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신새벽 단국대학교 한문학 김상홍 명예교수님께서 보내오신 시경의 《采薇 ㅡ 6장》이다.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신새벽 단국대학교 한문학 김상홍 명예교수님께서 보내오신 시경의 《采薇 ㅡ 6장》이다. 2026.08.16
신새벽 단국대학교 한문학  김상홍 명예교수님께서 보내오신 시경의 《采薇 ㅡ 6장》이다.

신새벽

단국대학교 한문학 김상홍 명예교수님께서

보내오신

시경의 《采薇 ㅡ 6장》이다.

《시경》의 以詩論時

《시경》 3백 5편 중에서 白眉로 평가받는 采薇의 제6 장

昔我往矣

옛적에 내가 군대 갈 때에

楊柳依依

수양버들 휘영청 푸르더니

念我來思

내 돌아올 때 생각해 보니

雨雪霏霏

함박눈이 펄펄펄 내리누나

行道遲遲

가는 길 길고 멀고 멀어서

載渴載飢

목마르고 배까지 굶주리네

我心傷悲

내 마음 또 아프고 슬픈데

莫知我哀

내 슬픔을 아는 자가 없네

시가 시대를 외면할 때 문학은 장식이 된다

― 《시경》 「채미」와 以詩論時의 문학정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눈은 하늘에서 내리지만,

어떤 눈은 사람의 가슴에서 먼저 쌓인다.

《시경》의 「채미采薇」를 읽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전쟁이 아니다. 칼도 없고, 피도 없고, 함성도 없다. 전쟁을 노래하면서도 전쟁터의 참혹한 장면을 앞세우지 않는다.

대신

수양버들이 있다.

떠날 때에는 가지마다 푸른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昔我往矣 楊柳依依

옛적에 내가 떠날 때

수양버들은 푸르게 늘어져 있었네.”

돌아오는 길에는 눈이 내린다.

“今我來思 雨雪霏霏

이제 내가 돌아오는데

눈발은 펄펄 흩날리네.”

이 두 장면 사이에는 몇 줄의 글자로 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누워 있다.

봄에서 겨울까지의 시간이 아니다.

한 인간의 젊음이 전쟁터에서 닳아버린 시간이며, 기다리던 가족의 머리가 희어졌을 시간이고,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수많은 병사가 흙으로 돌아갔을 시간이다.

《시경》은 그 시간을 설명하지 않는다.

버드나무 한 그루와 눈발 몇 점을 세워놓는다.

위대한 시는 이처럼 시대의 고통을 큰 목소리로 외치기보다 작은 사물 하나에 시대 전체를 걸어놓는다.

「채미」의 절창은 바로 여기에서 태어난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사건을 왕이나 장군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역사책이라면 전쟁의 원인과 승패를 기록할 것이다. 어느 나라가 침입했고, 어느 군대가 출정했으며, 어느 장수가 승리했는지를 적을 것이다.

시는 다른 곳으로 간다.

말없이 돌아오는 한 병사의 발밑으로 내려간다.

“行道遲遲.”

길을 걷는 발이 더디다.

그 더딘 걸음 하나가 수천 장의 전쟁 기록보다 무겁다.

배는 고프고 목은 마르다. 고향은 가까워지는 듯하면서도 좀처럼 닿지 않는다. 몸보다 먼저 지친 것은 마음이다.

마지막 두 구절은 더욱 처연하다.

“我心傷悲

莫知我哀

내 마음 아프고 슬픈데

내 슬픔을 아는 이 아무도 없네.”

전쟁의 가장 깊은 상처는 상처 자체에만 있지 않다.

그 아픔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데 있다.

칼에 베인 상처는 약을 바를 수 있으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슬픔은 마음속에서 오래 곪는다.

「채미」가 수천 년을 건너 오늘까지 살아남은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 시는 한 시대의 군역만 말하지 않는다. 국가와 역사라는 거대한 수레 아래에서 이름 없이 몸을 내놓아야 했던 인간의 슬픔을 품는다.

바로 이에

‘以詩論時,’ 곧 시로써 시대를 말하는 문학정신이 모습을 드러낸다.

시로 시대를 논한다는 것은 시를 구호로 만들라는 뜻이 아니다.

