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물 위의 꽃과 물 아래의 꽃 사이 ― 김미형 시인 디카시 「불이不二에서 핀 꽃」 에 깃든 불이의 미학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물 위의 꽃과 물 아래의 꽃 사이 ― 김미형 시인 디카시 「불이不二에서 핀 꽃」 에 깃든 불이의 미학 2026.08.15
물 위의 꽃과 물 아래의 꽃 사이 ― 김미형 시인 디카시 「불이不二에서 핀 꽃」 에 깃든 불이의 미학

불이不二에서 핀 꽃

시인 김미형

물 위에 모습이나

물속에 비친 모습이나

불이에서 태어나

불이로 돌아간다

물 위의 꽃과 물 아래의 꽃 사이

― 김미형 시인 디카시 「불이不二에서 핀 꽃」 에 깃든 불이의 미학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절집의 문은 사람을 안으로 들이는 것 같지만, 오래 드나든 사람에게는 마음속 경계를 밖으로 밀어내는 문이 된다.

김미형 시인에게 불이문不二門은 그런 문이었을 것이다.

한쪽에는 옳음이 서 있고

다른 한쪽에는 그름이 서 있던 날들, 사랑과 미움이 서로 등을 맞대고 있던 날들,

자신의 허물이 거대한 물벽이 되어 가슴을 덮쳐오던 날들.

그때마다 김미형 시인은 마음의 신발을 벗고 그 문턱을 넘었을 것이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자꾸만 낮아지기 위해서였다.

목소리를 낮추고, 숨을 낮추고, 마침내 자신과 타인을 가르던 마음의 칼날까지 내려놓는 자리.

그 오랜 수행의 시간이 한 송이 꽃을 만났다.

“물 위에 모습이나

물속에 비친 모습이나

불이에서 태어나

불이로 돌아간다”

네 행이다.

너무 짧아 손바닥 위에 다 들어오는 시다.

그런데 그 손바닥을 오래 들여다보면 그 안에 강 하나가 흐르고, 산문 하나가 열리고, 한 생애의 수행이 물결처럼 번져 나온다.

짧은 시는 말이 적은 시가 아니다.

버린 말이 많은 시다.

김미형 시인의 이 작품 뒤에는 쓰이지 않은 수십 문장이 서 있다. 불심을 설명하려던 말, 깨달음을 풀이하려던 말, 자신의 상처를 고백하려던 말, 세상을 향해 무언가를 가르치려던 말들이 모두 한쪽으로 물러나 있다.

남은 것은 꽃과 물과 그림자와 불이뿐이다.

언어가 제 살을 깎아 뼈에 이르면 시는 비로소 맑아진다.

김미형 시인의 디카시는 그 뼈의 언어에 가깝다.

첫 두 행의 풍경은 단순하다.

물 위에 꽃이 있고, 물속에도 꽃이 있다.

세속의 눈은 곧바로 둘을 나눈다.

위의 꽃은 진짜이고 아래의 꽃은 그림자라고.

하나는 실재이고 하나는 허상이라고.

사람의 마음은 이렇게 무엇이든 쪼개어 이름 붙이는 데 익숙하다. 선과 악, 나와 너, 삶과 죽음, 성공과 실패, 성스러움과 속됨.

그런데 불이는 그 칼끝을 거둔다.

불이不二는 둘을 지워 하나로 만드는 사상이 아니다. 서로 다른 것을 억지로 섞어버리는 것도 아니다.

꽃은 꽃이고 그림자는 그림자다.

물 위와 물 아래 역시 다르다.

다만 그 차이를 절대적인 벽으로 만들지 않는다.

물속의 꽃은 물 위의 꽃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물 위의 꽃 또한 물이라는 인연 없이는 자신의 또 다른 얼굴을 얻을 수 없다.

하나는 다른 하나를 통해 비로소 모습을 완성한다.

그러므로 둘은 서로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안에 스며 있다.

이것이 불이의 깊이다.

김미형 시인의 「시인의 말」 을 함께 읽으면 이 네 행은 더욱 먼 곳까지 울린다.

김미형 시인은 자신의 허물이 쓰나미처럼 밀려와 숨조차 쉬기 어려웠던 때를 고백한다.

