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잡히지 않는 생의 접착면 ― 조홍래 시인의 「딱풀」 을 읽다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붙잡히지 않는 생의 접착면 ― 조홍래 시인의 「딱풀」 을 읽다 202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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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풀
시인 조홍래
그녀는 어디서든 딱 달라붙어 있었다
운명처립 떨어질 수 없는 마주침이었으니까
그날 밤 그녀는 단풍나무 아래
오래 말라 있던 나뭇잎처립 굳어 있었다
당신의 손끝이 입술처럼 닿는 순간
그녀는 천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디
하얗고 부드러운 속살이 숨결처럼 펼쳐졌고
그 위에 그녀의 온기로 가득 채웠다 상처 같았던 결
어긋나 접히지 못했던 마음의 자리마다 그녀가 닿았다
말없이 소리 없이 표면 아래로 더 깊숙이 스며들었다
서로 몸이 겹쳐지는 일이 아니었다
잊고 싶던 자국을 덮고, 감싸고, 지우는 일이었다
한 겹의 사랑으로 다시 살아나는 의식이었다
떨리는 손 맞물리는 숨결 서로의 체온이 안아주던 밤
틈 하나 없는 하나의 형태가 되어 있었다
붙는다는 건 누가 누구를 품는지가 아니라
서로의 상처를 흔적 없이 봉합하는 일이다
첫날 밤 그렇게 달라붙은 채 굳어 있었다.
어젯밤의 흔적이 완전하게 남아
찢기기 전 모습으로 우리는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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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잡히지 않는 생의 접착면
― 조홍래 시인의 「딱풀」 을 읽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사랑에는
못이 필요할 때가 있고,
실이 필요할 때가 있으며,
때로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풀 한 방울이 필요하다.
못은 박힌 자리를 남긴다.
실은 꿰맨 자리를 남긴다.
풀은 다르다.
풀은 자신의 몸을 없애면서 두 개의 세계를 하나로 만든다.
조홍래 시인의 「딱풀」은 바로 그 사라짐의 방식으로 완성되는 사랑을 쓴 시다.
제목부터
뜻밖이다.
‘딱풀’.
시의 제목으로 불러 세우기에는 너무 일상적이고, 너무 문구점 냄새가 난다. 장난꾸러기 아이의 책가방 한구석에 굴러다닐 법한 작은 원통 하나. 종이 두 장을 붙이고 나면 뚜껑을 닫아 서랍 속에 넣어두는 하찮은 사물이다.
조홍래 시인은 그 사물을 사랑의 제단 위에 올려놓는다.
여기서
시가 낯설어진다.
장미도 아니고 달도 아니며 별도 아니다.
조홍래 시인은 사랑을 노래하기 위해 접착제를 불러낸다.
낭만의 오래된 정원에서 꽃을 꺾지 않고 문구점 선반에서 딱풀 하나를 집어 든 것이다.
그 순간
사랑은 감상이 아니라
물성이 된다.
붙는다
스민다
마른다
굳는다
봉합한다
이 시의 사랑에는
체온이 있고 점성이 있다.
손에 묻으며, 표면을 적시고, 서로 다른 두 면 사이로 들어가 자신의 모습을 감춘다.
여기에 「딱풀」의 첫 번째 미학이 놓여 있다.
사랑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이에 존재한다.
두 장의 종이가 붙어 있을 때 풀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기에 더 중요한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그렇다.
관계에서 흔히 바라보는 것은 얼굴이고 말이며 행동이다.
조홍래 시인의 시선은 그 표면을 지나 두 존재 사이의 보이지 않는 접착면으로 들어간다.
그곳에는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상처도 있다.
“어긋나 접히지 못했던 마음의 자리마다 그녀가 닿았다”
이 대목에서 딱풀은
더 이상 사물이 아니다.
상처 입은 존재의 틈을 찾아가는 손길이 된다.
사람은 누구나 조금씩 찢어진 채 살아간다.
어떤 사람은 어린 날에 찢어지고,
어떤 사람은 사랑 때문에 찢어지고,
어떤 사람은 믿었던 사람의 한마디 때문에 한쪽 귀퉁이가 오래 접혀 있다.
멀쩡해 보이는 인간도 마음을 펼쳐보면 어디엔가 접힌 자국 하나쯤 가지고 있다.
조홍래 시인의 사랑은 그 자국을 꾸짖지 않는다.