문학이 정치적 격문이 되어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말라는 뜻이다.

사람이 울고 있는데 꽃만 노래하지 말라는 뜻이며, 누군가 굶고 있는데 달빛의 아름다움만 탐닉하지 말라는 뜻이며, 부조리 앞에서 언어가 비단옷만 입고 서 있지 말라는 뜻이다.

물론

꽃을 노래할 수 있다.

달을 노래할 수 있다.

사랑을 쓰고 바람을 쓰고 별을 써도 된다.

문제는 그 꽃잎 뒤에 쓰러진 사람이 보이지 않는 문학이다.

좋은 문학은 꽃을 쓰면서도 꽃을 볼 수 없는 사람을 기억한다.

달을 쓰면서도 지하방 창문에는 그 달빛조차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품는다.

사랑을 노래하면서도 전쟁과 가난과 차별 때문에 사랑할 권리마저 빼앗긴 사람의 자리를 남겨둔다.

그것이 문학의 양심이다.

오늘의 문학에도 「채미」는 오래된 거울 하나를 들이민다.

지금 우리의 시는 누구의 눈물을 닦고 있는가.

문학인의 언어는 시대의 어디쯤 서 있는가.

화려한 수사와 난해한 상징 속에서 자기 문장만 숭배하고 있지는 않은가.

문학상과 등단과 시집의 권수와 직함을 세는 동안 정작 문학이 바라보아야 할 사람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문학인은 세상의 가장 높은 곳에서 사람을 내려다보는 존재가 아니다.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가 이름 없는 사람의 신발에 묻은 흙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채미」의 병사는 영웅이 아니다.

왕도 아니고 장수도 아니다.

그저 돌아가는 길에 배고프고 목마른 이름 없는 병사 한 사람이다.

《시경》은 바로 그 사람에게 한 편의 시를 내어주었다.

그것만으로 문학은 이미 정치보다 깊고 역사보다 오래가는 기록이 되었다.

문학의 위엄은 얼마나 어려운 말을 쓰느냐에 있지 않다.

얼마나 높은 자리에 초대받느냐에도 있지 않다.

시대가 외면한 사람의 슬픔 곁에 얼마나 오래 머물 수 있는가에 있다.

시인은 시대의 확성기가 아니라 시대의 청진기여야 한다.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신음을 먼저 듣고,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미세하게 떨리는 맥박을 문장으로 옮겨야 한다.

그때 시 한 편은 종이 위의 활자가 아니라 한 시대의 체온이 된다.

수천 년 전 병사의 발밑에는 진창이 있었을 것이다.

오늘의 사람들 발밑에도 저마다 다른 진창이 있다.

실직의 진창, 가난의 진창, 고독의 진창, 전쟁의 진창, 노년의 진창, 차별과 소외의 진창이 있다.

시가 그 진창을 외면하고 향기로운 말만 골라 담는다면 문학은 장식품에 머물고 만다.

「채미」의 위대함은 버드나무가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그 푸른 가지 뒤에 한 인간의 떠남이 있기 때문이다.

눈발이 아름다워서도 아니다.

그 흰 눈 속으로 지친 한 병사가 돌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의 아름다움은 사람에게 닿을 때 완성된다.

오늘의 문인에게 필요한 것도 그 오래된 정신이다.

붓을 들기 전에 시대의 얼굴을 한번 바라보는 일.

문장을 고르기 전에 사람의 신음을 한번 듣는 일.

자기의 이름을 세우기 전에 이름 없는 사람 하나를 문장 안에 앉혀주는 일.

그것이 『시경』이 수천 년을 건너 오늘의 문학인에게 건네는 가장 오래되고도 새로운 가르침일 것이다.

버드나무는 오래전에 시들었다.

그 병사의 이름도 남아 있지 않다.

왕조도 사라졌다.

전쟁의 먼지 역시 역사 저편으로 가라앉았다.

그런데도 한 사람의 슬픔은 아직 살아 있다.

시가 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문학이다.

한 시대가 버린 사람을

시대가 사라진 뒤에도

끝내 버리지 않는 것.

아마도 그것이

문인이 끝까지 지켜야 할

가장 올곧은 문학정신일 것이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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