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입은 시대의 맥박을 받아 적는 사람 ― 구충모 기자의 언론정신과 생명윤리, 기억의 저널리즘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상처 입은 시대의 맥박을 받아 적는 사람 2026.08.01
□ 구충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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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입은 시대의 맥박을 받아 적는 사람
― 구충모 기자의 언론정신과 생명윤리, 기억의 저널리즘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여는말
기자의 펜은 어느 쪽으로 기울어야 하는가
시대가 평온할 때 기자의 문장은 종이 위를 걷는다.
시대가 무너질 때 기자의 문장은 사람의 가슴 위를 걷는다.
평상시의 기사는 사실을 전달하는 통로로 읽히지만, 재난과 비극 앞에서 쓰인 문장은 그 사회가 지닌 양심의 깊이를 드러내는 체온계가 된다. 한 줄의 기사는 사건을 설명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슬픔의 방향을 정하고, 분노의 속도를 조절하며, 책임의 소재를 밝히고, 공동체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언어의 디딤돌을 놓는다.
기자의 펜은 가볍다.
그 가벼운 펜 끝에 때로는 한 사람의 명예와 생애, 한 시대의 진실이 매달린다.
2014년 구충모 기자가 남긴 글은 세월호 참사라는 국가적 비극 앞에서 인간과 자연, 타인과 자아, 권력과 국민, 분노와 냉정, 비판과 위로의 관계를 함께 성찰한 시대적 기록이다. 그것은 완성된 학술논문의 문체로 쓰인 글은 아니다. 참사의 충격 속에서 시민과 기자가 동시에 내쉰 긴 호흡에 가깝다.
그 글에는 문장의 이음매가 거칠게 드러나는 대목도 있고, 여러 사건과 사회적 의혹이 한꺼번에 포개지며 논지가 넓게 번지는 부분도 있다. 그 거친 결은 당시 사회가 겪었던 혼란과 절망의 실제 온도를 품는다. 지나치게 매끈하게 다듬어진 유리문장으로는 담아내기 어려운 시대의 생채기가 그 안에 남아 있다.
구충모 기자의 글을 읽는 일은 한 편의 칼럼을 평가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재난 앞에서 언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기자의 분노는 어디까지 뜨거워야 하는가, 비판의 언어는 어떻게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가를 되짚는 일이다.
그의 글은 우리에게 오래된 질문 하나를 다시 건넨다.
기자의 펜은 권력의 책상 쪽으로 기울어야 하는가.
슬픔에 잠긴 시민의 어깨 쪽으로 기울어야 하는가.
진정한 언론은 그 질문 앞에서 머뭇거리지 않는다. 권력을 향해서는 날카로운 질문이 되고, 상처 입은 사람에게는 등을 받쳐 주는 낮은 의자가 되어야 한다.
□ 가운뎃말
- 자연에서 와서 타인에게 이르는 인간
― 구충모 기자 글에 나타난 관계적 인간관
구충모 기자의 글은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라는 근원적 물음에서 시작한다.
이 질문은 철학의 오래된 우물이다. 동서양의 종교와 사상, 문학과 예술은 수천 년 동안 그 우물에 각자의 두레박을 내려왔다. 구충모 기자는 그 물음에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소박하면서도 본질적인 답을 내놓는다.
인간은 자연 밖에 서서 자연을 소유하는 존재가 아니다. 흙과 물, 바람과 햇빛이 잠시 사람의 몸을 빌려 살아가는 생명의 한 형식이다. 사람의 몸에는 강물의 습기가 흐르고, 뼈에는 오래된 산맥의 석회가 잠들어 있으며, 숨에는 숲이 건넨 푸른 문장이 들어 있다.
그의 인간관은 여기에서 타인에 대한 윤리로 확장된다.
눈앞에 서 있는 상대의 모습이 곧 나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인식이다. 타인을 불편하게 만든 말은 보이지 않는 골목을 돌아 자신에게 되돌아오고, 누군가의 가슴에 던진 차가운 문장은 언젠가 자기 삶의 창문에 서리로 맺힌다.
말은 입에서 사라지지만 세계에서는 사라지지 않는다.
