하나만 남기는 데 있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짧은 문장은 한 편의 시와 같다.
읽는 사람의 나이와 상처, 직업과 관계에 따라 다른 울림을 낳는다.
젊은이에게는 미래의 질문이고, 중년에게는 역할의 질문이며, 노년에게는 모든 이름을 내려놓은 뒤의 질문이다.
법문은 법사의 입에서 끝나지 않는다.
듣는 사람의 삶 안으로 들어가 다음 문장을 기다린다.
Ⅻ. 삼일선원의 공동체적 의미
ㅡ법문이 끝난 뒤 질문이 시작되는 ‘야단법석’의 자리
공개된 법회 안내에는 정규 법문 뒤 ‘야단법석’ 시간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이 명칭은 의미심장하다.
야단법석(野壇法席)은 본래 야외에 법단을 마련하여 많은 사람이 설법을 듣는 자리를 뜻한다. 오늘날에는 시끄럽고 어수선한 상황을 가리키는 말로 자주 쓰인다.
삼일선원에서는 이 말이 다시 본래의 생명을 얻는다.
법문이 일방적으로 전달된 뒤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질문과 대화가 이어지는 열린 법석이 된다.
선은 설명을 많이 듣는다고 완성되지 않는다.
자신이 실제로 어디에서 막히는지 드러내고, 삶과 수행의 간격을 확인해야 한다.
공동체는 정답을 함께 외우는 집단이 아니다.
각자가 붙잡고 있는 서로 다른 감옥을 비추어 주는 거울들의 모임이어야 한다.
삼일선원의 법회가 도시의 직장인과 법조인, 재가불자에게 의미를 갖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출가하지 않고도 일상에서 수행할 수 있으며, 법정과 사무실, 가정과 거리에서 분별과 집착을 살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깨달음은 생활을 버리고 들어가는 비밀의 방이 아니다.
생활을 이전과 다르게 보는 눈이다.
ⅩⅢ. 박준수 법문이 현대인에게 건네는 질문
ㅡ이름은 많아졌으나 자신은 더 희미해진 시대
현대인은 어느 시대보다 많은 이름을 갖고 산다.
직업과 직급, 학력과 자격증, 온라인 계정과 사회적 평판이 한 사람의 몸에 층층이 붙는다.
이름은 많아졌으나 정작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경우가 늘어난다.
타인의 평가가 좋아지면 자신이 커졌다고 느끼고, 비판을 받으면 존재 전체가 무너진다. 화면 속 숫자가 자신의 가치를 판결한다.
박준수 법문의 “너는 누구냐”는 이 시대의 정곡을 찌른다.
팔로어 수가 너인가.
직함이 너인가.
타인이 기억하는 이미지가 너인가.
과거의 성공과 실패가 너인가.
그 모든 것이 바뀌거나 사라진 뒤에도 남는 것은 무엇인가.
또 하나의 핵심 질문은 우리가 실제보다 이름 때문에 더 괴로운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그 사건에 실패, 모욕, 불행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고통은 과거와 미래까지 번진다. 실제 사건의 아픔 위에 생각이 만든 두 번째 고통이 쌓인다.
조사선은 현실의 고통을 부정하지 않는다.
실제의 아픔과 그 위에 쌓인 개념의 짐을 구분하게 한다.
현대인은 정보가 부족해서 불안한 것이 아니다.
이미 아는 이름과 판단이 너무 많아 생명의 현재를 만나지 못하기도 한다.
박준수 법문은 지식을 더 얹는 대신 마음의 책상 위를 비운다.
ⅩⅣ. 비판적으로 읽어야 할 지점
ㅡ분별을 넘는 지혜가 현실의 책임까지 지워서는 안 된다
박준수 법사의 조사선 법문을 깊이 이해하려면 한 가지 균형이 필요하다.
유무 · 선악 · 시비와 같은 개념이 실체가 아니라는 가르침은 분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게 한다. 이를 현실의 모든 차이와 책임이 무의미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폭력과 피해, 거짓과 진실은 현실에서 구분되어야 한다.
분별이 공하다고 하여 피해자의 고통도 공허한 개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면 선은 자비를 잃는다.
‘나’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고 하여 행위의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몸과 마음이 조건에 따라 이루어진 존재이기에 개인의 행위는 오히려 수많은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불이는 차이를 지우는 사상이 아니다.
차이가 절대적인 증오로 굳지 않게 하는 지혜다.
안심입명은 현실을 외면하는 심리적 마취가 아니다.
현실을 더 맑게 보고 필요한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게 하는 내면의 자유여야 한다.
이러한 균형 속에서 박준수 법사의 법문은 개인의 위안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윤리로 확장될 수 있다.
법조인의 이력과 선 수행이 진정으로 만나는 자리도 바로 여기다.
법은 책임을 가리고, 선은 책임을 묻는 마음이 증오로 굳지 않게 한다.
ⅩⅤ. 노년의 회향(廻向)
ㅡ평생 쌓은 지식을 높은 탑으로 남기지 않고 사람들이 건너갈 낮은 다리로 놓다
박준수 법사는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삼일선원과 선불장에서 법문과 수행을 이어 온 재가 수행자로 소개되어 왔다. 법조계의 선후배에게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고, 주말 대중법문과 주중 법회를 통하여 전법 활동을 지속했다.
인생 후반의 품격은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했는가보다, 평생 얻은 것을 어디로 흘려보내는가에 달려 있다.
지식과 경륜을 자기 이름의 기념비로 세울 수도 있다.
박준수 법사는 법률가의 경험과 수십 년의 수행을 법문으로 회향했다.
회향(廻向)은 자신이 닦은 공덕을 다른 존재에게 돌리는 일이다.
