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지각 있는 문인 ― 붓끝보다 먼저 사람을 닦는 일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지각 있는 문인 ― 붓끝보다 먼저 사람을 닦는 일 2026.08.16
지각 있는 문인 ― 붓끝보다 먼저 사람을 닦는 일

지각 있는 문인

― 붓끝보다 먼저 사람을 닦는 일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붓에도 그림자가 있다.

사람이 붓을 들면 종이 위에 글자만 내려앉는 것이 아니다. 살아온 세월이며 사람을 대하는 태도, 욕망의 무게와 마음의 결까지 함께 번진다. 아무리 아름다운 문장을 골라 놓아도 그 뒤에 선 사람의 마음이 거칠면 글에서는 어딘가 모르게 모서리가 드러난다.

문학은 재주만으로 오래 갈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지각 있는 문인은 자신을 높이기 위해 붓을 세우지 않는다.

자기의 이름을 크게 쓰기 위하여 남의 이름을 작게 만들지 않으며, 자신의 작품 한 편을 돋보이게 하려고 다른 사람의 작품을 그늘 속으로 밀어 넣지도 않는다. 문학이 자기 과시의 단상이 되는 순간, 붓은 날개가 아니라 칼이 된다.

글을 조금 썼다고 세상을 다 읽은 듯 말하고, 책 몇 권 냈다고 문학의 높낮이를 재려 들며, 자신보다 늦게 등단한 사람을 아래에 세우는 태도에는 문학의 향기가 오래 머물기 어렵다.

큰 나무일수록 제 그늘의 넓이를 자랑하지 않는다.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몇 사람이나 쉬게 했는지 셈하지 않듯, 참된 문인 또한 자신이 이룬 일을 장부처럼 펼쳐 보이지 않는다.

덕이 있다는 말은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공을 세웠다는 말 또한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그 무게가 가벼워진다. 덕은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곁에 있는 사람이 먼저 느끼는 것이며, 공은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뒤늦게 기록하는 것이다.

문학의 품격도 마찬가지다.

좋은 글을 썼다고 스스로 말할 필요가 없다. 글이 사람에게 가 닿으면 독자가 먼저 알아본다. 한 줄이 누군가의 상처 곁에 오래 앉아 있고, 한 편의 시가 절망 속의 사람에게 작은 숨구멍 하나 열어 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문인은 박수를 세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숨을 살피는 사람이어야 한다.

깊은 문인은 자기 작품 앞에서 자주 몸을 낮춘다.

수십 년 붓을 잡아도 한 문장이 어렵고, 시집 여러 권을 내고도 아직 쓰지 못한 시가 더 많다고 여긴다. 그것은 자신을 비하하는 겸양이 아니다. 언어라는 거대한 산 앞에서 인간의 재주가 얼마나 작은가를 몸으로 겪어 온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배어드는 태도다.

문학의 산을 조금 오른 사람은 정상에 닿았다고 외치기 쉽다.

오래 오른 사람은 산 너머에 더 높은 산이 겹겹이 서 있음을 바라본다.

그때부터 자랑은 줄고 침묵은 깊어진다.

남의 글을 함부로 폄하하지 않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한 편의 시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시인의 내부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밤이 지나간다. 몇 번이나 지우고 다시 썼는지, 어떤 상처를 눌러 한 단어를 세웠는지, 어느 사람을 떠나보낸 뒤 겨우 한 행을 얻었는지 밖에서는 헤아리기 어렵다.

그 사정을 알 수 없는 사람이 몇 줄 읽고 가볍게 재단한다면 그것은 비평이 아니라 오만에 가깝다.

물론 문학에는 비평이 필요하다.

잘된 것은 잘되었다 하고 부족한 것은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다만 작품을 비평하는 일과 사람을 깎아내리는 일은 전혀 다르다. 좋은 비평은 작품의 허점을 찾아 망신을 주는 행위가 아니라, 작품 안에 아직 열리지 않은 문 하나를 함께 찾아주는 일이다.

비평가의 펜에도 체온이 필요한 까닭이다.

문학은 승부가 아니다.

누가 시집을 더 많이 냈는가, 누가 상을 더 많이 받았는가, 누가 더 유명한가를 겨루기 시작하면 문학은 어느새 운동장의 순위표가 된다.

한 권을 낸 시인이 열 권을 낸 시인보다 낮다고 말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평생 단 한 권을 남겼더라도 그 한 권에 자신의 생을 온전히 태웠다면 그 무게는 권수로 잴 수 없다. 반대로 수십 권을 냈다 해도 그것이 다른 사람을 내려다볼 자격증이 될 수는 없다.

책의 숫자가 인격의 높이를 증명하지 않는다.

등단 연도가 사람의 깊이를 결정하지 않는다.

문학상 또한 인간의 품격까지 보증하지 않는다.

남는 것은 사람이 어떻게 글을 썼으며, 그 글을 쓰는 동안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했는가이다.

문학의 마지막 심사위원은 세월이다.

세월은 화려한 약력을 한 장씩 걷어내고 작품만 남긴다. 이름 앞에 붙었던 직함도 사라지고, 수상 경력도 희미해진 뒤 몇 줄의 문장만 독자 앞에 다시 놓인다.

그때 글 속에 사람이 보인다.

따뜻했는지,

교만했는지,

세상을 품었는지,

자기 자신만 품었는지.

지각 있는 문인은 이 오래된 이치를 삶으로 보여준다.

자신보다 어린 문인의 작품에서도 배울 것을 찾으며, 무명 문인의 한 줄에서도 빛을 발견한다. 자신의 글이 칭찬받으면 공을 글에 돌리고, 비판받으면 한 번 더 원고를 들여다본다.

앞자리보다 곁자리를 귀하게 여기며 문학의 식탁에서 누구도 밀어내지 않는다.

그런 사람 곁에서는 젊은 문인이 위축되지 않는다.

이제 막 첫 시를 쓴 사람도 자신의 문장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것이 문학의 어른이 지닌 품격이다.

좋은 문장은 머리에서만 태어나지 않는다.

오래 낮아진 마음에서 나온다.

타인의 아픔 앞에서 함부로 말하지 않았던 시간, 자신의 성공을 크게 떠들지 않았던 절제, 이름 없는 사람의 작품에도 눈길을 오래 주었던 마음, 자신보다 부족해 보이는 사람의 손을 놓지 않았던 삶이 어느 날 문장이 되어 종이 위로 스민다.

사람의 깊이보다 글이 먼저 깊어지기는 어렵다.

붓끝의 높이는 결국 마음의 높이에서 결정된다.

하여 진정한 문인의 공부에는 끝이 없다.

더 많이 쓰는 공부 이전에 더 넓게 품는 공부가 있고, 더 아름답게 표현하는 공부 이전에 더 아름답게 살아내는 공부가 있다.

문학의 길 끝에서 가장 오래 남는 이름은 가장 큰 목소리를 낸 사람이 아닐 것이다.

누군가의 글을 짓밟지 않고도 자신의 글을 세울 수 있었던 사람,

공을 이루고도 한 걸음 뒤에 설 수 있었던 사람,

평생 붓을 들고도 자신의 문장이 아직 부족하다며 원고지 앞에 다시 몸을 숙였던 사람.

그 사람의 글에는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향기가 밴다.

겸손은 문인의 장식이 아니다.

문장을 깊게 만드는 뿌리다.

붓을 높이 들기 전에 마음을 낮추는 일.

어쩌면 그것이 지각 있는 문인이 평생 써야 할, 가장 어렵고도 아름다운 한 편의 작품일 것이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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