말은 공기 속에 흩어지는 소리가 아니라 관계의 피부에 새겨지는 보이지 않는 문신이다. 다정한 말은 누군가의 하루에 창문을 내고, 잔인한 말은 그 사람의 내면에 오래 잠기지 않는 가시를 심는다.
이러한 언어관은 기자에게 더욱 엄격한 윤리를 요구한다.
기자의 말은 사적인 대화보다 훨씬 넓게 퍼진다.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문장이 수천 명, 수만 명의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 기사가 누군가를 의심하게 만들 수도 있고, 한 사람의 무고함을 회복시킬 수도 있다. 사실을 확인하지 않은 단정은 작은 불씨처럼 번져 한 사람의 삶을 잿더미로 만들 수 있다.
기자의 언어는 사냥꾼의 화살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실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어야 한다.
구충모 기자가 사람에 대한 평가와 뒷말을 신중히 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단순한 생활예절을 넘어선다. 이는 언론이 지녀야 할 가장 기본적인 생명윤리와 연결된다. 기사 속 인물은 정보의 재료가 아니라 한 생애를 살아가는 인간이다. 그의 이름 뒤에는 가족과 기억, 노동과 상처, 아직 살아보지 못한 내일이 있다.
타인을 또 하나의 나로 보는 관점은 언론의 폭력성을 낮춘다. 취재 대상자를 사건의 부속물로 보지 않고, 존엄을 지닌 존재로 바라보게 한다. 피해자의 눈물을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장식으로 소비하지 않게 하며, 비극을 조회 수의 불쏘시개로 사용하는 일을 경계하게 한다.
구충모 기자의 글이 지닌 첫 번째 의미는 이 관계적 인간관에 있다.
우리는 서로 분리된 섬이 아니다.
한 사람의 상처는 보이지 않는 해류를 타고 공동체 전체의 해안에 닿는다.
- 세월호라는 국가의 균열
― 재난은 배만 침몰시키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는 한 척의 배가 가라앉은 사건에 머물지 않았다.
그날 바다에 침몰한 것은 선박만이 아니었다. 국민이 국가를 향해 품고 있던 신뢰, 어른이 아이를 지켜 줄 것이라는 믿음, 위기 앞에서 제도가 작동하리라는 최소한의 기대가 함께 물속으로 내려갔다.
배는 바다에서 기울었지만,
사회의 중심축은 육지에서 먼저 기울어져 있었다.
구충모 기자는 이 사건을 ‘부실의 총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 선장과 승무원, 기업과 감독기관, 구조체계와 행정조직, 관행과 부패가 서로 얽힌 채 하나의 거대한 실패를 만들어 냈다고 본다.
대형 참사는 어느 한순간에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작은 부주의, 반복된 묵인, 책임의 외주화, 안전보다 이익을 앞세운 결정들이 오랫동안 지하수처럼 스며들다가 어느 날 지반 전체를 무너뜨린다.
사고는 순간이지만,
참사의 뿌리는 오랜 시간 동안 자란다.
이 점에서 구충모 기자가 말한 ‘부패의 연결고리’는 매우 중요하다. 재난 이후 특정 인물 몇 명에게 모든 책임을 몰아넣는 것으로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꼬리 하나를 잘라내고 몸통을 그대로 둔다면, 같은 비극은 다른 얼굴을 쓰고 돌아온다.
언론의 책무는 희생양을 빠르게 만들어 대중의 분노를 잠시 달래는 일이 아니다. 사고를 가능하게 만든 제도적 사슬을 추적하고, 각 고리가 어떻게 서로를 은폐했는지 밝혀내는 데 있다.
국가적 재난은 지도자의 리더십을 시험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평온한 날의 권력은 의전과 연설로 자신을 장식할 수 있다. 위기의 날에는 화려한 직함이 모두 벗겨지고 판단력과 책임감만 남는다. 누가 현장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누가 결정을 미루었는지, 누가 국민보다 조직의 체면을 먼저 지켰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권력은 높은 곳에 앉을수록 더 멀리 보는 자리가 아니다.
더 낮은 곳의 신음을 먼저 듣는 자리여야 한다.
구충모 기자의 국가관은 분명하다. 권한과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정부와 공직자가 섬겨야 할 대상은 권력기관 자체가 아니라 시민이다. 국가는 국민 위에 세워진 지붕이 아니라, 국민이 비를 피하도록 떠받치고 있는 공공의 우산이다.
