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은 걷는 사람에게만 문을 연다 ― 허태기 시인의 「새벽 길」 을 읽다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새벽은 걷는 사람에게만 문을 연다 ― 허태기 시인의 「새벽 길」 을 읽다 202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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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길
시인 청강 허태기
거뭇한 하늘
별과 숲이 잠든 시각
풀섶 사이
쉼 없이 흘러내리는
귀뚜라미 합창
노란 불빛 타고
물결치는 나뭇잎
살갗 스치는 바람결
긴 호흡 들이키며
강물 조는
새벽
사유의 문 열고
가만히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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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랑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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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은 걷는 사람에게만 문을 연다
― 허태기 시인의 「새벽 길」 을 읽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새벽은 아직 세상의 단추를 다 채우지 않았다.
중랑천 물비늘 위로 어둠이 마지막 숨을 접고,
청강 허태기의 발끝에서는 말보다 먼저 사유가 깨어난다.
그의 「새벽 길」 은 길을 걷는 시가 아니라 침묵의 안쪽으로 들어가는 발자국이다
허태기 시인의 「새벽 길」 은 새벽을 묘사한 시가 아니다.
한 사람이 아직 세상이 완전히 깨어나기 전, 자기 안의 소음부터 먼저 잠재우는 시다.
첫 행의
“거뭇한 하늘”
부터 시는 색을 크게 쓰지 않는다.
검다고 단정하지 않고, 밝다고도 하지 않는다.
밤과 아침 사이, 아직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은 시간을 ‘거뭇하다’는 한마디로 붙잡는다.
이 어휘 선택에서 이미 허태기 시인의 성정이 드러난다.
대충 넘어가지 않는다.
하늘이 어두우면 그냥 어둡다고 써도 될 텐데, 그는 그 미세한 경계의 색을 놓치지 않는다.
시어 하나를 놓을 때도 한 치의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사람의 눈이다.
이어지는
“별과 숲이 잠든 시각”
역시 좋다.
별은 보통 밤을 밝히는 존재로 쓰이고, 숲은 생명의 움직임으로 그려진다.
허태기 시인은 둘을 모두 잠재운다.
세상이 가장 낮은 호흡으로 내려앉은 시간이다.
그런데
그 고요 속에서 한 가지 소리만 깨어 있다.
귀뚜라미다.
“쉼 없이 흘러내리는
귀뚜라미 합창”
여기서 ‘흘러내린다’는 동사가 인상적이다.
귀뚜라미 소리는 울려 퍼지는 것이 아니라, 어둠의 벽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린다.
소리를 물처럼 다룬다.
이 작은 전환이 시를 낯설게 한다.
허태기 시인의 시는 이런 방식으로 움직인다.
거창한 비유를 들이밀지 않는다.
평범한 사물의 결을 살짝 틀어, 독자가 한 번 더 바라보게 만든다.
그것이 그의 정교함이다.
또한 이 시에는 빛과 바람의 움직임이 아주 절제되어 있다.
“노란 불빛 타고
물결치는 나뭇잎”
불빛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나뭇잎을 타고 움직인다.
나뭇잎은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물결친다.
도시의 가로등과 자연의 잎이 한순간 한 몸처럼 이어진다.
이때 시인은 도시와 자연을 굳이 갈라놓지 않는다.
중랑천이라는 공간도 그렇다.
완전한 산속도 아니고, 완전한 도시도 아니다.
인공의 불빛과 강물, 풀섶과 바람, 사람의 걸음이 함께 있는 경계의 공간이다.
허태기 시인은 바로 그 어름에서 사유한다.
그의 성품이 강직하다는 것은 시에서도 느껴진다.
문장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감정을 과장하지 않고, 수사를 남발하지 않으며, 한 줄 한 줄 필요한 만큼만 놓는다.
그런데
그 강직함 사이에 섬세함이 숨어 있다.
강직함만 있으면 시가 딱딱해질 수 있다.
섬세함만 있으면 시가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흐를 수 있다.
허태기 시인의 시는 그 두 성질을 한데 붙들고 있다.
직선의 뼈대 위에 미세한 바람결을 얹는 방식이다.
하여,
이 작품은 짧지만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살갗 스치는 바람결
긴 호흡 들이키며”
이 대목에서 시는 바깥 풍경에서 몸으로 들어온다.
새벽의 바람이 살갗을 스치고, 그 바람을 긴 호흡으로 받아들인다.
