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사람의 숨을 산맥의 노래로 바꾸는 예술 ― 이은경 교수의 '요들 음악과 생활예술의 미학에 관한 소고'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사람의 숨을 산맥의 노래로 바꾸는 예술 ― 이은경 교수의 '요들 음악과 생활예술의 미학에 관한 소고' 2026.08.08
사람의 숨을 산맥의 노래로 바꾸는 예술 ― 이은경 교수의 '요들 음악과 생활예술의 미학에 관한 소고'

□ 요들송 이은경 교수

사람의 숨을 산맥의 노래로 바꾸는 예술

― 이은경 교수의 요들 음악과 생활예술의 미학에 관한 소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Ⅰ. 들어가는 말

― 산은 높이를 자랑하지 않고 메아리를 남긴다

세상에는 자신을 높이는 소리가 있고, 사람을 높이는 소리가 있다.

전자에는 박수가 오래 머물고, 후자에는 사람이 오래 머문다. 자신의 기량을 과시하는 노래는 무대가 끝나면 객석의 불빛과 함께 사라지기 쉽다.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노래는 공연이 끝난 뒤에도 누군가의 가슴에 작은 불씨로 남는다.

이은경의 요들은 후자에 속한다.

그의 노래는 높은 음역을 자랑하기 위해 산을 오르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속에 오래 잠들어 있던 메아리를 깨우기 위해 산을 부른다. 그의 목소리가 가슴에서 머리로, 다시 머리에서 가슴으로 오르내릴 때, 한 사람의 숨은 어느새 골짜기를 건너는 바람이 되고, 메마른 일상은 푸른 목초지가 된다.

그의 요들을 듣고 있으면 스위스 알프스가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니다. 오래 잊고 살았던 자신의 순수와 마주하게 된다. 어린 날의 하늘, 이름 없이 피어 있던 들꽃, 서로의 손을 잡고 웃던 사람들의 얼굴이 노래의 능선을 따라 되돌아온다. 이은경의 요들에는 먼 나라의 이국적인 풍경보다 가까운 사람의 체온이 먼저 깃들어 있다.

그의 요들은 기교 이전에 삶이며, 공연 이전에 공동체이고, 예술 이전에 사람이다.

요들은 본래 산과 산 사이에서 사람의 위치를 알리고 서로의 안부를 잇던 소리였다. 이은경의 노래 역시 고립된 개인의 독창으로 머물지 않는다. 한 사람이 소리를 내면 다른 사람이 화답하고, 낯선 이들이 한 호흡으로 이어지며, 서로 다른 생애가 하나의 화음 안에서 잠시 이웃이 된다. 그의 무대는 관객을 침묵하는 구경꾼으로 남겨 두지 않는다. 듣는 사람의 가슴에도 작은 산 하나를 세우고, 그 산에서 저마다의 메아리가 태어나게 한다.

이 지점에서 이은경의 요들은 단순한 음악 장르를 넘어 생활예술의 깊은 미학에 닿는다. 생활예술은 예술을 특별한 사람만의 소유물로 가두지 않는다. 밥을 짓고, 이웃을 만나고, 상처 입은 마음을 위로하는 일상 속으로 예술을 데려온다. 이은경은 요들을 삶의 장식으로 두지 않고, 사람과 사람을 잇는 다리로 삼아 왔다.

그가 바꾸어 놓는 것은 음정만이 아니다. 외로운 숨을 함께 부르는 노래로, 굳어 있던 표정을 환한 웃음으로, 각자의 골짜기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하나의 산맥으로 바꾸어 놓는다.

산은 높이를 자랑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에게 닿은 한 사람의 목소리를 더 멀리 돌려보낸다. 이은경의 요들 또한 그러하다. 그의 노래는 자신에게 머물지 않고 사람에게 건너가며, 한 사람에게 닿은 따뜻한 울림은 다시 다른 사람의 삶으로 번져 간다.

그 메아리의 길 위에서 예술은 비로소 사람의 얼굴을 얻는다.

Ⅱ. 요들은 소리를 높이는 음악이 아니라 영혼의 거리를 좁히는 음악이다

많은 사람들은 요들을 독특한 창법으로 이해한다.

가슴에서 솟아오른 소리가 머리의 울림으로 급격히 전환되고, 다시 낮은 음역으로 돌아오는 독특한 음성의 움직임, 맑고 투명한 음색, 산과 골짜기를 건너가는 듯한 긴 메아리. 물론 이러한 요소들은 요들의 외형을 이루는 중요한 특징이다.

