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나는 누구인가 ― 이름이 벗겨진 자리에서 한 생을 읽다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나는 누구인가 ― 이름이 벗겨진 자리에서 한 생을 읽다 2026.08.17
나는 누구인가 ― 이름이 벗겨진 자리에서 한 생을 읽다

나는 누구인가

― 이름이 벗겨진 자리에서 한 생을 읽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거울은

얼굴을 돌려주지만

생애까지 돌려주지는 않는다.

아침마다 거울 앞에는 익숙한 한 사람이 서 있다.

눈가에는 지나간 계절이 가느다란 금처럼 번져 있고, 머리카락에는 겨울이 조금씩 내려앉는다. 입술은 아직 말을 만들고 두 눈은 여전히 세상을 바라보지만, 거울 속 사람의 안쪽에는 어느 누구도 끝까지 들어가 보지 못한 방들이 겹겹이 놓여 있다.

그 사람의 이름을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아는 것은 아니다.

이름은 태어난 뒤에 받은 첫 번째 옷이다.

직함은 세상이 잠시 걸쳐준 겉옷이다.

재산은 머물다 떠나는 짐이고, 명예는 사람들의 입에서 잠깐 빛나는 햇살이다.

그 옷을 한 벌씩 벗겨낸 자리에 무엇이 남는가.

나는 누구인가.

이 물음은 인류가 가장 오래 품어온 작은 돌멩이와 같다.

손안에 들어올 만큼 작지만 내려놓으려 하면 이상하게 무겁다. 왕관을 쓴 사람도 이 돌 앞에서는 맨머리가 되고, 경전을 평생 읽은 사람도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는 자기 숨소리 앞으로 돌아온다.

도를 닦은 사람들은 산으로 들어갔다.

종교인은 무릎을 꿇었고,

철학자는 존재의 문을 두드렸다.

선승은 화두 하나를 품고 말의 바깥으로 걸어갔다.

시인은 밤의 원고지 앞에서 자기 안에 있는 낯선 사람과 마주 앉았다.

길은 달랐지만 모두 한 우물가로 모였다.

그 우물의 이름이 ‘나’였다.

문제는 우물이 깊다는 데 있다.

물을 들여다보면 얼굴이 비치지만 손을 넣으면 얼굴은 사라진다. 한 사람의 자아도 이와 비슷하다. 붙잡았다고 여기는 순간 모양을 바꾸고, 설명했다고 여기는 순간 다른 얼굴이 나타난다.

어린 날의 나는 어디에 있는가.

비 오는 날 흙탕물을 밟으며 집으로 뛰어가던 아이.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놓치면 세상이 끝난 줄 알았던 아이.

작은 칭찬 하나로 하루 종일 가슴이 부풀었던 아이.

그 아이는 죽지 않았다.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다가 오래된 냄새 하나, 골목 하나, 노래 한 소절 앞에서 불쑥 문을 열고 나온다.

청년의 나도 그렇다.

세상은 금방 바뀔 것 같았고, 사랑은 영원할 것 같았으며, 한번 정한 길은 끝까지 갈 수 있을 것 같던 시절.

그때의 뜨거움은 어디로 갔는가.

재가 된 듯 보이다가도 어느 날 한 문장 앞에서 다시 불씨가 된다.

사람은 하나의 몸 안에 수많은 시간의 주민을 데리고 산다.

아이였던 나,

사랑했던 나,

버림받았던 나,

잘못했던 나,

용서하지 못했던 나,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었던 나.

한 생애는 한 사람이 살아온 것이 아니라 수많은 ‘나’가 한 이름을 번갈아 빌려 쓴 긴 旅館인지도 모른다.

그 가운데 어느 것이 진짜인가.

강물에게 “어제의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을 수는 없다.

어제의 물은 바다로 갔고 오늘의 물은 다시 흘러온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강을 같은 이름으로 부른다.

인간도 그렇다.

몸은 변하고 생각은 흔들리며 믿었던 것이 무너지고 싫어했던 것을 사랑하게 되기도 한다. 오래 품은 미움이 어느 날 낙엽처럼 가벼워지고, 잊었다고 여긴 사람의 이름이 한밤중 가슴을 두드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 모든 시간을 ‘나’라고 묶는다.

나라는 존재는 고정된 조각상이 아니라 흐르고 있는 강에 더 가깝다.

사람은 평생 ‘내 것’을 늘리는 데 익숙하다.

내 집

내 돈

내 자리

내 작품

내 사람

‘내’라는 한 글자가 세상을 자기 쪽으로 잡아당긴다.