그 장면이 중요하다.

불심은 자신의 깨끗함을 증명하는 데서 깊어지지 않는다.

자기 안의 진흙을 외면하지 않을 때 깊어진다.

사람은 남의 허물 앞에서는 횃불을 들기 쉽지만 자신의 허물 앞에서는 불을 끄고 싶어진다.

김미형 시인은 그 어둠을 피해 달아나지 않았다.

숨소리를 낮추었다.

이 짧은 행위 속에 수행의 자세가 있다.

숨을 낮춘다는 것은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서 조금 비켜 세우는 일이다.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던 목소리도 낮추고, 타인을 판단하던 눈높이도 낮추고, 자신이 받은 상처만 헤아리던 마음도 낮추는 일이다.

낮아진 자리에서 비로소 타인의 상처가 보인다.

그때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위로받고 위로해 줄 수 있는 또 다른 내 모습”이라는 고백이 나온다.

이 문장은 김미형 시인의 불이사상을 가장 따뜻하게 보여준다.

불이는 차가운 철학이 아니다.

끝까지 밀고 가면 자비가 된다.

너와 내가 완전히 둘이라면 네 눈물은 네 것이고 내 아픔은 내 것이다.

그런데 경계가 조금씩 녹기 시작하면 타인의 고통이 낯선 풍경으로만 남지 않는다.

그의 눈물이 내 마음의 어느 오래된 우물과 이어지고, 내가 건네는 손길도 언젠가 내가 받았던 손길의 다른 모습이 된다.

위로하는 사람과 위로받는 사람의 자리가 바뀌고,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경계도 흐려진다.

강은 어느 물방울이 먼저였는지 기억하지 않는다.

김미형 시인의 불이는 바로 그런 강의 마음에 가깝다.

김미형 시인에게 스승과 가까운 인연, 가족에 대한 감사가 각별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수행이란 홀로 산 정상에 올라 자신의 깃발을 꽂는 일이 아니다.

외려 자신이 혼자 서 있지 않았음을 알아가는 과정에 가깝다.

한 사람의 오늘에는 수많은 사람의 손길이 들어 있다.

스승의 말씀 한 자락, 가까운 이의 위로, 가족의 묵묵한 품, 지나가는 사람의 미소 하나까지도 한 생의 결을 만든다.

‘나’라는 그릇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의 체온으로 빚어진다.

불이는 그 사실 앞에서 자아의 벽을 낮춘다.

이제 마지막 두 행을 보게 된다.

“불이에서 태어나

불이로 돌아간다”

여기서 시는 꽃의 풍경을 벗어나 생명의 깊은 강으로 들어간다.

태어남과 돌아감.

사람은 그것을 시작과 끝이라 부른다.

한쪽 문에는 탄생이라 쓰고 다른 문에는 죽음이라 쓴다.

그러나 자연은 그렇게 나누지 않는다.

꽃이 지면 흙이 되고, 흙은 다시 뿌리를 품는다.

구름이 사라지면 비가 되고, 비는 강이 되어 바다로 간다.

사라짐은 어디론가 없어지는 일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건너가는 일일 때가 많다.

김미형 시인이 ‘죽음’ 대신 ‘돌아감’을 놓은 데에는 이런 불교적 호흡이 배어 있다.

돌아감에는 원래의 자리로 스미는 느낌이 있다.

잠시 꽃의 형상을 빌렸던 생명이 다시 더 큰 인연의 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에

물 위의 꽃과 물속의 꽃은 생과 사의 얼굴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나는 피어 있는 현재이고, 다른 하나는 돌아갈 자리의 그림자다.

그런데 둘은 이미 한 물 안에 있다.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의 자리에도 다시 생명의 인연이 숨어 있다.

불이不二는 그 둘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 아니다.

애초부터 강의 양쪽이 하나의 물로 이어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미형 시인은 그 오래된 물의 결을 네 줄에 담았다.

그것도 설명하지 않은 채.

이 절제가 아름답다.

불이를 말하면서 불이를 해설하지 않고, 수행을 말하면서 수행자의 얼굴을 내세우지 않는다.

도를 얻었다는 말도 없고, 무엇을 깨쳤다는 선언도 없다.