그 우산이 위기의 순간에 접혀 버린다면 국민은 질문할 권리가 있다. 누가 손잡이를 놓았는지, 왜 천이 찢어졌는지, 다시는 같은 비를 맨몸으로 맞지 않기 위해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끝까지 따져야 한다.
그 질문을 대신하는 사람이 기자다.
- 분노를 불길에서 등불로 바꾸는 언론
― 선동과 망각 사이의 제3의 길
세월호 참사 이후 한국사회는 거대한 분노의 바다를 건너야 했다.
분노는 잘못된 감정이 아니다. 부당한 죽음 앞에서 분노하지 않는 사회는 양심의 신경이 마비된 사회다. 억울한 희생 앞에서 침묵하는 평온은 평화가 아니라 도덕적 무감각일 수 있다.
문제는 분노의 방향이다.
분노는 어둠을 태우는 횃불이 될 수도 있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집을 모두 불태우는 산불이 될 수도 있다. 사실을 밝히는 에너지가 될 수도 있고, 확인되지 않은 소문과 음모론을 증식시키는 검은 연기가 될 수도 있다.
구충모 기자는 당시 난무하던 여러 괴담과 추측을 경계하면서도 정부와 관계기관의 책임을 외면하지 않았다. 이는 그의 글이 지닌 중요한 균형점이다.
냉정하자는 말은 분노를 포기하자는 뜻이 아니다.
분노가 진실의 주소를 잃지 않게 하자는 뜻이다.
재난 직후 사회에는 정보의 공백이 발생한다. 공식 발표가 늦거나 서로 어긋나고, 책임기관의 대응이 불투명하면 사람들은 그 빈자리를 추측으로 채운다. 불신이 오래 쌓인 사회일수록 작은 의혹도 빠르게 거대한 음모로 성장한다.
언론은 이때 불신을 이용해 독자의 감정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를 자극적인 제목으로 포장하면 일시적인 관심을 얻을 수 있다. 그 관심은 진실을 밝히는 빛이 아니라 혼란을 키우는 인광이 된다.
좋은 기사는 독자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 심장이 잘못된 방향으로 달려가지 않도록 이성의 손을 얹는다.
구충모 기자는 분노와 증오가 무한히 반복될 때 공동체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고 보았다. 이는 책임자를 용서하거나 잘못을 덮자는 뜻이 아니다. 책임을 끝까지 확인하되, 응징의 감정에만 매달려 사회 전체가 파괴적인 적대의 늪에 빠지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정의는 분노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정의에는 사실 확인이 필요하고, 절차가 필요하며, 책임의 크기에 맞는 판단이 필요하다. 피해자의 존엄을 회복하고 제도를 고치며 동일한 비극의 재발을 막는 구체적 실천이 따라야 한다.
분노가 문을 부수는 힘이라면,
정의는 그 자리에 다시 안전한 집을 짓는 일이다.
구충모 기자가 강조한 냉정함은 차가운 무관심이 아니다. 꽃다운 생명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슬픔을 사회개혁의 에너지로 전환하자는 뜨거운 이성이다.
이것이 언론이 담당해야 할 제3의 길이다.
한쪽에는 감정을 자극해 대중을 선동하는 언론이 있다. 다른 한쪽에는 권력의 발표를 받아쓰며 참사를 빠르게 망각시키는 언론이 있다. 참된 언론은 그 둘 사이에서 사실을 붙들고, 책임을 추적하며, 공동체가 더 성숙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언어의 난간을 세워야 한다.
- 기억은 죽은 자에게 보내는 사회의 답장이다
― “결과를 주목하고 잊지 말자”의 의미
구충모 기자의 글에서 가장 오래 남는 문장은 “결과를 주목하고 잊지 말자”는 당부다.
재난 직후에는 모든 언론이 현장으로 몰려간다. 카메라는 눈물을 비추고, 속보 자막은 쉼 없이 흐르며, 전문가와 정치인의 말이 방송 화면을 채운다. 시간이 지나면 세상의 관심은 새로운 사건으로 이동한다.
