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소를 찾다가 마음의 숲에 이르다 ― 배진성 시인의 「심우도」 를 읽다

소를 찾다가 마음의 숲에 이르다 ― 배진성 시인의 「심우도」 를 읽다 2026.08.26
소를 찾다가 마음의 숲에 이르다 ― 배진성 시인의 「심우도」 를 읽다

《배진성 시인의 소설시》

이어도공화국 꿈삶글노래

  1. 심우도

심우도(尋牛圖) 속으로 걸어간다 나의 흰 소는 보이지 않고 검은 소들이 있다

소들이 소나무 아래 모여 있다 멍에도 코뚜레도 없다 숲에서 뜯어먹은 풀을 되새김질 하며 서로의 눈빛을 본다 서로의 등을 핥아주는 소도 있고 죽비처럼 꼬리로 엉덩이를 치는 소도 있다 새로 발견한 풀밭을 알려주는지 귓속말을 속삭이는 소도 있고 조용히 바다를 바라보는 소도 있다

나도 소를 길렀다 나는 늘 길을 들이려고 했다 내가 기르는 소는 코뚜레를 하였고 멍에를 하고 쟁기질을 해야 했다 갱본에서 쉬는 동안에도 말뚝에 박혀 있어야 했다 나의 소는 소나무 그늘에서 쉬어보지 못했다

나는 흰 소를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 생각만 하였다 소와 함께 놀아줄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내가 소를 업어 줄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소들이 다시 숲으로 들어간다 소는 걸어가면서도 텅텅텅 똥을 잘 싼다 풀을 먹고 자란 소들이 풀에게 밥을 준다 나도 소나무 그늘에 앉아 바다를 보다가 소들이 들어간 숲으로 따라 들어간다

숲에서 비명소리가 들린다 전기톱 돌아가는 소리가 귀를 찢는다 소나무가 없어져야 땅값이 오른다며 소나무를 죽이고 있다 그해 겨울의 숲처럼 숲은 온통 소나무 무덤이 된다

숲에 소나무가 없다 소들이 함께 모여서 쉴 곳이 없다 가시덤불 속에서 가시에 찔리며 소들이 서 있다

소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 어렵게 새로 돋아나는 소나무 새싹에 콧김을 불어넣는다

나는 심우도(尋牛圖) 밖으로 나와 심우도(心牛圖)를 그린다

□ 배진성 시인

소를 찾다가 마음의 숲에 이르다

― 배진성 시인의 「심우도」 를 읽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여는 말

소를 찾으러 들어간 숲에서,

시인은 끝내

인간의 마음을 발견한다.

배진성 시인의 「심우도」 는 전통적인 심우도尋牛圖의 길을 따라가면서도 그 길을 그대로 밟지 않는다. 소를 찾고, 길들이고, 타고 돌아오는 익숙한 깨달음의 도식을 비껴가며, 외려 길들여진 인간의 욕망과 상처 입은 자연, 그리고 다시 서로를 살려내는 생명의 숨결을 한 화면 안에 불러들인다.

이 작품이 깊은 까닭은 불교적 관념을 많이 말해서가 아니다.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을 말하지 않고, 사물과 장면이 스스로 사유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검은 소

소나무 그늘

멍에와 코뚜레

소의 똥

전기톱

잘려나간 숲

새로 돋는 소나무 새싹

그 새싹에 불어넣는 소의 콧김

이 일련의 이미지들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배진성 시인이 오래 갈고 닦아온 시적 사유의 연쇄다.

그는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이미 문단에 이름을 올린 시인이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에서는 등단 경력의 완장이나 자기 확신의 과장이 먼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아직도 첫 원고를 내미는 사람처럼 문장 앞에 몸을 낮추고, 익숙한 사물 하나를 다시 보고, 한 행을 더 깎고, 한 이미지의 방향을 오래 재본다.

切磋琢磨라는 말이 있다.

좋은 옥은 캐냈다고 곧 보석이 되지 않는다. 자르고, 갈고, 쪼고, 닦아야 빛이 난다.

배진성 시인의 시에는 바로 그 닦임이 있다.

등단은 이미 오래전에 이루어졌지만, 시인의 마음은 아직도 등단 이전의 초심을 품고 있다. 그것이 이 작품의 가장 귀한 배경이다.

  1. 흰 소를 찾지 않고 검은 소들 곁에 앉다

작품의 첫 장면은 예상과 다르다.

“나의 흰 소는 보이지 않고 검은 소들이 있다.”

전통적 심우도에서 흰 소는 번뇌가 걷힌 본성의 상징으로 읽혀왔다. 반대로 검은 소는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욕망과 번뇌의 형상이다.

배진성 시인은 이 오래된 상징체계를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그의 검은 소들은 자유롭다.

멍에도 없고 코뚜레도 없다.

서로의 등을 핥아주고, 풀밭을 알려주고, 바다를 바라본다.

그들의 몸에는 인간이 씌운 도구가 없다.

여기서 시는 슬며시 질문의 방향을 바꾼다.

