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사람의 마음에서 먼저 익는다 ― 정다운 시인의「가을엔 가을이」 읽다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가을은 사람의 마음에서 먼저 익는다 ― 정다운 시인의「가을엔 가을이」 읽다 2026.08.21
□ 정다운 시인

■
가을엔 가을이
시인 정다운
서쪽에서 불어오는
하늬바람으로 들게 하소서
파아란 하늘
하얀 양떼구름으로 오게 하소서
가을향기 한가득 머금은
들국화 향기로 피어나게 하소서
기억을 흔드는
처연한 빗소리로 오게 하소서
붉은 단풍
눈꽃 마중하는 설렘으로 오게 하소서
가을엔 가을이 그냥 오게 하소서
□
정다운 시인
2006년 한맥문학으로 등단
한맥문학상 수상.
대한민국 문화공헌 대상
시집
<윙크하는 사과꽃>
<메리골드커피 먹는 여자>
■
가을은 사람의 마음에서 먼저 익는다
― 정다운 시인의「가을엔 가을이」 읽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가을은
달력 한 장을 넘긴다고 오는
계절이 아니다.
논두렁의 벼가 고개를 숙이고, 산마루의 빛깔이 조금씩 낮아지며, 저녁바람 끝에 서늘한 기척 하나 묻어올 때 비로소 사람의 마음에도 계절 하나가 자리를 잡는다. 여름이 밖에서 뜨거워지는 계절이라면 가을은 안에서 깊어지는 계절이다.
정다운 시인의 「가을엔 가을이」 는 바로 그 ‘안으로 오는 계절’을 노래한다.
표면만 보면 이 시에는 하늬바람, 파란 하늘, 양떼구름, 들국화, 빗소리, 단풍, 눈꽃 같은 익숙한 가을의 사물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자칫하면 한 폭의 계절 풍경화에 머물 수도 있는 소재들이다.
시인은 풍경을 나열하지 않는다.
하나하나의 자연물을 마음의 기관으로 바꾸어 놓는다.
하늬바람은 숨결이 되고, 양떼구름은 지나간 생각의 무리가 되며, 들국화는 기억의 향기가 되고, 가을비는 오래 묻어둔 이름들을 흔드는 손가락이 된다. 붉은 단풍은 소멸 직전의 찬란함이고, 아직 오지 않은 눈꽃은 생의 다음 장을 기다리는 마음이다.
그렇게 읽고 나면 「가을엔 가을이」는 계절시라기보다 한 인간이 세월을 맞이하는 방식에 관한 시로 넓어진다.
첫 구절,
“서쪽에서 불어오는
하늬바람으로 들게 하소서”
에서 중요한 것은 ‘불어오게’가 아니라 ‘들게 하소서’라는 말이다.
바람은 밖에서 분다.
그런데 시인은 바람이 ‘들게’ 해달라고 한다.
어디로 드는가.
마음으로 드는 것이다.
여기서 하늬바람은 단순한 기상현상을 벗어난다. 한여름 내내 달아올랐던 사람의 욕망을 식히고, 말 때문에 생긴 상처의 열기를 가라앉히며, 세상살이에 지친 마음의 방문을 조금 열어젖히는 바람이 된다.
사람도 때로는 마음 안에 환기가 필요하다.
오래 쌓아둔 분노와 미련은 닫힌 방의 공기와 닮았다. 문을 열지 않으면 점점 탁해진다. 가을바람 한 줄기만 들어와도 그 방은 달라진다.
정다운 시인은 계절의 첫 문턱에서 바람을 부른다.
바람은 이 시에서 자연의 손이자 마음을 씻어주는 보이지 않는 빗자루다.
이어지는
“파아란 하늘
하얀 양떼구름으로 오게 하소서”
에는 시인의 순정한 미감이 배어 있다.
‘파아란’이라는 말은 어쩐지 오래된 엽서 같다. 세련된 도시의 언어보다 어린 날 운동장 위에서 올려다본 하늘의 빛깔에 가깝다. 그 위를 떠가는 양떼구름은 흩어졌다 모였다 하는 기억과 닮았다.
구름은 붙잡을 수 없다.
바라보는 동안에도 모양이 변하고, 이름을 붙이는 순간 이미 다른 형상이 되어 있다.
인생의 많은 것도 그러하다.
사람도 그렇고 사랑도 그렇고 젊음도 그렇다. 한때 손에 꼭 쥐었다고 여겼던 것들이 어느 날 구름처럼 멀어져 있다. 이 시의 구름은 아름답기만 한 장식물이 아니다. 붙잡을 수 없는 것의 아름다움을 품은 존재다.
정다운 시인은 그 덧없음을 슬픔으로만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늘은 넓고 구름은 흘러간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시가 지닌 품격은 바로 그런 비집착의 정서에서 생겨난다.