시인은 자연을 구경하지 않는다.
몸으로 통과시킨다.
보는 것에서 호흡하는 것으로 시선이 바뀐다.
이때 새벽은 풍경이 아니라 몸 안으로 들어오는 시간이 된다.
마지막 연은 이 시의 중심이다.
“강물 조는
새벽
사유의 문 열고
가만히 걷는다.”
‘강물 조는 새벽’이라는 표현이 좋다.
강물이 흐르면서도 조는 듯 보이는 시간.
움직임과 정지가 한 장면 안에 들어 있다.
그 사이에서 시인은 ‘사유의 문’을 연다.
여기서도 사유는 거창하지 않다.
철학의 이름을 호출하지 않고, 인생의 결론을 선언하지 않는다.
그저 걷는다.
이 점이 중요하다.
허태기 시인의 사유는 책상에서 머리로만 일어나는 사유가 아니다.
발의 사유다.
걷는 동안 생각이 열리고, 호흡이 길어질수록 마음의 문이 조금씩 열린다.
그에게 걷기는 이동이 아니라 자기 안쪽으로 들어가는 방식이다.
강직한 사람일수록 속으로는 더 많이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겉으로는 단단해 보이지만, 그 단단함을 지탱하는 안쪽에는 수많은 미세한 질문이 있다.
허태기 시인의 시가 그런 인상을 준다.
겉문장은 절제되어 있는데, 그 아래에는 오래 생각한 흔적이 있다.
그래서
이 시를 읽으면 말이 적다는 것이 생각이 적다는 뜻이 아님을 알게 된다.
외려
생각이 깊을수록 말은 줄어들 수 있다.
불필요한 말을 덜어내고, 남은 단어마다 제 무게를 지니게 하는 것.
그것이 허태기 시인의 시가 지닌 미덕이다.
「새벽 길」 은 특별한 사건이 없는 시다.
누구를 만나지도 않고, 큰 깨달음을 외치지도 않으며, 극적인 반전도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래 남는다.
그 이유는 시 전체가 한 사람의 태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세상이 깨어나기 전에 먼저 걷고, 소리를 크게 내기보다 귀뚜라미 소리를 듣고, 강물보다 앞서가려 하지 않으며, 바람을 맞고 호흡을 고르는 사람.
그 태도 자체가 시가 된다.
허태기 시인의 시에는 이런 품격이 있다.
시를 크게 만들지 않는다.
작은 것을 정확히 본다.
귀뚜라미 한 소리, 나뭇잎 한 흔들림, 살갗을 스치는 바람결 하나를 놓치지 않는다.
그 정확함이 시의 깊이를 만든다.
좋은 시는 반드시 어려운 말을 써야 하는 것이 아니다.
정확한 말을 쓰면 된다.
허태기 시인의 시는 그 사실을 보여준다.
“거뭇한 하늘”
“귀뚜라미 합창”
“노란 불빛”
“강물 조는 새벽”
이 모두 쉬운 말이다.
그런데
배치가 정교하다.
그래서
흔하지 않다.
쉽지만 얕지 않고, 짧지만 비어 있지 않으며, 고요하지만 안쪽에서는 오래 움직인다.
이것이 「새벽 길」의 질량이다.
허태기 시인의 강직함은 시의 골격이 되고, 섬세함은 그 골격 사이로 흐르는 피가 된다.
둘 중 하나만 있었다면 이 시는 지금과 같은 호흡을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강직함 때문에 문장은 흐트러지지 않고, 섬세함 때문에 그 문장이 차갑지 않다.
그 두 성질이 만나 사유 깊은 새벽 한 장면을 만든다.
시를 숙독하고 나면 중랑천의 새벽이 눈앞에 남는다.
강물은 아직 졸고 있고, 귀뚜라미는 쉬지 않고 노래하며, 노란 불빛 아래 나뭇잎이 물결친다.
그 사이를 한 사람이 천천히 걷는다.
세상보다 먼저 자신을 깨우는 사람.
자기 생각을 큰소리로 선언하지 않고, 한 걸음씩 사유의 문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
바로 그때 걷기는 산책이 아니라 문학이 된다.
허태기 시인의 「새벽 길」 은 새벽을 지나가는 시가 아니라, 한 사람이 자기 안의 어둠을 천천히 걸어서 통과하는 시다.
그리고
그 통과의 방식이 놀랄 만큼 단정하고, 섬세하며, 깊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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