한 송이 꽃을 물 위에 놓아두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 꽃이 대신 말한다.

많이 말하지 않는 것이 때로는 가장 깊이 말하는 방식임을.

김미형 시인의 시는 디카시라는 짧은 형식을 빌렸지만 그 안에는 오랜 세월 절집 문턱을 닳게 한 발자국이 있다.

불이문을 지나며 버린 분별의 먼지,

자기 허물 앞에서 낮춘 숨,

스승과 인연에게 받은 등불,

가족의 품 안에서 삭인 감사,

그 모든 것이 물속의 그림자처럼 네 행 아래 잠겨 있다.

독자는 처음에는 꽃을 본다.

조금 뒤에는 물을 본다.

더 오래 머물면 자기 얼굴을 보게 된다.

시가 좋은 까닭은 여기 있다.

꽃을 보게 하다가 결국 자신을 보게 하는 것.

자신을 바라보다 타인을 만나게 하는 것.

타인에게 건너갔다가 마침내 나와 너를 가르던 경계가 처음부터 얼마나 얇은 것이었는지 느끼게 하는 것.

김미형 시인의 「불이不二에서 핀 꽃」 은 그런 시다.

아리수의 푸른 물빛 위로 꽃 한 송이가 떠 있다.

바람이 지나가면 수면이 흔들리고, 물속의 꽃도 함께 흔들린다.

어느 쪽이 먼저 흔들렸는지 따질 수 없다.

꽃과 그림자는 서로의 떨림을 나누고 있다.

어쩌면 사람의 인연도 그와 같다.

한 사람의 슬픔이 다른 사람의 가슴에 파문을 만들고, 한 사람의 따뜻한 말이 멀리 있는 사람의 하루를 일으켜 세운다.

우리는 서로에게 비친 또 하나의 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바라볼 수 있을 때 불이는 경전 밖으로 걸어 나온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체온이 된다.

김미형 시인의 시가 가진 가장 깊은 아름다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불교를 시 속에 가져다놓은 것이 아니라, 오래 닦아온 불심이 사물을 바라보는 눈 자체가 되어버린 것.

그 눈으로 꽃을 바라보니 꽃이 경전이 되고,

물을 바라보니 물이 법문이 되며,

그림자를 바라보니 나와 타인의 경계가 한 겹 벗겨진다.

수십 마디를 깎고 또 깎은 자리.

마침내 말마저 투명해진 자리.

거기에 꽃 하나가 남았다.

물 위에도 있고

물 아래에도 있으나

어느 한쪽만을 진짜라 부를 수 없는 꽃.

김미형 시인의 「불이不二에서 핀 꽃」 은 바로 그 한 송이로, 오래 닦아온 불심의 깊이를 보여준다.

시가 수행을 닮고

수행이 다시 시가 된 자리.

그곳에서 불이는 더 이상 철학의 말이 아니다.

한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빛이 되고,

타인을 품는 마음이 되고,

마침내 자신마저 가볍게 내려놓는 한 송이 꽃이 된다.

■□

김미형 시인께

깊은 물은 제 깊이를 소리 내어 알리지 않습니다.

산도 제 높이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래 불심을 닦아온 사람의 문장도 그러하리라 생각합니다. 많이 말하기보다 덜어내고,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한 송이 꽃과 한 줄의 물빛 뒤로 물러섭니다.

시인님의 시를 읽으며 자주 그런 깊이를 만납니다.

그 깊이는 지식을 오래 쌓아 생긴 높이라기보다, 자신 안의 수많은 분별을 하나씩 내려놓으며 얻어진 침잠의 깊이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절집의 불이문을 오래 드나들며 만났을 수많은 계절이 있었을 것입니다.

좋은 날만 있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마음의 벽이 무너지는 날도 있었을 것이고, 자신의 허물이 파도처럼 밀려와 가슴 한복판을 뒤흔든 시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시인님께서는 세상을 탓하는 쪽보다 자신의 숨을 낮추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셨습니다.

그 낮은 걸음이 참으로 귀합니다.