왜
찢어졌느냐고
캐묻지도 않는다.
그저
그 자리에 닿는다.
이것은
치료보다 더 오래된 행위다.
품음이다.
조홍래 시인은 그것을
밀고 나간다.
“붙는다는 건 누가 누구를 품는지가 아니라
서로의 상처를 흔적 없이 봉합하는 일이다”
이 두 행은
「딱풀」의 심장이다.
여기에서 ‘사랑한다’라는 동사보다 ‘봉합한다’라는 동사가 더 오래 남는다.
봉합에는
아름다움만 있지 않다.
그 앞에는
반드시 찢어짐이 있다.
상처가 없으면 봉합도 없다.
하여
조홍래 시인에게 사랑은 완전한 두 사람이 만나 행복해지는 사건이 아니다.
이미 금이 가고, 찢어지고, 어긋나 버린 두 존재가 서로의 불완전을 손에 쥐어주는 사건이다.
사랑의 시작이 아름다움에 있지 않고 결핍의 승인에 있다는 점에서 이 시는 뜻밖에 깊다.
더
흥미로운 것은
딱풀의 숙명이다.
풀은 무엇인가를 붙이는 순간 자기 자신을 잃는다.
처음에는 하얗게 모습을 드러내지만 두 면이 포개지고 시간이 지나면 보이지 않는다.
사랑
또한
그러하다.
자신을 과시하는 사랑은
늘
표면에 남는다.
내가 이만큼 사랑했다.
내가 이만큼 희생했다.
내가 너를 위해 무엇을 했다.
그 사랑은
아직
덜 마른 풀과 같다.
진짜로 스며든 것은 굳이 자신의 이름을 남기지 않는다.
조홍래 시인의 딱풀은
바로
이에서 하나의 윤리가 된다.
사랑은 자신을 증명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흔적을 줄여 상대를 온전하게 만드는 일이다.
이 시에서 특히 아름다운 대목은 육체성과 정신성이 서로 등을 돌리지 않는다는 데 있다.
“손끝”,
“입술”,
“속살”,
“숨결”,
“체온”
시 안을 뜨겁게 지나간다.
자칫하면
관능의 묘사에 머물 수 있는 언어들이다.
조홍래 시인은
몸을 소비하지 않는다.
몸을 통하여 상처의 내부로 들어간다.
겹쳐지는 몸보다 중요한 것은 겹쳐지는 생이다.
닿는 피부보다 더 깊은 곳에서 서로의 파손된 시간을 이어 붙인다.
이 시의
‘첫날밤’ 역시 단순한 육체적 결합의 시간이 아니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감추었던 찢어진 부분을 펼쳐놓고 다시 한 장의 생으로 붙는 존재론적 초야初夜에 가깝다.
밤이 지나고 남은 것은 쾌락의 흔적이 아니다.
“찢기기 전 모습”이다.
묘하다.
정말 찢기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한번 구겨진 종이는 아무리 펴도 구김이 남는다.
찢어진 종이는 다시 붙여도 아주 미세한 선을 품는다.
바로 그 때문에 「딱풀」은 단순한 치유의 낙관론에서 벗어난다.
상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상처까지 포함하여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을 이 시의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접착의 역설’이라 부를 수 있다.
흉터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흉터를 혼자 감당하지 않게 된 것이다.
조홍래 시인의
「시인의 말」인 「갈무리」를 함께 읽으면 이 접착의 의미는 더욱 분명해진다.
□ 시인의 말
갈무리
끝은 도착이 아니다
존재가 부재와 맞닿으며
스스로의 경계를 시험해야 한다
경험에서 흘러나온 부족함이
완결을 가장하지만
결국 미완으로 남아
또 다른시간을 불러낸다
공허와 불안은
흐르지 못한 강물처럼 어딘가에 멈추고
멈춤 한가운데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열림을 본다
그 사이에는 이미 스며든 환상이 있어
나를 바라보고
나는 그 시선을 인식하는 순간
누구인지 어디에 서 있는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ㅡ시인의 말 <갈무리> 전문
조홍래 시인은 쓴다.
“끝은 도착이 아니다”
이 한 문장은 「딱풀」의 이면을 비춘다.
붙었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굳었다고 완성된 것도 아니다.
인간은 완결되지 않는다.
사랑도 완결되지 않는다.
