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두 개 ― 상처까지 익어야 한 생이 붉어진다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사과 두 개 ― 상처까지 익어야 한 생이 붉어진다 2026.08.24
■
사과 두 개
― 상처까지 익어야 한 생이 붉어진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사과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앞에는 여백이 넉넉하다.
지친 사람이 와서 잠시 마음을 내려놓아도 좋을 만큼의 자리다.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다.
둘 다 매끈하지 않다. 붉은 껍질 한쪽에는 아직 푸른 멍이 남아 있다.
비바람을 피한
하우스의 사과가 아니다.
폭우가 나무의 허리를 꺾던 날, 찢어진 가지 곁에서 끝내 떨어지지 않고 살아남은 열매다.
그러니
그 멍은 흠이 아니다.
견딤이 껍질에 새겨놓은 생의 필체다.
사람도 그렇다.
흠 없이 살아온 얼굴보다, 상처를 지나고도 다른 사람을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는 얼굴이 더 깊다.
주름은 늙음의 금이 아니라 견디어낸 날들이 얼굴에 써놓은 자서전일 수 있다.
비바람을 많이 맞은 나무가 옆 나무의 흔들림을 함부로 꾸짖지 않듯, 많이 아파본 사람은 남의 아픔 앞에서 목소리를 낮춘다.
“그럴 수도 있지.”
그 짧은 한마디가 때로는 부러진 가지 하나를 밤새 받쳐준다.
두 사과는
크기가 다르다.
같은 가지에서 태어났는데도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다.
그런데
둘은 키를 재지 않는다.
사람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줄자가 너무 많다.
학력의 줄자
돈의 줄자
직함의 줄자
명예의 줄자
작품과 상의 줄자
평생
남의 키를 재다가 정작 자기 마음이 얼마나 자랐는지는 놓치기 쉽다.
두 사과는
아무 말이 없다.
큰 것은 큰 대로 익었고, 작은 것은 작은 대로 익었다.
존엄은
크기에 있지 않다.
상처가 있어도 자기 빛을 포기하지 않는 데 있다.
멍이 들어도 익고,
찢어진 가지 끝에서도 끝내 붉어지는 것.
그것이
생의 품격이다.
하여
이 그림 속 두 사과 앞의 여백은 단순한 빈 공간으로 보이지 않는다.
삶이 오래 걸어온 사람에게 내어준 의자 하나처럼 보인다.
조금 쉬어도 된다고,
상처를 감추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까지 견디어온 것만으로도 잘 살아왔다고 말해주는 자리다.
그림을 오래 바라보면
어느 순간 사과가 사라지고 사람 둘이 보인다.
비바람을 함께 건넌 벗 같고,
한평생 서로 다른 모습으로 늙어온 부부 같고,
키는 다르지만 끝내 서로를 재지 않는 형제 같다.
한쪽이
묻는 듯하다.
많이 아팠지.
다른 쪽은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조금 더 가까이 놓여 있다.
인생의 깊은 위로란 대개 그런 것이다.
말보다 곁이다.
그래서 이 그림을 책상 앞에 걸어두고 오래 보고 싶다.
아침에 일을 시작하기 전 한 번 바라보고, 마음이 힘든 날 한 번 더 보고 싶다.
누군가와 비교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올 때 두 사과를 바라보고, 세상이 뜻대로 되지 않는 날에는 그 푸른 멍을 오래 들여다보고 싶다.
그곳에는 사과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인생이 있다.
견딘 인생이 있고,
함께 살아남은 인생이 있으며,
서로 다른 크기를 비교하지 않는 성숙이 있다.
좋은 그림은 벽을 장식하고 끝나지 않는다.
어느 날
말을 걸어온다.
오늘도 너무 애썼다고,
조금 기울어도 괜찮다고,
상처 하나쯤 품고 살아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그림 한 점이 그렇게 하루의 자세를 바꾸어놓을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다.
마음이
돌아와 앉는 자리다.
그래서 누군가 이 그림 앞에서 오래 발을 떼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과의 붉은빛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안에서
자기 얼굴 하나를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는 어머니를 보고,
누군가는 오래 함께 늙어가는 배우자를 보며,
누군가는 어려운 세월을 함께 견딘 친구를 볼 것이다.
또 누군가는
자기 자신을 볼 것이다.
그것이 이 그림을 곁에 두고 싶은 가장 큰 이유다.
예쁜 그림은 많다.
화려한 그림도 많다.
그런데
살아갈수록 뜻이 달라지는 그림은 흔하지 않다.
젊을 때 보면 사과 두 개이고,
세월을 조금 더 지나 다시 보면 사람 둘이며,
인생의 비바람을 몇 번 건너고 나면 자기 생애가 보이는 그림.
그런 그림이라면
한 번 보고 지나칠 일이 아니다.
한 점쯤 삶 가까이에 두고 오래 함께 늙어볼 만하다.
책상 앞이든
거실 한편이든
사람의 시선이 자주 머무는 곳이면 좋겠다.
매일 같은 그림인데 보는 사람의 생이 달라질 때마다 새로운 말을 건네올 것이기 때문이다.
잘 익은 삶이란 흠 없는 삶이 아니다.
비바람을 지나 상처까지 제 빛으로 익히고도
끝내 누군가의 곁에 나란히 놓일 수 있는 삶이다.
그래서
이 그림을 갖고 싶다.
사과 두 개를 소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살다가 마음이 너무 앞서갈 때마다 돌아와 앉을
인생의 작은 여백 하나를 곁에 두기 위해서다.
ㅡ청람

댓글
로그인 없이 바로 남길 수 있습니다. 나중에 본인이 수정·삭제하려면 이 댓글의 비밀번호를 정해 주세요. 서로 예의를 지켜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