다만 이은경이 바라보는 요들의 본질은 그보다 훨씬 깊은 곳에 놓여 있다.

그에게 요들은 목소리를 높이는 기술이 아니라 마음의 문턱을 낮추는 예술이다. 얼마나 높은 음을 낼 수 있는가보다, 얼마나 먼 마음에 닿을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화려한 기교로 청중을 압도하는 대신, 굳게 닫힌 사람의 가슴에 작은 틈을 내어 웃음과 온기가 스며들게 한다.

요들은 본래 먼 산과 골짜기 사이에서 서로의 위치를 알리고 안부를 전하던 소리였다.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사람에게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리고, 그 응답을 기다리던 삶의 언어였다. 한쪽 산비탈에서 보내진 목소리가 다른 산에 닿아 되돌아올 때, 사람들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은경의 요들에는 그 오래된 본성이 살아 있다.

그의 노래는 산과 산 사이를 연결하는 데 머물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골짜기를 건넌다. 세대의 차이, 삶의 형편, 성격과 직업,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려운 외로움까지도 하나의 호흡 안에 불러 모은다. 멀리 있는 사람에게 존재를 알리기 위해 태어난 노래가 그의 손을 거치며 멀어진 마음을 다시 가까이 불러오는 문화로 되살아난다.

그의 공연에서는 관객과 무대가 단단히 분리되지 않는다.

한 사람이 노래를 시작하면 다른 이의 손뼉이 리듬이 되고, 또 다른 사람의 웃음이 화음이 된다. 함께 웃고, 함께 손뼉 치고, 함께 노래하는 동안 객석은 더 이상 바라보기만 하는 자리가 아니다. 저마다 다른 삶을 지닌 사람들이 잠시 같은 박동을 나누는 공동체의 마당이 된다.

이때 음악은 감상의 대상에서 관계의 언어로 변한다.

잘 부르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경계가 낮아지고, 무대의 주인공과 객석의 구경꾼이라는 구분도 희미해진다. 목소리가 아름다운 사람만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서툰 음정도, 늦은 박자도, 수줍은 웃음도 모두 하나의 음악 안에서 자리를 얻는다. 완벽함보다 참여가 앞서고, 평가보다 공감이 먼저 놓인다.

바로 여기에 이은경 요들의 가장 큰 미학이 있다.

그의 요들은 사람을 놀라게 하기보다 서로를 바라보게 하며, 음역을 넓히기보다 관계의 폭을 넓힌다. 높이 올라간 소리는 다시 사람에게 내려오고, 멀리 날아간 메아리는 끝내 따뜻한 얼굴 하나를 찾아 돌아온다.

이은경의 요들은 영혼과 영혼 사이에 놓인 거리를 한 걸음씩 좁혀 가는 음악이다.

Ⅲ. 그의 노래는 음정을 쌓지 않고 사람을 세운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흩어진 음을 가지런히 세우고, 거친 숨을 고운 선율로 다듬으며, 무채색의 일상에 한 줄기 빛을 들여놓는다. 다만 아름다움만 남기는 예술은 때로 무대 위의 찬란한 장식에 머물 수 있다. 더 깊은 예술은 주저앉은 사람의 마음 곁으로 내려가 다시 일어설 작은 힘을 건넨다.

이은경 회장이 오랫동안 소외계층을 위한 문화지원 사업을 이어 오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에게 문화는 여유 있는 사람이 선택하여 소비하는 상품이 아니다. 인간다운 삶을 지탱하는 기본적인 권리이며,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할 마음의 햇볕이다. 빵이 육신의 허기를 채운다면 노래는 존재의 허기를 달랜다. 사람은 먹고사는 일만으로 온전히 살아갈 수 없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타인의 박수 속에서 존중받으며, 누군가와 기쁨을 나누는 순간이 있어야 삶은 비로소 사람의 얼굴을 갖는다.

경제적 형편 때문에 노래를 배우는 일을 일찍 포기했던 사람, 외로움이 오래 눌러앉아 웃는 법마저 희미해진 사람, 무대라는 공간을 평생 자신과 무관한 세계로 바라보았던 사람들에게 이은경 회장은 먼저 손을 내민다.

그 손은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돕는 시혜의 손이 아니다. 한 사람 안에 묻혀 있던 가능성을 믿고 기다려 주는 손이며, 세상 밖으로 나올 용기를 함께 붙들어 주는 손이다. 그의 곁에서는 잘 부르는가, 박자가 정확한가, 목소리가 아름다운가가 먼저 평가되지 않는다. 떨리는 목소리도 한 사람의 생애를 품은 소리로 존중받고, 서툰 몸짓도 세상 앞에 자신을 내보이는 귀한 첫걸음으로 받아들여진다.