불심은 높은 곳에 올라 세상을 내려다보는 일이 아니라, 한없이 낮은 자리에서 사람과 사물을 다시 바라보는 마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꽃을 보되 꽃만 보지 않고,

물을 보되 물만 보지 않으며,

물속에 비친 그림자에서 또 하나의 생을 바라보는 눈.

그 눈이 오랜 수행 끝에 얻어진 시인의 눈이라 생각됩니다.

시인님의 「불이不二에서 핀 꽃」 ,

네 행을 읽으며 더욱 그러했습니다.

짧은 시 한 편인데 그 안에 참 많은 침묵이 들어 있습니다.

말하지 않은 말들이 시의 뒤편에서 오래 합장하고 있습니다.

수십 마디를 버리고 또 버린 끝에 꽃 하나와 물 하나만 남긴 절제, 그 절제가 시를 더욱 깊게 합니다.

시는 때로 말을 더하는 일이 아니라, 말이 스스로 물러날 때까지 기다리는 예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김미형 시인님의 언어에는 그러한 기다림이 있습니다.

특히 시인님의 불이는 관념으로 머물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깊습니다.

둘이 아니라고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타인의 아픔과 자신의 아픔 사이에 세워졌던 담장을 낮춥니다. 위로받는 사람과 위로하는 사람을 따로 나누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눈물이 다른 사람의 가슴에 젖어 들고, 한 사람의 따뜻한 손길이 다시 다른 사람의 삶으로 돌아오는 자리.

그곳에서 불이는 철학이 아니라 자비가 됩니다.

그 점에서 시인님의 시세계는 불교적 사유와 인간적 체온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도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사람이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가까워지고, 수행이 깊어질수록 자신을 높이는 대신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는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오랜 수행이 한 인간에게 남겨주는 가장 아름다운 향기 아닐까 생각합니다.

향은 자신의 향기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가까이 온 사람의 옷깃에 오래 머뭅니다.

김미형 시인님의 시도 그런 향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화려한 언어로 독자를 압도하지 않습니다.

큰 목소리로 무엇을 가르치려 하지도 않습니다.

꽃 한 송이를 내어놓고,

물빛 한 자락을 내어놓고,

그 앞에서 독자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것이 시인의 품격입니다.

도를 말하지 않으면서 도의 그림자를 보여주고, 불심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한 문장 안에 자비를 머물게 하는 것.

그러한 문장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삶의 모서리에 여러 번 몸을 부딪치고, 자신의 허물을 여러 번 마주하고, 미움보다 용서를 택해야 했던 숱한 밤을 지나온 사람의 언어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결이 있습니다.

김미형 시인님의 시에는 바로 그 세월의 결이 배어 있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시인님의 시는 점점 더 짧아질지 모르겠습니다.

짧아지는 만큼 더욱 깊어지고, 덜 말하는 만큼 더 먼 곳까지 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침내 한 글자조차 필요 없는 자리에 가까워질 때, 시인은 꽃 한 송이만 놓아두고 물러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독자는 그 꽃 앞에서 저마다 자기 생의 불이문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김미형 시인님.

도의 깊이는 얼마나 멀리 갔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것을 내려놓았느냐로 헤아릴 수 있을 듯합니다.

그 오랜 침잠의 시간 끝에서 얻으신 맑은 시심이 앞으로도 사람들의 마음 한구석에 작은 등불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픔을 만난 사람에게는 위로가 되고,

분별에 지친 사람에게는 쉼이 되며,

자신의 마음을 잃은 사람에게는 다시 안으로 돌아가는 작은 문이 되기를 바랍니다.

불이문을 오래 드나든 한 시인의 발자국이 이제는 한 편 한 편의 시가 되어 다른 사람의 마음에 길을 내고 있습니다.

그 길이 높지 않아 더욱 귀하고,

말이 적어 더욱 깊으며,

자신을 앞세우지 않아 더욱 오래 남습니다.

김미형 시인님의 불심과 시심 앞에 깊은 경의를 올립니다.

꽃이 물에 제 얼굴을 맡기듯,

시인님의 언어 또한 세상의 수많은 마음 위에 오래 비치기를 바랍니다.

그 물결이 다한 자리에서

시와 수행이 서로 이름을 버리고

마침내 하나의 맑은 마음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2026, 8, 14

청람 김왕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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