강물은 자신이 지나온 산의 이름을 자랑하지 않는다.
낮은 곳으로 흐르며 목마른 땅을 적신다.
좋은 노년은 인생의 높은 의자에 오래 앉아 있는 시간이 아니다.
자신의 의자를 낮추어 뒤에 오는 사람이 잠시 딛고 올라서게 하는 시간이다.
박준수 법사의 법문 활동에서 읽히는 중요한 가치는 수행과 사회생활을 분리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법정과 선방, 법률과 화두, 재가자의 일상과 선 수행을 하나의 생 안에서 이어 왔다.
그의 삶은 말한다.
깨달음은 직업을 버린 자리에만 오는 것이 아니다.
직업과 관계를 살아 내면서도 그 역할을 ‘나’의 절대적 실체로 붙잡지 않을 때, 생활 전체가 선방이 될 수 있다.
ⅩⅥ. 맺음말
ㅡ 삼일선원은 마음을 새로 만드는 곳이 아니라 마음에 붙은 수많은 명찰을 떼어 내는 곳이다
삼일선원은 산속에 있지 않다.
도시의 법률가들이 오가는 변호사회관에서 법문이 열리고, 유튜브를 통하여 세상 밖으로 퍼져 나간다.
이 공간의 상징은 깊다.
인간의 갈등과 시비를 법률로 해결하는 장소에서, 시비를 만들어 내는 마음의 뿌리를 살핀다.
법률가 박준수는 오랫동안 사건의 사실과 책임을 가렸다.
법사 박준수는 사건을 경험하고 이름 붙이며 괴로워하는 ‘나’가 누구인지를 살핀다.
그의 법문은 종교적 신념을 하나 더 몸에 붙이는 일을 권하지 않는다.
이미 붙어 있는 이름표를 바라보게 한다.
판사, 변호사, 교수, 부모, 성공한 사람, 실패한 사람, 불교인, 기독교인이라는 이름 뒤에서 지금 보고 듣고 살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의 조사선은 멀리 있는 깨달음을 약속하지 않는다.
지금 컵을 드는 손, 창문을 지나는 햇빛, 귀에 들어오는 자동차 소리 속에서 생명의 맨얼굴을 확인하게 한다.
‘영원한 지금’은 시간이 멈춘 신비한 경지가 아니다.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불안이 붙들고 있던 손을 잠시 펴고, 바로 지금 존재하는 생명에 돌아오는 일이다.
‘나는 누구인가’는 정답을 얻어 명찰처럼 달기 위한 물음이 아니다.
모든 정답이 무너진 뒤에도 살아 있는 이것을 직접 보게 하는 질문이다.
박준수 법사의 법문은 말로 말의 감옥을 허문다.
언어를 사용하면서 언어에 속지 말라고 하고, 경전을 풀이하면서 경전마저 붙잡지 말라고 한다. 부처를 말하면서 부처라는 이름 밖으로 걸어 나가게 한다.
이 역설이 조사선의 칼날이다.
그 칼은 사람을 베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을 묶은 이름과 이미지, 비교와 집착의 매듭을 벤다.
삼일선원에서 가장 중요한 불상은 어쩌면 법당 안에 있지 않을 수 있다.
법문을 듣다가 자신의 생각이 멎은 한 사람의 얼굴, 오래 붙잡았던 원망을 내려놓은 손, 타인을 한 가지 이름으로 단정하던 눈이 비로소 부드러워진 순간이 살아 있는 불상이다.
좋은 법문은 청중을 법사의 추종자로 만들지 않는다.
자신의 발로 자기 마음의 문을 열게 한다.
좋은 스승은 자신의 말 안에 사람을 가두지 않는다.
그 말을 넘어 생명의 현장으로 돌아가게 한다.
선재 박준수 법사의 법문이 우리에게 건네는 중심은 다음과 같이 압축할 수 있다.
너의 이름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그 이름을 너의 전부라고 믿지 말라는 것이다.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생각이 실재의 주인이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을 떠나라는 것이 아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되 세상이 붙여 준 가격표로 자신을 평가하지 말라는 것이다.
경전을 읽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경전의 손가락을 따라 실제의 달을 보라는 것이다.
인간은 평생 자신을 찾는다.
재산과 직함, 관계와 성취 속에 자신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 모든 것을 얻고도 마음 한구석이 비어 있는 까닭은, 자신을 찾는다며 자신의 주변에 붙은 간판만 수집했기 때문일 수 있다.
박준수 법사는 그 간판을 하나씩 내려놓는다.
마지막 간판마저 떨어진 자리에서 특별한 무엇을 새로 세우지 않는다.
창문을 연다.
그 창문으로 지금의 햇빛이 들어오고, 자동차 소리와 사람의 기침, 법문을 듣는 숨이 한꺼번에 들어온다.
바로 그때 삶은 설명이 아니라 현존이 된다.
마침내 삼일선원과 박준수 법사의 법문은 한 문장으로 모인다.
마음을 밝히기 위해
새로운 등불을 사지 말라.
이미 켜져 있는 생명 앞에
네가 붙여 놓은 이름의 커튼부터 걷어라.
커튼이 열리면 햇빛은 새로 태어나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던 빛이 방 안으로 들어올 뿐이다.
깨달음도 이와 같을 것이다.
없던 부처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나’라는 두꺼운 커튼 뒤에 가려져 있던
지금 이 생명의 밝음을
본래의 자리에서 만나는 일.
삼일선원은 그 커튼을 걷는 도시의 선방이며,
선재 박준수 법사의 법문은
사람을 먼 피안으로 데려가는 배가 아니라
이미 발밑에 닿아 있는 이쪽 언덕을
처음 보게 하는 낮고 단단한 손가락이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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