그 손끝에서 음악은 기술을 배우는 시간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시간을 회복하는 과정으로 바뀐다.

처음에는 고개를 숙인 채 작은 소리로 따라 부르던 사람이 어느 날 가슴을 펴고 노래한다. 박수받을 자격이 없다고 여겼던 사람이 무대 한가운데에서 환한 얼굴로 인사를 건넨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살아온 생애가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한 곡의 노래 속에서 잠시 자유를 얻는다. 그 순간 무대 위에 세워지는 것은 완성된 음정만이 아니다. 오래 움츠러들었던 한 사람의 존엄이며, 삶의 가장자리로 밀려났던 존재의 자리이다.

이은경 회장의 음악은 사람을 구경거리로 세우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긍정할 수 있는 주인공으로 일으킨다. 도움을 받는 사람과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는 경계도 그 노래 안에서는 낮아진다. 한 사람은 목소리를 건네고, 다른 사람은 미소를 돌려주며, 또 다른 이는 손뼉으로 서로의 존재를 받쳐 준다. 그렇게 음악은 베푸는 자와 받는 자를 나누지 않는 둥근 식탁이 된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공연이 끝난 뒤에도 오래 남는다.

사람들은 정확한 음정과 화려한 기교를 먼저 기억하지 않는다. 자신도 누군가에게 존중받을 수 있다는 감각, 오래 닫혀 있던 마음이 환하게 열리던 순간, 곁에 선 이들과 하나의 노래를 나누었던 따뜻한 체온을 품고 돌아간다.

멜로디보다 위로가 먼저 기억되고, 박수보다 사람의 얼굴이 더 오래 남는다.

이은경 회장의 요들은 음표를 높이 쌓아 올리는 음악이 아니다. 세상의 낮은 자리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린 사람 곁에 작은 디딤돌을 놓고, 그 위에 한 사람의 삶과 존엄을 다시 세우는 예술이다.

Ⅳ. 이은경 요들의 미의식은 ‘맑음’에 있다

예술은 시대마다 서로 다른 아름다움을 빚어 왔다.

눈부신 장식과 웅장한 규모를 아름다움의 척도로 삼은 시대가 있었고, 격렬한 감정과 내면의 폭발을 예술의 정점으로 여긴 시대도 있었다. 어떤 예술은 강렬한 빛으로 시선을 붙들었으며, 어떤 예술은 거대한 소리로 사람을 압도했다.

이은경의 요들이 선택한 아름다움은 ‘맑음’이다.

그의 맑음은 꾸밈이 없다는 뜻에만 머물지 않는다. 비어 있어서 가벼운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욕심과 과장을 오래 덜어 낸 뒤에야 비로소 드러나는 투명성이다. 산꼭대기에 쌓인 눈이 수많은 먼지와 소음을 흰 침묵 아래 가라앉히듯, 그의 목소리는 삶의 번잡함을 걷어 내고 사람 안에 남아 있는 가장 순한 결을 불러낸다.

그의 음색에는 자신을 크게 보이게 하려는 부풀림이 없다.

감정을 억지로 흔들어 눈물을 끌어내지 않으며, 화려한 기교로 청중의 감탄을 재촉하지도 않는다. 높은 음에 이를 때에도 힘을 과시하기보다 바람이 능선을 넘듯 가볍게 건너간다. 낮은 음으로 내려올 때에도 슬픔을 짙게 칠해 소비하지 않는다. 아픔을 확대하여 전시하기보다 그 곁에 맑은 숨 한 자락을 놓아준다.

이러한 절제는 감정의 부족이 아니다. 감정을 함부로 낭비하지 않는 예술적 품격이다.

물이 맑을수록 바닥의 돌과 모래가 선명하게 보이듯, 그의 노래는 장식을 덜어 낼수록 그 안에 담긴 마음을 또렷하게 드러낸다. 목소리가 앞에 나서지 않기에 노래 속 사람의 체온이 살아나고, 기교가 자신을 주장하지 않기에 듣는 이의 기억과 그리움이 들어설 자리가 생긴다.

그 빈자리에서 청중은 저마다의 내면과 마주한다.