젊은 날에는 그 글자가 클수록 삶이 든든해 보인다.

세월이 깊어질수록 이상한 일이 생긴다.

붙잡았던 것들이 손가락 사이로 하나씩 빠져나간다.

직함은 명함에서 내려오고, 일터의 책상은 다른 사람이 앉는다. 젊음은 사진 속으로 들어가고, 자식은 자기 삶의 문을 열어 떠난다. 집도 재산도 언젠가는 다른 이름으로 옮겨간다.

마지막 문턱에서는 아무것도 손에 들 수 없다.

죽음은 세상에서 가장 무정한 세관원이다.

재산도 통과시키지 않고, 명예도 들고 갈 수 없게 하며, 평생 모아둔 훈장과 직함도 문 밖에 내려놓게 한다.

그 문을 건널 때 남는 것은 무엇인가.

누구를 아프게 했는가.

누구의 아픔을 덜어주었는가.

손해가 올 때 무엇을 지켰는가.

힘없는 사람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었는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어떤 선택을 했는가.

인간의 정체는 명사보다 동사에 숨어 있다.

무엇을 ‘가졌는가’보다 어떻게 ‘살았는가’에 가깝다.

삶은 자기소개서가 아니다.

긴 행동의 필사본이다.

문학을 하는 사람에게 이 질문은 더욱 매섭다.

문학인은 말을 다루는 사람이기에 말 뒤에 숨기가 쉽다.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 수 있다.

사랑을 말할 수 있고 정의를 말할 수 있으며 인간을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문장은 오래 지나면 주인을 닮는다.

나무의 나이테가 숨길 수 없듯 글에도 사람의 결이 남는다.

문장은 작가의 손에서 태어나지만 어느 순간 되돌아서서 작가를 바라본다.

사랑을 썼는데 그 안에서 외로움이 비치고, 분노를 썼는데 깊은 곳에서 두려움이 모습을 드러낸다. 타인의 허물을 적고 있는데 글의 뒤편에서는 자기 상처가 서성거리기도 한다.

문학은 참 이상한 거울이다.

얼굴의 주름은 보여주지 않으면서 영혼의 주름은 숨기지 않는다.

그 때문에 좋은 글을 쓰는 일은 아름다운 말을 고르는 일보다 훨씬 어렵다.

자기 안의 밝은 방뿐 아니라 잠가놓은 창고까지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안쪽에는 늘 두 개의 계절이 함께 산다.

봄꽃이 피는 뜰이 있는가 하면 햇빛이 잘 들지 않는 골방도 있다.

선의만 있는 것도 아니다.

질투가 있고 허영이 있으며, 비겁함과 욕망이 있고, 때로는 타인의 실패 앞에서 안도하는 어두운 마음도 있다.

그 그림자를 인정하지 않으면 사람은 그것을 타인의 등에 붙인다.

자기 안에서 받아들이지 못한 어둠을 남의 잘못이라 부르기 시작한다.

마음을 오래 닦은 사람의 눈빛이 부드러워지는 까닭도 그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산의 정상에 오래 머문 사람이 함부로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는 것처럼, 자기 마음의 골짜기를 많이 걸어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쉽게 판결하지 않는다.

자기 발에도 같은 진흙이 묻어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높은 산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장 좌판에도 있다.

병실의 흰 천장에도 있고, 장례식장의 향 냄새 속에도 있다. 자식이 잠든 얼굴을 바라보는 새벽에도 있고, 수십 년 미워했던 사람의 손을 마침내 잡는 순간에도 있다.

철학책 수백 권을 읽어도 풀리지 않던 것이 낡은 식탁 위 밥 한 그릇 앞에서 풀릴 때가 있다.

어머니가 생전에 쓰던 수저를 어느 날 발견하고 한참 손에 들고 있을 때, 사람은 자기 인생의 한 조각을 갑자기 만난다.

그때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내 말투 속에는 부모의 말이 남아 있고, 내 생각 한쪽에는 스승의 문장이 들어 있으며, 내 웃는 방식에는 오래 함께 산 사람의 표정이 스며 있다.

나를 상처 입힌 사람도 나의 일부를 만들었다.

그 상처를 피해 돌아가느라 다른 길을 걸었고, 그 길에서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한 사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이 지나간 자리 위에 지금의 한 사람이 서 있다.

인간은 혼자 우뚝 선 나무 같아 보이지만 뿌리 아래에서는 수많은 흙의 기억과 물의 길이 이어져 있다.