한 번 붙인 마음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들뜨고, 삶의 습기와 추위와 건조함 속에서 또 다른 틈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조홍래 시인의 ‘갈무리’는 종결이 아니라 다음 미완을 준비하는 행위다.
갈무리는 끝내는 일이면서 동시에 다음 계절을 위해 씨앗을 남기는 일이다.
조홍래 시인의 시 세계에는
이처럼
묘한 운동이 존재한다.
붙지만 붙잡지 않는다.
완성하려 하지만 완성을 믿지 않는다.
끝을 말하면서 끝 뒤의 시간을 열어놓는다.
사랑하면서 상대를 소유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조홍래 시인의 중요한 미의식 하나가 드러난다.
접착과
자유의 공존이다.
잘못 붙인 종이는 찢어야 떨어진다.
잘못된 사랑도 그렇다.
상대를 지나치게 소유하면 사랑은 접착이 아니라 압착이 된다.
서로를 살리는 결합이 아니라 서로의 숨을 막는 밀봉이 된다.
조홍래 시인이 말하는 붙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두 존재가 없어져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존재가 자신의 결을 지닌 채 서로의 찢어진 부분을 받쳐주는 관계다.
두 장의 종이는 붙어도 두 장이다.
이 얼마나 이상한 사랑의 비유인가.
하나가 되었으나 둘이고,
둘이면서 떨어지지 않는다.
사랑의 가장 어려운 문법이 그 작은 딱풀 안에 들어 있다.
조홍래 시인은 거창한 철학 용어를 불러오지 않았다.
생활의 가장 하찮은 물건 하나를 들어 인간 존재의 균열과 치유, 사랑과 연대, 완결과 미완을 말한다.
좋은 시는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너무 가까워 보이지 않던 것에 낯선 빛을 비추는 일인지도 모른다.
딱풀은 수없이 사용되어 왔지만 딱풀의 생을 생각해본 일은 드물다.
딱풀은
남을 붙이고
자신은 사라진다.
자기 몸을 조금씩 닳게 하여
두 개의 찢어진 세계 사이를 메운다.
사랑도 그와 닮았다.
사람 하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좋은 부분만 쓰다듬는 일이 아니다.
그 사람이 들고 온 찢어진 귀퉁이까지 자신의 생의 평평한 곳에 대어보는 일이다.
어긋나면 다시 맞추고,
들뜨면 다시 눌러주고,
마를 때까지 손바닥을 떼지 않는 일이다.
그렇게 한 사람의 체온이
다른 한 사람의 상처 위에서 천천히 굳어가는 일이다.
조홍래 시인의 「딱풀」을 숙독하면 문구점의 작은 딱풀 하나도 이전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 속에는
하얀 접착제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말하지 못한 용서 몇 방울,
늦게 도착한 이해 몇 방울,
끝내 떠나지 않은 사람의 체온 몇 방울이 들어 있다.
조홍래 시인은 그 작은 원통의 뚜껑을 열어
사랑의 가장 오래된 상처에 바른다.
세상은 자꾸 찢어진다.
사람과 사람이 찢어지고,
기억과 현재가 찢어지고,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이 찢어진다.
그때 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어쩌면 거창하지 않을 것이다.
찢어진 두 가장자리 사이에
얇게 자신의 몸을 바르는 일.
누군가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굳어주는 일.
조홍래 시인의 「딱풀」은 바로 그곳에 있다.
꽃이 피는 자리도 아니고
별이 뜨는 자리도 아니다.
찢어진 생의 뒷면.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그 가느다란 틈 속에서,
한 편의 시가
자신의 몸을 다 써가며
두 사람을 붙들고 있다.
끝내
자신은
보이지 않는다.
좋은
사랑처럼.
좋은
시처럼.
ㅡ청람

□
조홍래 시인께
고양 원흥골 산자락 아래에는
작은 파스타집이 있고,
그 안에는 커피 향보다 먼저 사람 냄새가 번지는 자리가 있습니다.
조홍래 시인께서는 그곳에서 파스타를 만들고 드립커피를 내리시지만, 어쩌면 가장 오래 만들어 오신 것은 음식도 커피도 아닐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였을 것입니다.
한 잔의 커피가 식어가는 동안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한 접시의 파스타가 비워지는 동안 한 사람의 외로움까지 가만히 받아내는 일. 세상에서는 그것을 장사라 부를지 모르지만, 시인의 마음에서는 이미 한 편의 시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조홍래 시인께서는 시를 ‘짓는’ 분이라기보다
시를 ‘낳는’ 분에 가깝습니다.