들국화가 등장하는 대목에서는 시의 감각이 눈에서 코로 옮겨간다.
“가을향기 한가득 머금은
들국화 향기로 피어나게 하소서”
들국화는 정원 한가운데서 사람의 시선을 기다리는 꽃이 아니다. 길가에서도 피고, 산비탈에서도 피며, 아무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곳에서도 제 몫의 계절을 살아낸다.
그 점에서 들국화는 인간의 삶과 닮았다.
세상의 모든 생이 박수 속에서 피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이름 없이 가족을 먹여 살렸고, 누군가는 평생 자식의 등을 밀어주었으며, 누군가는 자신의 꿈을 뒤로 미룬 채 다른 사람의 하루를 지켜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그 생은 향기를 남겼다.
정다운 시인의 들국화가 귀한 까닭은 그 무명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향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기에 더 멀리 간다.
좋은 사람도 그렇다.
자신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 사람이 지나간 자리에 어떤 향기가 남는다.
시 또한 그래야 한다.
큰 목소리보다 잔향이 오래가는 것.
정다운 시의 힘은 그 잔향에 있다.
이 작품의 정서가 가장 깊어지는 곳은 역시
“기억을 흔드는
처연한 빗소리로 오게 하소서”
이다.
여기서 가을은 완전히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온다.
빗소리는 기억을 흔든다.
참으로 절묘한 표현이다.
기억을 ‘깨운다’거나 ‘불러낸다’고 하지 않았다. ‘흔든다’고 했다.
흔들린다는 것은 완전히 깨어나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잠드는 것도 아니다. 잊고 있던 얼굴 하나가 어렴풋이 떠오르고, 오래전 골목의 냄새가 스치며, 이미 떠난 사람의 목소리가 귓전 어딘가에서 잠시 머무는 상태다.
가을비를 듣다 보면 누구에게나 그런 서랍 하나쯤 열린다.
그 안에는 오래된 편지가 있을 수도 있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손수건 한 장이 있을 수도 있으며, 끝내 보내지 못한 한마디가 접혀 있을 수도 있다.
비는 그 서랍을 억지로 열지 않는다.
다만 손잡이를 살짝 흔든다.
그 작은 흔들림 때문에 마음속 먼지가 일어나고,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품고 살아왔는지 다시 느끼게 된다.
‘처연한 빗소리’는 그래서 이 시의 가장 쓸쓸하고도 아름다운 심장이다.
가을은 아름답기만 한 계절이 아니다.
아름다움과 쓸쓸함이 한 몸으로 서 있는 계절이다.
붉어지는 만큼 떨어질 날이 가까워지고, 충만해지는 만큼 비워질 시간이 다가온다.
정다운 시인은 그 이중성을 정확히 짚는다.
“붉은 단풍
눈꽃 마중하는 설레임으로 오게 하소서”
단풍을 바라보면서 눈꽃을 생각한다.
가을의 한복판에서 겨울을 미리 맞는다.
이 대목에는 생의 시간을 바라보는 성숙한 시선이 있다.
젊은 날에는 한 계절이 영원할 것처럼 산다. 봄이면 봄이 오래갈 줄 알고, 여름이면 뜨거움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여긴다.
세월을 오래 건넌 사람은 안다.
모든 계절은 다음 계절을 품고 있다는 것을.
꽃 속에는 낙화가 있고, 열매 속에는 씨앗이 있으며, 단풍 속에는 이미 겨울이 들어 있다.
인간의 삶도 그렇다.
만남 속에는 이별의 가능성이 있고, 젊음 속에는 노년의 씨앗이 있으며, 한 생의 마지막에는 또 다른 시간의 문이 놓여 있다.
그래서 ‘눈꽃 마중’이라는 말은 죽음의 예감이라기보다 다음 계절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에 가깝다.
붉게 타는 단풍이 눈을 기다린다.
참 아름다운 역설이다.
자신의 끝을 두려워하지 않고 다음 것을 맞이하는 나무의 자세.
이것이야말로 이 시가 가을을 통해 들려주는 생의 품격이다.
마침내 마지막에 닿는다.
“가을엔 가을이 그냥 오게 하소서”
이 한 줄을 위해 앞의 모든 풍경이 존재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냥’이라는 말은 흔하다.
너무 흔해서 시어가 되기 어려운 말이다.
이 시에서는 그 평범한 한 단어가 가장 깊은 철학이 된다.
앞에서는 하늬바람으로 오기를 바랐고, 양떼구름으로 오기를 바랐으며, 들국화 향기와 빗소리와 단풍의 설렘으로 오기를 소망했다.
마지막에 이르러 그 모든 주문을 내려놓는다.
그냥 오게 하소서.
