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도토리 한 알로 건드린 공동체의 龜裂 ― 이규원 시인의 「도토리 생각」 을 읽다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도토리 한 알로 건드린 공동체의 龜裂 ― 이규원 시인의 「도토리 생각」 을 읽다 2026.08.24
도토리 한 알로 건드린 공동체의 龜裂 ― 이규원 시인의  「도토리 생각」 을 읽다

도토리 생각

시인 이규원

능력도 貧한자가

분수도 모르면서

함부로 앞장서서

문학방 쪼개 놓고

멍 하니

정신줄 놓고

내 몰라라 하느냐

도토리 한 알로 건드린 공동체의 龜裂

― 이규원 시인의 「도토리 생각」 을 읽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이규원 시인의

시 「도토리 생각」 은 짧다.

짧지만,

그 안에는 오늘의 문학 공동체와 온라인 소통 문화가 안고 있는 불편한 현실이 압축되어 있다.

표면적으로는 누군가의 무책임과 분별없음을 꾸짖는 시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을 특정 개인을 공격하는 언어로만 읽는다면 시의 폭이 지나치게 좁아진다.

더 넓게 보면, 이 시가 겨누는 것은 한 사람보다도 공동체를 흔든 뒤 그 결과에 책임지지 않는 태도, 그리고 설명 없이 갈등을 방치하는 오늘의 세태다.

카카오톡 문학방과 같은 공간에는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다.

문학관도 다르고, 관계의 깊이도 다르고, 각자가 겪은 사정도 다르다. 같은 일을 두고도 누군가는 당연하다고 여기고, 다른 누군가는 부당하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니

의견이 갈리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외려 살아 있는 공동체라면 차이가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

문제는 차이 다음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그런 판단을 했는지, 그 과정이 합리적이었는지, 누군가가 상처를 입었다면 어떻게 설명하고 수습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이규원 시인의 시는

바로 그 지점을 건드린다.

“함부로 앞장서서

문학방 쪼개놓고”

라는 표현에는 공동체가 나뉘어지는 과정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겨 있다.

문학은 본래 사람을 잇는 언어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도 한 편의 시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게 하는 것이 문학이다.

그런 문학의 이름 아래 외려 사람들이 갈라진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역설이다.

시인은 그 역설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작품을 곧바로 어느 한쪽의 잘못을 확정하는 판결문으로 읽어서는 곤란하다.

현실의 일에는 겉으로 드러난 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선택에는 주최 측 나름의 이유가 있을 수 있고, 당시의 관계와 정서, 운영상의 어려움처럼 밖에서는 모두 알기 힘든 맥락도 있을 수 있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인간적 사정도 분명 존재한다.

사람의 일은 수학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하나의 공식으로 떨어지지는 않는다.

그 점까지 헤아려야 성숙한 비평이 된다.

그럼에도 공동체에 영향을 미친 결정이라면 가능한 범위에서 설명하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작은 일이라고 해서 설명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은 일이 명확히 정리되지 않을 때 사람들 마음속에서는 더 큰 추측이 자란다.

설명이 사라진 자리에 소문이 들어오고, 대화가 비어 있는 자리에는 오해가 앉는다.

이에

이규원 시인의 諷刺는 공격이라기보다 설명을 요구하는 문학적 신호에 가깝다.

“멍 하니

정신줄 놓고

내 몰라라 하느냐”

라는 끝부분도 다소 강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단순한 비난보다 책임에 대한 요구가 있다.

앞장서는 사람에게는 앞장선 만큼의 책임이 따른다.

어떤 일을 시작했다면 과정과 결과를 돌아보고,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바로잡으며, 오해가 있다면 풀어야 한다.

그것이 공동체를 이끄는 사람의 기본적인 자세다.

이규원 시인은

평소 正道를 중시하고 꼼수나 편법을 경계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하여,

이 작품에서도 문제를 우회적으로 덮기보다 원칙의 자리에서 바라보려는 성향이 드러난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그 원칙을 장문의 논설이 아니라 짧은 풍자로 내놓았다는 점이다.

풍자는 본래 칼과 거울의 중간에 있다.

너무 날카로우면 상처만 남기고, 너무 흐리면 아무것도 비추지 못한다.

좋은 풍자는 사람을 베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사람이 자기 모습을 한번 돌아보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도토리 생각」 도 그런 의미에서 읽을 필요가 있다.

제목의 ‘도토리’도 흥미롭다.

도토리는 작다.

작고 흔하다.

그러나

작은 도토리 하나도 떨어지는 자리에서는 분명한 소리를 낸다.

些少해 보이는 일이 공동체의 신뢰와 연결되어 있다면 결코 사소하지만은 않다.

작은 龜裂을 오래 방치하면 큰 틈이 된다.

그래서

이 시는 작은 일이라도 논리적으로 소명하고, 서로의 입장을 충분히 듣고, 가능한 한 명료하게 정리하자는 요청으로 읽는 것이 가장 온당하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중요하게 볼 것이 있다.

누구에게나 자기 나름의 사정은 있다.

이규원 시인의 문제 제기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고, 문제의 중심에 놓인 사람이나 주최 측에도 그들 나름의 설명과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 공동체가 성숙해지려면 어느 한쪽의 목소리만 크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비판할 사람은 비판하되 인격을 훼손하지 말아야 하고, 설명할 사람은 변명으로 흐르지 말아야 한다.

듣는 사람도 이미 결론을 정해놓고 상대의 말을 들으면 안 된다.

그 사이에 필요한 것이 대화다.

문학방이라는 이름에 가장 어울리는 것도 문학보다 먼저 사람의 말이 오갈 수 있는 방일 것이다.

이규원 시인의 「도토리 생각」 은 그런 의미에서 시대의 작은 풍속도를 보여준다.

온라인 공간은 사람을 쉽게 모으지만, 쉽게 갈라놓기도 한다.

손가락 하나로 방을 만들고 나갈 수 있으며, 짧은 문장 하나가 오래된 관계까지 흔들 수 있다.

이 시대에는 말이 너무 빨리 도착한다.

마음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서 더 천천히 설명해야 하고, 더 신중하게 책임져야 한다.

시인의 짧은 풍자가 요청하는 것도 그 지점일 것이다.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명확하게 말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것은 그 어려움까지 솔직하게 밝히며, 서로 다른 입장 사이에서 최소한의 신뢰를 다시 세우는 일.

그것이 正道다.

이규원 시인의 시는 누군가를 무너뜨리기 위해 쓰인 시라기보다, 흐려진 경계를 다시 반듯하게 세우기 위한 짧은 경고음으로 읽는 편이 좋다.

문학은 갈라진 사람을 더 멀리 보내는 언어가 아니라, 서로 다른 이유를 가진 사람들이 다시 마주 앉게 하는 언어여야 한다.

그 점에서 「도토리 생각」 은 짧지만 시대의 한 장면을 정확히 건드린다.

도토리 하나가 떨어졌을 뿐인데 숲 전체가 잠깐 소리를 듣게 되는 것처럼.

이 시가 바라는 것도 책임 있는 해명과 성숙한 대화일 것이다.

누가 이겼는가를 가리는 일보다,

왜 서로 갈라졌는지를 함께 밝히고, 다시 같은 문학의 숲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일.

그것이 이 풍자가 끝내 도달하고자 하는 자리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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