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마음은 도대체 어디 있는가 ― 마음과 깨달음은 말이 아니라 삶에서 드러나는가

마음은 도대체 어디 있는가 ― 마음과 깨달음은 말이 아니라 삶에서 드러나는가 2026.08.18
마음은 도대체 어디 있는가 ― 마음과 깨달음은 말이 아니라 삶에서 드러나는가

마음은 도대체 어디 있는가

― 마음과 깨달음은 말이 아니라 삶에서 드러나는가

“마음이

아프다.”

우리는 이 말을 너무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손이 아프면 손을 짚을 수 있고, 무릎이 아프면 아픈 곳을 가리킬 수 있다. 심장이 아프면 검사를 통해 이상을 확인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마음이 아프다고 할 때는 어디를 가리켜야 하는가.

가슴인가

머리인가

심장인가

아니면 그 어디에도 없는 어떤 자리인가.

마음이

아프다고도 하고,

마음이

흡족하다고도 한다.

마음이

무겁다 하고,

마음이

가볍다 하며,

마음을 열고 닫는다고도 한다.

더 이상한 말도 있다.

“마음을

내려놓으십시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을

어디에 내려놓으라는 것인가.

손에 들고 있는 것도 아니고,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도 아니다. 무게를 달 수도 없고 형체를 그릴 수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평생 마음 때문에

웃고,

울고,

잠을 설치고,

때로는 한 사람을 평생 기다린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육체보다 더 깊게 사람을 흔들어놓는다.

도인들은

마음을 바라보라고 한다.

마음을 닦으라고 한다.

마음을 비우라고 한다.

참마음을 찾으라고 한다.

이쯤 되면

의문 하나가 생긴다.

볼 수도 없는 마음을 어떻게 바라보며,

형체도 없는 마음의 어디를 닦는다는 것인가.

아마

마음은 몸 안 어딘가에 따로 들어앉은 물건이 아닐 것이다.

보고

듣고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미워하고

두려워하고

기대하는 인간의 수많은 작용을 우리가 한마디로 ‘마음’이라 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마음보다 더 난감한 말이 있다.

바로 “깨달음”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깨달아야 합니다.”

누군가는 오랫동안 참마음 공부를 했다고 하고,

누군가는 수행 끝에 무엇인가를 깨달았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있으면

궁금해진다.

도대체

무엇을 깨달았다는 것인가.

깨달음은 어디에 있으며,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가.

근본적인 의문도 있다.

깨달은 사람은

무엇이 달라지는가.

길에서 마주치면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다.

키가 더 커지는 것도 아니다.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도 아니다.

머리 위에 어떤 표시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밥을 먹고

잠을 자며

춥고 더운 것을 느끼는 것 또한 같다.

아프면 병원을 찾고

늙으면 주름이 생긴다

외양만 놓고 보면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깨달음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여기에서

깨달음을 어떤 신비한 경지로 높이 올려놓는 일을 경계하고 싶다.

스스로 깨달았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삶이 달라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평생 마음공부를 했다는 사람이 작은 비판 하나에 분노하고,

수십 년 수행했다는 사람이 이익 앞에서 욕심을 내며,

깨달음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약한 사람을 함부로 대한다면,

그 깨달음이라는 말 앞에서 우리는 다시 물어볼 수밖에 없다.

그 공부는

어디에 남아 있는가.

어쩌면 깨달음에는 증명서가 없는 대신

삶이라는 시험지가 있는지도 모른다.

깨달음은 자신이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대하는 방식에서 조금씩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화를 느끼면서도

그 화를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던지지 않는 사람.

욕심이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욕심이 올라오는 순간

그것 때문에

남을 해치지 않는 사람.

상처받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받은 상처를

또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지 않는 사람.

자존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남의 존엄을 짓밟지 않는 사람.

그런 데서 마음공부의 흔적이 비로소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깨달은 사람도

배가 고프다.

서운할 수 있고,

화가 날 수도 있으며,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

차이는 감정이 생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을 것이다.