어린 시절 뛰놀던 들판, 오래전에 떠나보낸 사람의 웃음, 바쁜 삶 속에서 잊고 지냈던 순한 마음이 투명한 음결을 따라 되돌아온다. 이은경의 요들은 새로운 감정을 강제로 주입하지 않는다. 사람 안에 이미 있었으나 먼지에 덮여 있던 따뜻함을 햇살 아래 다시 내어놓는다.

그의 맑음은 음색만의 특질도 아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예술을 나누는 방식에도 같은 투명성이 흐른다. 무대 위의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보다 함께 부르는 사람을 빛나게 하고, 완성된 실력보다 참여하는 기쁨을 귀히 여긴다. 앞에 서 있으면서도 타인의 목소리를 가리지 않는 자세, 자신에게 모인 박수를 다시 공동체에 돌려보내는 마음이 그의 음악을 맑게 지탱한다.

맑음은 약하지 않다.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샘물은 소리 없이 흐르면서도 오랜 시간 골짜기를 적시고, 마침내 메마른 땅에 풀과 꽃을 일으킨다. 이은경의 요들 또한 큰 충격으로 사람을 움직이지 않는다. 투명하고 절제된 울림으로 굳은 마음을 천천히 씻고, 지친 영혼이 다시 숨 쉴 자리를 마련한다.

그 울림은 알프스의 눈처럼 깨끗하고, 산골짜기를 흐르는 샘물처럼 오래 귀를 씻어 준다.

노래가 지나간 자리에는 소란한 감탄보다 한결 맑아진 마음이 남는다. 바로 그 투명한 여운이 이은경 요들이 지닌 가장 고유하고 깊은 아름다움이다.

Ⅴ. 생활음악은 그의 철학이다

이은경 회장이 평생 지향해 온 것은 생활 속의 음악이다.

그에게 음악은 극장의 높은 천장 아래에서만 울려야 하는 특별한 소리가 아니다. 조명을 받은 무대, 잘 차려입은 연주자, 정숙한 객석만이 음악의 자리가 될 수는 없다. 사람의 숨이 머무는 곳, 하루의 노동이 끝나는 곳, 외로운 마음이 잠시 기대는 곳이라면 어디든 음악은 살아 있어야 한다.

노래는 시장에서도 울려야 한다.

상인의 거친 손과 손님들의 분주한 발걸음 사이에서도 한 소절의 노래는 하루의 피로를 풀어 주는 작은 그늘이 된다. 복지관에서도 살아야 한다. 긴 세월을 건너온 이들의 굽은 어깨 위에 리듬 하나가 내려앉으면, 잊고 있던 젊은 날의 미소가 다시 얼굴에 번진다. 학교에서도 숨 쉬어야 한다. 성적과 경쟁에 눌린 아이들에게 음악은 자신을 표현하는 또 하나의 언어가 된다. 가정에서도 이어져야 한다. 한 식탁에 둘러앉은 가족이 같은 노래를 부를 때, 말로 다 건네지 못한 마음이 음정 사이에서 서로에게 닿는다.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면 어디든 음악도 함께 살아야 한다.

이 믿음은 단순히 공연 장소를 넓히자는 제안이 아니다. 예술을 바라보는 태도 자체를 바꾸는 철학이다. 음악을 잘하는 사람만 무대에 서고, 나머지는 박수를 보내는 구경꾼으로 남는 구조를 넘어서는 일이다. 누구나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으며, 서툰 음정조차 한 사람의 삶을 증언하는 귀한 소리가 될 수 있다는 선언이다.

이은경 회장이 말하는 생활음악은 예술의 문턱을 낮추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그 문턱 자체를 없애는 일에 가깝다.

예술은 선택받은 소수에게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누려야 할 감정의 공기이며, 공동체가 함께 나누어야 할 정신의 양식이다. 전문가의 완성도와 기량은 존중받아야 한다. 다만 전문성이 예술의 문을 잠그는 자물쇠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의 음악 활동은 잘 부르는 사람을 선별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고, 노래하고 싶은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데 중심을 둔다.

이러한 철학은 예술의 민주성을 회복하는 작업이다.

미술관과 공연장, 전문 교육기관 안에 갇혀 있던 예술을 시민의 일상으로 돌려놓고, 감상의 권리만이 아니라 표현의 권리까지 되찾아 주는 일이다. 누군가는 노래를 배우며 자신감을 얻고, 누군가는 함께 손뼉 치며 이웃과 가까워지며, 또 다른 누군가는 평생 처음 받아 보는 박수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귀하다는 감각을 회복한다.