사건은 뉴스 화면에서 사라지지만,
유가족의 달력에서는 끝나지 않는다.
언론의 진정한 책임은 사회적 관심이 식은 뒤부터 시작될 수 있다. 구조적 문제는 개선되었는가. 책임자는 합당한 책임을 졌는가. 약속한 제도는 시행되었는가. 같은 위험이 다른 현장에 남아 있지는 않은가. 언론은 이러한 후속 질문을 놓지 않아야 한다.
기억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다.
죽은 자에게 보내는 산 자의 사회적 답장이다.
“당신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겠다”는 말은 추모식의 문장으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법과 제도, 조직문화와 안전규정, 공직자의 책임윤리 속에 구체적으로 새겨져야 한다.
언론은 그 약속이 지켜지는지 지켜보는 기억의 파수꾼이다.
기자의 취재수첩은 사건이 발생한 날에만 펼쳐지는 일회용 장부가 아니다. 사회가 잊으려 할 때 다시 펼쳐야 하는 기억의 문서다. 사람들의 시선이 떠난 현장으로 돌아가 남은 문제를 확인하고, 약속과 현실 사이의 거리를 재는 것이 기자의 일이다.
구충모 기자가 오랜 기간 ‘구기자의 세상만사’ 칼럼을 1000회 이어 왔다는 사실도 이러한 지속성과 연결해 볼 수 있다.
천 편의 칼럼은 천 개의 완벽한 문장을 뜻하지 않는다. 천 번이나 세상 앞에 다시 앉았다는 뜻이다. 시대의 표정을 살피고, 사건의 이면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생각을 공적 언어로 내놓는 일을 꾸준히 반복했다는 의미다.
한 번의 명문은 재능이 쓸 수 있다.
천 번의 기록은 사명감이 아니면 쓰기 어렵다.
기자에게 지속성은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여론이 뜨거울 때만 정의를 말하고 관심이 식으면 침묵하는 언론은 사건을 소비할 뿐 역사를 기록하지 못한다.
참된 기자는 뉴스가 떠난 뒤에도 현장에 남는다.
밀물이 빠진 갯벌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진실의 조개를 줍는다.
- 칼과 붕대를 함께 지닌 문장
― 비판과 위로의 균형
구충모 기자의 글에는 국가와 권력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공직자와 정치인, 종교지도자 등 사회 지도층이 외형적 조건과 권위에만 기대 시민과 서민의 바람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도 있다.
그의 비판은 비교적 직접적이다. 때로는 감정의 파고가 높고 문장의 칼날이 거칠게 움직인다. 그럼에도 글 전체는 비판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안아 주자는 요청으로 나아간다.
이 점에서 그의 문장은 한 손에 칼을 들고 다른 손에 붕대를 든 형상을 보인다.
칼은 부패의 고리를 끊기 위해 필요하다.
붕대는 칼이 지나간 자리에 또 다른 죽음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 필요하다.
비판 없는 위로는 잘못을 덮는 담요가 될 수 있다. 위로 없는 비판은 상처 위에 소금을 뿌리는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 언론은 이 두 위험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
피해자를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진상규명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 책임을 묻는다는 명분으로 확인되지 않은 사람까지 집단적 분노의 제물로 삼아서도 안 된다.
구충모 기자가 “그 분노의 대상이 남이 아니라 언젠가 있었던 내 모습의 일부이거나 앞으로 예기치 않게 다가올 나일 수 있다”고 말한 대목은 책임의 보편성을 환기한다.
누구든 실수할 수 있다는 말로 중대한 과실을 가볍게 여기자는 뜻은 아니다. 인간의 취약성을 인정하고, 특정 개인을 악마로 만드는 데 그치지 말며, 자신 역시 무책임과 침묵의 구조에 가담한 적은 없는지 돌아보자는 요청이다.
사회는 언제나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깔끔하게 나뉘지 않는다. 거대한 참사의 배후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묵인과 귀찮음을 피하려는 선택, 관행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침묵이 층층이 쌓여 있을 수 있다.
악은 때로 뿔을 달고 오지 않는다.
“원래 다 그렇게 한다”는 낡은 슬리퍼를 신고 일상 속으로 들어온다.