삶의 지혜는 어쩌면 요구를 줄여가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젊을 때에는 사람에게도 조건을 붙이고, 사랑에도 조건을 붙이며, 행복에도 모양을 정한다. 내 뜻대로 되어야 좋은 것이고, 내가 바라는 방식으로 와야 축복이라 여긴다.
세월은 그런 사람의 손에서 하나씩 조건을 떼어간다.
꽃은 꽃대로 피고, 비는 비대로 내리며, 떠날 사람은 떠나고, 올 계절은 제 발로 온다.
그 흐름을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는 마음.
그것이 ‘그냥’이라는 두 글자 안에 들어 있다.
정다운 시인의 「가을엔 가을이」 , 아름다운 까닭은 가을을 찬양해서가 아니다.
계절 앞에서 인간의 욕망을 조금 낮추기 때문이다.
자연에게 명령하지 않고 청한다.
청하다가 끝내 청함마저 내려놓는다.
그 구조는 마치 기도의 변화를 닮았다.
처음의 기도는 원하는 것을 달라는 기도다.
조금 깊어진 기도는 견딜 힘을 달라는 기도가 된다.
더 오래된 기도는 아무것도 달라 하지 않고 그저 오는 것을 받아들일 마음을 구한다.
이 시의 마지막이 그렇다.
가을을 바꾸어달라는 것이 아니라, 가을이 가을로 오도록 내 마음을 열어두는 것이다.
하여
이 작품의 ‘오게 하소서’는 자연을 향한 부탁 같으면서 실은 자기 자신을 향한 다짐처럼 읽힌다.
하늬바람이 불어도 마음의 문이 닫혀 있으면 가을은 들어오지 못한다.
들국화가 만발해도 향기를 맡을 마음이 없으면 계절은 지나간다.
빗소리가 아무리 처연해도 기억을 받아들일 여백이 없다면 그것은 단지 소음일 뿐이다.
가을이 오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의 마음에 빈자리 하나가 있어야 한다.
정다운 시인은 바로 그 빈자리를 만든다.
말을 크게 쓰지 않는다.
철학을 무겁게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작은 자연물들을 하나씩 데려와 마음의 방에 앉힌다.
바람 하나.
구름 하나.
들국화 한 송이.
비 한 줄기.
단풍잎 하나.
그들이 한 방에 모여 앉으면 어느새 한 사람의 생애가 된다.
그 생애는 화려하지 않다.
많이 흔들렸고, 많은 것을 보내주었으며, 아직도 어떤 빗소리 앞에서는 가슴 한쪽이 젖는다.
그럼에도 다음 계절을 마중할 줄 안다.
이것이 이 시가 지닌 가장 깊은 아름다움이다.
가을은 나무를 비우지만 나무를 가난하게 만들지 않는다.
잎을 내려놓은 자리에서 가지의 본모습이 드러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세월이 가져가는 것이 많아질수록 비로소 무엇이 자기 안에 남아 있었는지가 보인다.
명예도 젊음도 사람도 어느 날 하나씩 먼 산 너머로 넘어간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가 아니라, 지나가는 것을 어떤 얼굴로 보내주었는가 하는 삶의 태도일 것이다.
정다운 시인의 「가을엔 가을이」 는 그 얼굴을 보여준다.
서두르지 않는 얼굴.
붙들지 않는 얼굴.
한 계절을 충분히 바라보고 다음 계절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얼굴.
문학은 때로 거창한 사상을 말하지 않아도 깊다.
한 줄의 바람이 철학이 되고, 한 송이 들국화가 인간학이 되며, 한 번의 빗소리가 생애 전체를 흔들 수 있다.
정다운 시인의 가을이 바로 그렇다.
가을을 쓰면서 사람을 쓰고, 풍경을 보여주면서 시간을 말하며, 계절의 언어를 빌려 삶의 수용을 이야기한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남는 것은 단풍의 붉음도, 구름의 흰빛도 아니다.
세월과 싸우지 않는 마음 하나다.
창문을 조금 열어두고
오는 바람을 바람으로 맞으며,
지는 잎을 억지로 가지에 다시 매달지 않는 마음.
그 마음이 충분히 익었을 때
사람도 한 계절이 된다.
정다운 시인의 「가을엔 가을이」 는 바로 그 지점을 보여주는 시다.
가을이 산과 들에서 익기 전에
먼저 사람의 가슴에서 익는다는 것.
그리고 끝내 가장 아름다운 계절은
우리가 꾸며 만든 계절이 아니라
제 모습 그대로 찾아와
잠시 머물다
제 길로 떠나는 계절이라는 것.
그래서 이 시의 마지막 한 줄은 오래 남는다.
가을엔 가을이 그냥 오게 하소서.
한 생을 오래 살아낸 사람만이 비로소 입안에서 천천히 굴릴 수 있는 말처럼.
욕망을 덜어낸 자리에서
계절도, 사람도
제 얼굴을 갖는다.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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