나라는 존재는 어쩌면 수많은 관계가 잠시 한 몸 안에서 피운 꽃이다.

그쯤에서 처음의 질문은 조금 다른 모습으로 바뀐다.

나는 누구인가.

그 질문 옆에 또 하나가 앉는다.

어떤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

첫 번째 질문이 존재의 뿌리를 향한다면 두 번째 질문은 삶의 방향을 향한다.

태어난 곳은 고를 수 없었다.

부모도 고를 수 없었고, 시대도 고를 수 없었다.

그렇지만 오늘 어느 쪽으로 한 걸음 옮길지는 아직 남아 있다.

생은 이미 인쇄된 책이 아니다.

살아 있는 동안 계속 수정되는 원고다.

잘못 적은 문장이 있다.

지워버리고 싶은 페이지도 있다.

후회라는 붉은 교정부호가 수없이 찍힌 장도 있다.

완전히 고칠 수 없는 날들도 많다.

그래도 다음 페이지가 남아 있다.

한 사람에게 늦은 사과를 건넬 수 있고, 오래 닫아둔 문을 조금 열 수 있다. 미워했던 사람을 다 용서하지 못하더라도 미움의 무게를 조금 덜어낼 수 있다.

인간은 마지막 마침표가 찍히기 전까지 미완성이다.

미완성이라는 사실은 결핍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늦었다고 여긴 자리에서도 문장 하나는 바뀔 수 있다.

나무는 봄에 자기 이름을 꽃으로 쓴다.

여름에는 잎으로 쓰고, 가을에는 열매로 쓰며, 겨울에는 잎을 모두 내려놓은 빈 가지로 쓴다.

어느 계절이 진짜 나무인가.

모두 나무다.

인간도 빛나던 날만 자신은 아니다.

무너진 날도 자기이고, 비겁했던 날도 자기이며, 다시 일어서 다른 사람의 손을 잡아준 날도 자기다.

삶은 완벽한 초상화가 아니라 수없이 덧칠된 한 폭의 그림이다.

어두운 색을 지워버릴 수는 없다.

그 위에 다른 색을 올리며 깊이를 만들 뿐이다.

어쩌면 성숙이란 자기 그림에서 어두운 부분을 도려내는 일이 아니라 그 어둠마저 전체의 한 색으로 받아들이는 일일 것이다.

그때 비로소 타인의 어둠에도 자리를 내줄 수 있다.

거울 앞의 사람은 오늘도 어제와 조금 다르다.

주름 하나가 더 생기고, 머리카락 몇 올이 더 희어졌을지 모른다.

거울은 그것만 보여준다.

그러나 사람의 안쪽에는 아직 쓰이지 않은 문장들이 남아 있다.

누군가에게 건네지 못한 말.

아직 용서하지 못한 이름.

아직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 사람.

아직 걸어보지 않은 길.

그것들이 빈 원고지처럼 마음 한쪽에 쌓여 있다.

그러므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너무 빨리 답을 적어서는 안 된다.

답을 적는 순간 사람은 자기 자신을 한 문장 안에 가두기 쉽다.

차라리 질문을 오래 품고 사는 편이 낫다.

그 질문은 마음 안에 작은 창문 하나를 남겨둔다.

새로운 생각이 들어올 창.

다른 사람의 슬픔이 들어올 창.

어제까지의 자신을 조금 바꿀 수 있는 빛이 들어올 창.

나는 누구인가.

어쩌면 답은 얼굴에도, 이름에도, 직함에도 없다.

한평생 지나온 자리마다 남겨놓은 미세한 흔적 속에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준 손끝.

무너질 때 붙잡아준 어깨.

손해를 보더라도 물러서지 않았던 한 걸음.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작은 친절 하나.

그것들이 모여 마지막에 한 사람의 얼굴을 만든다.

생의 저녁이 오면 우리는 이름보다 흔적으로 남는다.

꽃이 지고 난 뒤 향기가 잠시 자리를 지키듯,

사람도 떠난 뒤 한동안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머문다.

그때 비로소 한 생의 문장이 완성될 것이다.

마지막 줄은 아마 자신이 쓰지 못한다.

남아 있는 사람들이 쓸 것이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무엇을 가졌던 사람이 아니라

어떤 온기를 남긴 사람이었는가.

그 물음 앞에서

‘나’라는 긴 원고는 비로소 마지막 퇴고를 마친다.

그리고 한평생 붙들고 살았던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는

끝내 한 줄의 정의가 아니라,

사람들 가슴에 오래 남은

체온 하나로 답하게 될 것이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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