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등 ㅡ청람 김왕식
할머니의 등 202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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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등
청람 김왕식
배추 몇 포기
고추 한 바구니
깻잎 몇 단 앞에
저녁보다 먼저
굽은 등이 있다
새벽 찬 바닥
자식들 밥그릇
손주의 약봉지
말하지 않은 것들이
척추마다
한 칸씩 눌러앉았다
“오천 원에 두 단.”
목소리는 웃는데
등은 오래
펴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값을 묻고
봉지를 들고
저마다 돌아선다
아무도
그 등에 붙은
세월의 가격표는 읽지 못한다
해 질 무렵
팔리지 않은 무 한 개를
수레 밑에 넣는 손
오늘도
제 몫보다
가족의 저녁을 먼저 챙긴다
그림자가 길어진다
할머니의 등도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접혀 간다
사람이 늙는다는 것은
어쩌면
평생 사랑한 것들의 무게가
몸 밖으로
드러나는 일
골목 끝
굽은 등 하나가
남은 햇빛을 지고 간다
사랑은
말보다 먼저 늙고
끝내
등으로 남는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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