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문학이 아프다 ― 말이 넘치는 시대, 문장이 제 몸의 체온을 잃어가는 까닭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문학이 아프다 ― 말이 넘치는 시대, 문장이 제 몸의 체온을 잃어가는 까닭 2026.08.14
문학이 아프다 ― 말이 넘치는 시대, 문장이 제 몸의 체온을 잃어가는 까닭

문학이 아프다

― 말이 넘치는 시대, 문장이 제 몸의 체온을 잃어가는 까닭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문학이 아프다.

어디가 아픈지 손가락으로 짚어내기는 어렵다.

피가 흐르는 상처도 없고, 체온계에 잡히는 열도 없다. 겉으로만 보면 어느 시대보다 풍성하다. 하루에도 셀 수 없는 시가 태어나고, 수많은 소설과 수필이 책의 옷을 입는다. 문학상은 늘어나고 문학단체의 이름도 많아졌다. 인터넷의 작은 창을 열기만 해도 문장은 폭포처럼 쏟아진다.

그런데

이상하다.

말은 이토록 많은데 오래 가슴에 남는 문장은 드물다.

책은 넘쳐나는데 한 권을 덮고 며칠 동안 잠들지 못하는 밤은 줄어든다. 시인은 많아졌는데 시 앞에서 오래 침묵하게 되는 순간은 귀해졌다.

풍요의 얼굴을 하고 찾아온

빈곤이다.

문학의 병은 어쩌면 쓰는 사람의 수가 늘어난 데 있지 않다. 문장을 대하는 경외가 옅어진 데 있을 것이다.

한 줄을 쓰기 위해 한밤을 건너던 시간이 있었다.

단어 하나를 원고지에 올려놓았다가 다시 지우고, 버려진 한 글자를 새벽녘 휴지통에서 되찾아오던 시간이 있었다. 문장은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물건이 아니라 한 인간이 살아온 시간의 압력 끝에 맺히는 결정이었다.

지금은 문장이 너무 빨리 태어난다.

생각보다 문장이 앞서 달리고, 삶보다 표현이 먼저 도착한다. 고통을 충분히 통과하지 않은 언어가 고통을 말하고, 사랑의 무게를 견디지 않은 문장이 사랑을 노래한다. 상처 곁에 오래 앉아본 적 없는 말이 상처의 깊이를 설명한다.

그렇게 문장은 매끄러워졌으나 체온을 잃는다.

문학은 본래 삶의 가장 느린 기관이다.

세상이 한 방향으로 달려갈 때 잠시 발을 멈추어 길가에 쓰러진 사람을 바라보는 눈이며, 모두가 높은 곳을 올려다볼 때 낮은 곳에서 떨고 있는 한 생명의 손등을 살피는 마음이다.

신문이 오늘을 기록한다면 문학은 오늘 속에 숨어 있는 영원을 기록한다.

역사가 승자의 이름을 남길 때 문학은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사람의 저녁밥 냄새를 적는다. 통계가 실업자 만 명을 기록할 때 소설은 그 만 명 가운데 한 사람이 빈 도시락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을 따라간다. 사회가 노인을 숫자로 부를 때 시는 폐지를 가득 실은 손수레를 끄는 늙은 등의 굽은 각도를 바라본다.

문학이 필요한 까닭이 거기에 있다.

세상이 보지 않는 것을 오래 바라보는 일.

그런데 어느 때부터 문학마저 세상의 속도를 닮기 시작했다.

박수를 기다리고, 이름을 기다리고, 상을 기다리고, 등단을 기다리고, 사람들의 반응을 기다린다. 작품보다 작가가 앞에 서고, 문장보다 이력이 먼저 소개된다. 문학의 마당에도 보이지 않는 명찰과 의자가 생겼다.

누가 높은 자리에 앉았는가.

누가 심사하는가.

누가 상을 받았는가.

정작 시 한 편이 사람의 심장 어디까지 내려갔는가는 뒤로 밀린다.

문학의 가장 깊은 병소는 이 지점에 있을지도 모른다.

문학이 사람보다 문학인을 바라보기 시작한 순간.

좋은 문학은 자기 이름을 크게 쓰지 않는다.

한 편의 시가 독자의 가슴에 들어가는 순간 시인의 이름은 뒤로 물러난다. 소설 속 한 인물이 독자의 오래된 상처 곁에 앉는 순간 작가는 문밖으로 나온다.