언론이 개인의 악행만을 확대하고 구조적 원인을 놓치면 대중은 잠시 분노한 뒤 안도한다. 문제의 원인을 나와 무관한 악인에게 넘겨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구충모 기자의 글은 그 안도를 깨뜨린다. 국가와 지도자의 책임을 묻는 동시에 시민 각자의 성숙도 요청한다. 이는 책임을 분산시키려는 논리가 아니라, 재난을 낳는 사회적 토양 전체를 바꾸기 위한 성찰이다.
- 상패보다 무거운 취재수첩
― 언론발전최고대상 수상의 의미
구충모 기자는 2021년 ‘위대한 대한민국 국민 대상’에서 언론발전최고대상을 수상했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분야의 취재와 연구, 장기간 이어 온 칼럼 활동 등이 평가의 배경으로 제시되었다.
수상은 한 언론인의 삶을 완성하는 마침표가 아니다. 세상이 그의 어깨에 올려놓는 쉼표에 가깝다. 잠시 걸음을 돌아보되, 다시 기록의 길로 나아가라는 요청이다.
구충모 기자 역시 수상소감에서 상을 취재와 글쓰기에 대한 응원의 메시지로 받아들이고, 더 많은 소식을 정확하고 흥미롭게 전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참된 기자는 상패를 장식장에만 세워 두지 않는다.
그 상패를 다시 취재수첩의 무게로 바꾼다.
언론인의 상은 개인의 명예를 높이는 데 의미가 있을 수 있다. 더 본질적인 가치는 그 수상이 이후의 언론활동을 얼마나 엄중하게 만드는가에 있다.
상을 받은 기자의 문장은 이전보다 더 조심스러워야 한다. 권위가 커진 만큼 한 줄의 영향력도 커지기 때문이다. 명예는 높이 달린 훈장이 아니라 자신의 언어를 더욱 낮게 살피게 하는 거울이어야 한다.
구충모 기자의 2014년 글과 2021년 수상을 함께 바라보면, 그의 언론정신은 세 가지 축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인간을 관계적 존재로 바라보는 언어윤리다.
둘째는 국가와 권력을 국민의 자리에서 감시하려는 비판정신이다.
셋째는 분노를 파괴적 증오가 아니라 사회적 성숙으로 이끌려는 공동체적 책임의식이다.
그의 글은 정교한 이론체계를 갖춘 언론학 논문은 아니다. 현장 기자가 시대의 비극 앞에서 자신의 양심과 씨름하며 써 내려간 실천적 문장이다.
그 문장에는 흙이 묻어 있다.
현장의 빗물이 배어 있고, 시대의 먼지가 붙어 있다.
언론은 너무 깨끗한 방에서만 만들어질 수 없다. 사람들의 울음과 노동, 실패와 갈등이 부딪치는 거리로 나가야 한다. 구충모 기자의 글이 지닌 의미는 바로 그 현장성에 있다.
□ 맺음말
ㅡ 언론은 국가의 거울이 아니라 국가의 신경이어야 한다
거울은 눈앞의 모습을 비춘다.
신경은 보이지 않는 통증을 먼저 알아차린다.
언론이 사회의 거울에만 머문다면 이미 벌어진 사건을 보여 주는 것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더 나은 언론은 사회의 신경이 되어야 한다.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위험의 통증을 감지하고, 권력의 무감각을 깨우며, 시민의 작은 신음이 국가의 머리까지 전달되게 해야 한다.
구충모 기자의 2014년 글은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인간과 국가, 언론과 시민의 관계를 돌아본 한 편의 시대적 고백이다.
그는 자연에서 와 자연으로 돌아가는 인간을 말하며 타인을 또 하나의 자신으로 바라보자고 했다. 말과 생각이 보이지 않는 파동으로 상대에게 전달된다는 믿음을 통해 언어의 책임을 강조했다.
그는 정부와 관계기관의 위기대응, 사회에 만연한 부실과 부패의 연결고리를 지적했다.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며 국가가 섬겨야 할 대상은 시민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을 환기했다.
그는 분노와 절망 속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말자고 했다. 이는 분노를 억누르자는 말이 아니라, 분노가 괴담과 증오의 늪에 빠지지 않고 진상규명과 제도개혁의 강으로 흘러가게 하자는 요청이었다.