마음공부 역시 마음을 없애는 공부가 아니라

마음의 움직임에 끌려다니지 않는 연습에 가까울지 모른다.

내 안에서 미움이 일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미워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욕심이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반드시 그 욕심을 따라야 하는 것도 아니다.

생각이 떠오르는 것과

그 생각대로 행동하는 것 사이에는 작은 틈이 있다.

어쩌면 오랜 수행은 바로 그 틈을 넓혀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화를 느끼고 바로 말하지 않는 한순간.

욕심이 일어나도 한 번 더 생각하는 한순간.

상대의 잘못을 보면서도 그 사람 전체를 함부로 단정하지 않는 한순간.

그 짧은 틈 하나가 한 사람의 품격을 결정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참마음”이란 무엇인가.

이 또한

거창한 무엇이 아닐 수 있다.

평소에는 누구나 좋은 말을 할 수 있다.

사랑

용서

자비

겸손

배려를 이야기하기는 어렵지 않다.

정작 사람의 마음이 드러나는 것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무시받았을 때,

돈과 이해관계가 걸렸을 때,

자기보다 약한 사람이 앞에 있을 때,

그때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가.

거기에 그 사람이 평생 공부했다는 마음의 깊이가 드러난다.

하여

깨달음은 말이 많아지는 일이 아니라

어쩌면 불필요한 말이 조금씩 줄어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남을 쉽게 평가하는 말이 줄고,

자신을 자랑하는 말이 줄며,

타인의 허물을 옮기는 말이 줄어드는 것.

대신 상대의 사정을 헤아리는 시간이 조금 늘어나는 것.

그 정도라면 깨달음은 신비한 무엇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도 충분히 살펴볼 수 있다.

수행의 깊이도 산속에서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는가보다

사람들 사이로 돌아왔을 때 어떻게 살아가는가에서 드러날 것이다.

수행을 마친 뒤에도 가까운 사람을 계속 힘들게 한다면

수행의 의미를 다시 살펴야 한다.

마음공부를 오래 했는데도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을 미워한다면

공부의 방향을 다시 돌아볼 일이다.

깨달았다고 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깨달음을 알아달라고 한다면

그 깨달음 역시 한 번쯤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큰 나무는

자기가 그늘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잘 익은 곡식은

자기가 익었다고 소리치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공부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그 사람이 깨달았는지는

그 사람의 설명보다

그 사람 곁에 있는 사람들이 먼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함께 있으면

불편하지 않은 사람.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더욱 예의를 갖추는 사람.

잘못했을 때

변명보다 사과가 먼저 나오는 사람.

아는 것을 자랑하기보다

모르는 것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

누군가 넘어졌을 때

훈계부터 하지 않고 손부터 내미는 사람.

그런 모습이라면

깨달음이라는 어려운 말을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좋겠다.

마음도 깨달음도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다.

나무의 뿌리도 땅속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뿌리를 보는 것은

나무가 쓰러지지 않는 모습과

철마다 피워내는 잎과 열매를 통해서다.

마음도 그러할 것이다.

깨달음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 사람의 마음을 열어볼 수 없고

그 사람의 깨달음을 측정할 수도 없다.

다만 그가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그 뿌리의 깊이를 짐작할 뿐이다.

그렇다면

굳이

“나는 마음공부를 오래 했다.”

“나는 깨달았다.”

말할 필요가 있을까.

참으로 깊어진 마음이라면

말보다 먼저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날 것이며,

참으로 얻은 깨달음이라면

자신의 입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낸 하루하루가 대신 말해줄 것이다.

어쩌면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마음이라는 어떤 신비한 물건을 닦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날마다 다듬는 일일 것이다.

깨달음도 마지막에 얻는 한 번의 거대한 답이 아니라,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덜 미워하고,

조금 덜 욕심내며,

조금 더 기다려주고,

조금 더 사람을 귀하게 대하는 것.

그런 변화가 한 사람의 삶 속에 오래 쌓여가는 일일지 모른다.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깨달음 역시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는 보인다.

어쩌면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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