명작에는 이상한 소멸의 미학이 있다.

작가가 사라지고 작품이 남는다.

작품마저 사라지고 어느 문장 하나가 사람의 생애 속에 남는다.

그 문장이 어느 겨울 한 사람을 살게 한다면 문학은 제 할 일을 다한 셈이다.

문학에는 또 하나의 오래된 병이 있다.

고통을 장식하는 병이다.

가난을 아름다운 소재로 만들고, 죽음을 수사로 치장하며, 타인의 비극을 한 편의 감동으로 소비한다. 눈물을 쓰는 일이 눈물을 흘리는 일보다 쉬워질 때 문학은 위험해진다.

진짜 슬픔 앞에서는 문장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상가의 빈 의자 하나를 오래 바라본 사람은 죽음을 함부로 말하지 못한다. 병실의 새벽을 지켜본 사람은 생명을 화려한 수식어로 꾸미지 않는다. 굶어본 사람에게 밥은 은유가 아니라 밥이다.

문학의 품격은 얼마나 아름답게 쓰느냐에만 있지 않다.

얼마나 함부로 쓰지 않느냐에도 있다.

침묵해야 할 자리에서 침묵할 줄 아는 문장.

한 인간의 아픔 앞에서 제 수사를 내려놓을 줄 아는 문장.

그것이 문학의 윤리다.

인공지능의 시대가 문 앞에 와 있다.

몇 초면 시가 만들어지고 소설의 줄거리가 완성되며 수천 자의 산문이 화면을 채운다. 이제 인간은 역사상 처음으로 ‘문장을 만드는 능력’만으로 문학의 주인을 자처하기 어려운 시대를 맞았다.

역설적이게도 이때 문학의 본질은 더욱 선명해진다.

문학의 미래는 누가 더 많은 문장을 생산하는가에 있지 않다.

누가 더 깊게 살아냈는가.

누가 한 사람의 슬픔 곁에 더 오래 머물렀는가.

누가 자기 욕망을 덜어내고 타인의 생을 바라볼 수 있었는가.

문학의 마지막 재료는 언어가 아니라 인간이다.

기술은 문장을 만들 수 있다.

삶은 문장에 무게를 준다.

그 둘 사이에는 쉽게 측정할 수 없는 심연이 놓여 있다.

어머니의 굽은 손가락을 수십 년 바라본 사람이 쓰는 ‘손’과 사전에서 찾은 ‘손’은 같은 글자로 적히지만 같은 단어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 숨을 지켜본 사람이 쓰는 ‘숨’과 수사적으로 선택된 ‘숨’ 역시 같은 글자가 아니다.

문학은 그 보이지 않는 차이 위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문학을 살리는 일은 거창하지 않다.

다시 사람에게 돌아가면 된다.

시장 좌판 뒤에서 천 원어치 채소를 다듬는 할머니에게, 새벽 첫 전철에서 졸고 있는 청년에게, 병원 복도 끝 의자에서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하루 종일 아무에게도 이름을 불리지 못한 노인에게 돌아가면 된다.

문학의 고향은 언제나 사람의 곁이었다.

문학인은 세상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세상이 너무 빨리 지나쳐버린 한 사람 곁에서 조금 더 오래 머무는 사람일 수 있다.

그 작은 머묾이 문장을 만든다.

그 문장이 누군가의 가슴에 닿아

‘세상에 내 마음을 알아보는 말 하나쯤은 있었구나’

하는 작은 안도를 남긴다면,

문학은 아직 죽지 않았다.

지금 문학이 아픈 것은 어쩌면 문학이 살아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죽은 것은 아프지 않다.

상처를 느끼고, 부끄러움을 느끼고, 제 모습을 돌아보며 앓는 것만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문학의 병상 곁에 거대한 처방전은 필요하지 않다.

먼저 문장 하나를 내려놓아야 한다.

화려한 수사를 하나 덜고,

자기의 이름을 한 걸음 뒤로 물리고,

세상의 가장 작은 숨소리에 귀를 가까이 대는 일.

그곳에서 문학은 다시 시작될 것이다.

새벽이 오기 직전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 버린 한 단어를 주워

먼지를 털고

가슴의 온기를 조금 나누어주는 일.

문학은 그렇게 다시 사람에게 돌아올 것이다.

아픈 문학의 이마 위에

차가운 손수건 한 장 올려놓듯,

한 줄의 진실한 문장이.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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