그는 결과를 주목하고 잊지 말자고 했다. 사건이 뉴스의 화면에서 사라진 뒤에도 약속이 지켜지는지, 안전이 개선되었는지, 책임이 완수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기억의 저널리즘을 요구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오늘의 언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속보 경쟁이 사실 확인을 앞지르고, 자극적 제목이 기사의 내용을 삼키며, 진영의 논리가 진실의 얼굴을 반으로 찢는 시대다. 기자의 문장이 독자의 분노를 상품으로 만들고, 비극이 클릭 수를 위한 무대장치로 소비될 위험도 커졌다.
이럴수록 기자는 자신의 펜 끝을 살펴야 한다.
그 펜 끝에 진실이 매달려 있는가.
권력의 눈치를 보는 침묵이 묻어 있는가.
상처 입은 사람의 눈물을 함부로 소비하는 욕망이 숨어 있는가.
기자는 판사가 아니다. 모든 진실이 밝혀지기 전에 유죄를 선고해서는 안 된다. 기자는 권력의 대변인도 아니다. 공식 발표라는 이유만으로 의심 없이 받아써서는 안 된다.
기자는 어둠 속에서 사실의 발자국을 추적하는 사람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꺼져 가는 작은 목소리를 공적인 광장으로 데려오는 사람이다.
구충모 기자의 글은 완벽하게 정제된 문학적 조형물이라기보다, 비바람 속에서 세워진 임시등대에 가깝다. 벽돌의 모양이 고르지 않을 수 있고, 불빛이 때때로 흔들릴 수도 있다. 그 등대는 시대의 어둠 앞에서 빛을 켜려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의 언론발전최고대상 수상도 이러한 오랜 기록의 연장선에서 바라볼 수 있다. 천 회에 이르는 칼럼은 세상을 향한 천 번의 출석이며, 기자로서 자기 자리를 비우지 않으려 한 시간의 흔적이다.
기자의 가장 큰 업적은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데 있지 않다. 그가 남긴 문장으로 인해 권력이 한 번 더 긴장하고, 시민의 생명이 한 번 더 존중받으며, 사회가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게 되는 데 있다.
좋은 기자는 세상을 시끄럽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세상이 외면한 진실을 더 이상 침묵할 수 없게 만드는 사람이다.
좋은 기사는 독자를 화나게 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분명히 보게 하고, 어떻게 고칠 수 있는지 생각하게 하며, 상처 입은 이와 함께 살아갈 마음을 일으킨다.
구충모 기자의 펜이 앞으로도 권력의 그늘에는 창문을 내고, 시민의 슬픔에는 의자를 놓으며, 쉽게 잊히는 사건 곁에는 기억의 나무 한 그루를 심기를 기대한다.
언론인은 시대의 왕관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시대의 상처 곁에 오래 무릎을 꿇는 사람이다.
세상이 모두 다음 뉴스로 떠난 뒤에도 남아,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의 이유를 기록하는 사람이다. 수많은 말이 공중으로 흩어지는 시대에 끝까지 사실의 무게를 견디는 사람이다.
구충모 기자의 글과 언론 여정이 우리에게 남기는 최종적인 울림은 명료하다.
기자의 펜은 칼이어야 한다.
부패와 거짓의 매듭을 자르는 칼이어야 한다.
그 펜은 동시에 바늘이어야 한다.
갈라진 공동체의 상처를 꿰매는 바늘이어야 한다.
칼만 가진 언론은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다.
바늘만 가진 언론은 깊은 병의 뿌리를 제거하지 못한다.
칼과 바늘을 함께 지닌 문장,
진실의 냉정함과 인간의 체온을 함께 품은 기록,
그것이 구충모 기자의 글이 지향한 언론의 자리이며, 우리 시대가 기자에게 다시 요청해야 할 언론정신이다.
기자에게 가장 오래 남는 훈장은 금빛 상패가 아니다.
그의 한 줄로 인해
국가가 국민의 목소리를 한 번 더 듣고,
권력이 자신의 그림자를 한 번 더 돌아보며,
한 생명이 이전보다 더 귀하게 여겨지는 것,
그것이 언론인에게 주어지는
가장 무겁고도 빛나는 훈장일 것이다.
―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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