머리에서 문장을 조립하여 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오래 품고, 그 사람의 말과 침묵과 상처를 가슴 안에서 오래 데운 뒤 한 편의 시로 세상에 내놓으시기 때문입니다.
하여
조홍래 시인의 시에는 체온이 있습니다.
언어보다 사람이 먼저 있고,
기교보다 마음이 먼저 있으며,
표현보다 관계가 먼저 놓여 있습니다.
누군가의 아픔을 함부로 해석하지 않고, 누군가의 외로움을 쉽게 위로하지 않으며, 그저 곁에 오래 머물러주는 마음이 시의 밑바닥을 이루고 있습니다.
원흥골 산자락의
작은 공간도 그런 곳일 것입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파스타 한 접시를 먹고 커피 한 잔을 마신 뒤 돌아가지만, 어떤 이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 한 조각을 내려놓고 갈지도 모릅니다.
조홍래 시인께서는
그것을 주워 들지 않습니다.
다만
그 자리에 그대로 따뜻한 온기를 덮어둡니다.
그 온기가 오래 숙성되면 어느 날 「딱풀」 같은 시가 태어납니다.
찢어진 것을 다시 붙이고,
어긋난 것을 다시 맞추고,
사람과 사람 사이 벌어진 틈에 자신의 마음을 얇게 펴 바르는 시.
그렇기에
조홍래 시인의 문학은 책상 위에서만 태어나지 않습니다.
주방의 불빛에서도 태어나고,
커피 드리퍼 아래로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소리에서도 태어나며,
늦은 오후 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의 지친 얼굴에서도 태어납니다.
시인은
세상을 특별한 곳에서 찾지 않습니다.
가장 평범한 사람의 하루를 오래 바라보다가 그 안에서 아무도 보지 못한 작은 떨림 하나를 찾아냅니다.
그것이 시인의 눈이고,
그 떨림을 함부로 꺾지 않고 가슴으로 품는 것이 시인의 인품일 것입니다.
조홍래 시인께서 사람을 대하는 방식과 시를 대하는 방식은 서로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사람에게도 쉽게 결론을 내리지 않고,
시에도 함부로 마침표를 찍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상처가 다 아물 때까지 기다리고,
한 문장이 제 숨을 찾을 때까지 기다립니다.
조홍래 시인의 시에는 서두름보다 숙성이 있고, 설명보다 여운이 있으며, 목소리보다 체온이 오래 남습니다.
원흥골 산자락 아래
작은 파스타와 드립커피숍 ㅡ ‘양동이’.
어쩌면 그곳은 식당이나 카페라기보다
조홍래 시인의 또 하나의 시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테이블 하나가 한 편의 시이고,
의자 하나가 한 사람의 사연이며,
커피 한 잔이 말하지 못한 마음의 여백일 것입니다.
그곳에서 조홍래 시인께서는 오늘도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듣고, 사람을 품습니다.
그렇게 품어진 마음들이 어느 날 문장이 되고,
문장이 다시 시가 되어 세상으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조홍래 시인의 시를 읽는 일은
한 사람의 작품을 읽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가 살아온 마음의 방식을 읽는 일이며,
사람을 끝까지 사람으로 바라보려는 태도를 만나는 일입니다.
시를 잘 쓰는 시인은 많습니다.
사람을 품어 시를 낳는 시인은 흔하지 않습니다.
조홍래 시인께 오래도록 바라는 것은 화려한 문장이 아닙니다.
지금처럼
사람을 쉽게 지나치지 않는 마음,
한 사람의 상처 앞에 잠시 머물 줄 아는 마음,
세상의 찢어진 자리에 따뜻한 언어 한 겹을 발라주는 마음,
그 마음이 오래도록 시인의 가슴에서 마르지 않기를 바랍니다.
원흥골 산자락 아래에서 피어나는 커피 향처럼
조홍래 시인의 시도 오래 번져가기를 바랍니다.
멀리 가지 않아도 좋습니다.
한 사람의 가슴에 오래 머무는 시라면
이미 충분히 먼 곳까지 간 것이니까요.
조홍래 시인께
깊은 존경과 따뜻한 마음을 담아
이 글을 드립니다.
ㅡ청람 김왕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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