그의 활동을 단순한 음악교육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음악교육이 음정과 박자, 발성과 호흡을 익히는 과정이라면, 이은경의 생활음악은 사람을 관계 속으로 다시 불러들이는 운동이다. 개인의 목소리를 공동체의 화음으로 이어 주고, 고립된 일상을 만남의 자리로 바꾸며, 삶의 주변부에 있던 사람을 문화의 중심으로 초대한다.

그에게 생활음악은 취미가 아니다.

사람의 하루를 환하게 하고, 공동체의 체온을 높이며, 예술이 본래 누구의 것이었는지를 되돌려 주는 삶의 철학이다. 그의 요들이 극장을 나와 시장과 복지관, 학교와 가정으로 흘러가는 순간, 음악은 비로소 사람 곁에 사는 예술이 된다.

Ⅵ. 맺음말

― 메아리는 산이 아니라 사람에게 남는다

메아리는 산에서 시작되지만, 끝내 사람의 가슴에 머문다.

산은 소리를 잠시 받아 되돌려 줄 뿐이다. 그 소리를 기억하고 오래 품는 곳은 사람의 마음이다. 어느 날 들었던 한 곡의 노래가 지친 생애의 굽이를 함께 건너고, 짧은 박수 한 번이 잊고 있던 자존을 다시 일으키며, 누군가와 나눈 화음이 외로운 날의 등불로 남기도 한다.

이은경 회장의 요들도 그러하다.

그의 노래는 높은 음을 오래 붙잡아 자신의 기량을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능선을 넘어간 소리를 다시 사람의 자리로 내려보낸다. 그 음결이 닿는 곳마다 굳은 표정에는 웃음이 번지고, 낮게 움츠러든 어깨에는 작은 힘이 돌아오며, 말없이 떨어져 있던 사람들은 하나의 리듬 안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가 남기는 것은 찰나의 감탄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희망이라는 긴 여운을 심는 일이다. 노래를 부르는 동안만 즐거운 음악이 아니라, 노래가 멎은 뒤에도 삶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게 하는 음악이다. 자신에게도 목소리가 있다는 감각,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다는 안도, 세상의 한편에 자신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는 믿음이 그의 요들을 따라 사람 안에 뿌리를 내린다.

좋은 음악은 귀를 즐겁게 한다.

위대한 음악은 삶의 방향을 바꾼다.

이은경 회장이 걸어온 길은 화려한 조명과 수많은 박수로만 기록될 무대의 역사가 아니다. 경제적 형편으로 예술에서 멀어졌던 사람에게 노래의 문을 열어 준 시간, 외로움에 갇힌 이의 얼굴에 웃음을 되돌려 준 시간, 평생 객석에만 머물던 사람을 무대의 주인공으로 세운 시간들의 역사이다.

그가 쌓아 온 가장 높은 무대는 공연장의 단상이 아니다. 한 사람의 자존이 다시 일어선 자리이며, 서로 낯설었던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연결된 공동체의 자리이다. 그 위에서는 능숙한 사람과 서툰 사람이 나뉘지 않는다. 떨리는 목소리도, 늦은 박자도, 수줍은 몸짓도 저마다의 생애를 품은 귀한 예술로 존중받는다.

이은경의 요들은 알프스를 닮았다.

맑은 눈과 드넓은 초원, 산허리를 건너는 바람과 골짜기에 길게 남는 메아리를 품고 있다. 다만 그의 음악이 향하는 곳은 자연의 높은 봉우리보다 더 깊고 먼 자리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세워진 두려움의 산, 외로움의 절벽, 상처의 골짜기를 넘어 한 영혼의 가장 순한 곳에 닿는다.

산의 정상보다 사람의 마음을 먼저 오르는 노래.

높이를 겨루기보다 거리를 좁히고, 자신을 빛내기보다 타인을 일으키며, 음악을 소유하기보다 삶 속에 나누는 예술. 여기에 이은경 요들 음악의 독창적 가치가 놓여 있다.

그의 예술은 특정한 발성법만으로 모방할 수 없다. 사람을 귀히 여기는 마음, 예술의 문턱을 낮추는 실천, 낮은 자리에 먼저 손을 내미는 삶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그 맑은 울림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은경의 요들은 노래이면서 삶이며, 음악이면서 사람을 향한 오래된 약속이다.

그 약속이 한 사람의 가슴에서 또 다른 사람의 가슴으로 건너가는 동안, 메아리는 더 이상 산의 것이 아니다. 사람을 살리고, 공동체를 잇고, 세상의 체온을 높이는 아름다운 예술정신으로 오래 남는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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