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사과 ㅡ 청람 김왕식

사과 2026.08.24
사과

사과

사과 두 개

긴 여백을 앞에 두고 앉아 있다

하나는 비바람을 오래 씹어 삼켰고

하나는 찢어진 가지의 밤을 품었다

폭우가 과수원의 허리를 꺾던 날

서로의 낙하를 어깨로 받쳐낸 열매

붉은 살갗 깊숙이

아직 푸른 번개 몇 줄 남아 있다

매끈한 사과들이

유리 진열장 속 봄을 자랑할 때

두 사과는

흉터를 훈장처럼 달고 가을 쪽으로 익었다

상처는 오래 견디면

썩는 자리가 아니라 향이 드는 자리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다

같은 가지에서 태어나

서로의 키를 한 번도 재지 않았다

큰 것은 그늘을 조금 더 내어주고

작은 것은 햇빛을 조금 덜 탐했다

둘 사이의 여백에는

지친 저녁 하나 와서 쉬어간다

잘 익는다는 것은

붉어지는 일이 아니라

비바람 뒤에도

곁의 생을 떨어뜨리지 않는 일

사과 두 개

사람보다 먼저 존엄의 둥근 문장을 완성한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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