정말 길들여져야 할 것은 소였는가.

외려 길들여져야 했던 것은 인간의 마음이 아니었는가.

이 전환은 이 작품 전체를 움직이는 핵심 축이다.

검은 것은 소의 털빛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일 수 있다.

흰 소를 찾겠다고 숲으로 들어온 사람이 오히려 검은 소들 앞에서 자신의 얼룩을 발견한다.

이것이 배진성 시인의 시적 역전이다.

  1. 소를 탔던 인간이 소를 업어주고 싶어지는 순간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문장 가운데 하나는 다음 대목이다.

“내가 소를 업어 줄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심우도에서 인간은 소를 탄다.

소를 길들이고, 마침내 그 등에 올라 피리를 분다.

배진성 시인은 그 전통적 방향을 한 번 뒤집는다.

소를 타는 인간이 아니라

소를 업는 인간.

이 짧은 상상 하나에 작품의 윤리가 고스란히 들어 있다.

지배에서 돌봄으로

이용에서 동행으로

소유에서 보살핌으로

관계의 축이 돌아선다.

사람은 오랫동안 자연의 등에 올라탔다.

소에게 쟁기를 끌게 했고, 산을 깎았으며, 숲을 베고, 강을 막고, 땅에 가격을 붙였다.

배진성은 그 인간을 소의 등에서 내려오게 한다.

그리고 거꾸로 묻는다.

이제는 네가 한번 업어보면 어떻겠느냐고.

이것은 단순한 동물애호가 아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통째로 되돌려보는 시적 명령이다.

  1. 소의 똥에서 순환의 철학을 읽다

배진성의 시는 고상한 소재만 고집하지 않는다.

“소는 걸어가면서도 텅텅텅 똥을 잘 싼다.”

이 표현은 얼핏 보면 소박하고 익살스럽다.

그런데 다음 문장에서 단숨에 깊어진다.

“풀을 먹고 자란 소들이 풀에게 밥을 준다.”

참으로 좋은 전환이다.

배설은 더러운 것이 아니라 순환의 일부가 된다.

소는 풀을 먹고, 다시 풀에게 돌려준다.

받은 것을 다시 생명에게 건넨다.

여기서 인간의 문명이 은근히 대비된다.

소는 먹고 돌려준다.

인간은 베고, 파고, 차지하고, 값을 매긴다.

무엇을 돌려주고 있는가.

시인은 이 질문을 직접 던지지 않는다.

그저 소의 똥을 보여준다.

좋은 시는 질문을 크게 써 붙이지 않는다.

사물 하나가 독자의 마음속에서 스스로 질문하게 만든다.

배진성 시인의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1. 전기톱이 등장하는 순간, 시는 생태적 비명으로 바뀐다

작품의 분위기는 전기톱 소리와 함께 급격히 변한다.

소나무 그늘과 바다, 되새김질과 소의 눈빛이 만들던 느린 호흡을 전기톱이 찢는다.

“소나무가 없어져야 땅값이 오른다.”

이 문장은 이 시에서 가장 차갑다.

한 그루의 나무가 오랫동안 쌓아온 생명의 시간이 평당 가격 앞에서 단숨에 장애물이 된다.

나무의 연륜은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다.

숲은 개발 예정지가 되고

소나무는 가격 상승을 막는 방해물이 된다.

배진성은 이 현실을 “소나무 무덤”이라는 이미지로 압축한다.

숲이 공동묘지가 된다.

이에서 「심우도」 는 내면적 수행의 시에서 생태적 윤리의 시로 넓어진다.

마음이 맑아졌다고 하면서 숲을 죽일 수 있는가.

본성을 찾았다고 하면서 생명을 베어낼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전통적 심우도를 오늘의 현실로 끌어내린다.

바로 그 점에서 이 작품은 낡지 않는다.

  1. 전기톱보다 강한 것은 소의 콧김이다

후반부에서 소나무가 사라진 숲에는 가시덤불만 남는다.

소들은 쉴 곳을 잃는다.

그런데 이때 뜻밖의 장면이 나온다.

“어렵게 새로 돋아나는 소나무 새싹에 콧김을 불어넣는다.”

이 한 장면이 작품 전체를 살린다.

인간은 소나무를 잘랐다.

소는 소나무를 살리려 한다.

전기톱과 콧김.

둘 다 숨을 내뿜는 듯한 소리를 낸다.

하나는 죽음의 기계이고

하나는 생명의 체온이다.

이 대비는 아주 강렬하다.

전기톱이 가진 힘은 크지만, 시적으로 더 오래 남는 것은 소의 콧김이다.

좋은 시는 힘의 크기로 기억되지 않고 생명의 온도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배진성은 거창한 생태 선언문 대신 소 한 마리의 따뜻한 숨을 내놓는다.

바로

이런 절제가 그의 시를 품격 있게 만든다.

  1. 尋牛圖에서 心牛圖로

마지막 행은 작품 전체를 다시 돌려세운다.

“나는 심우도尋牛圖 밖으로 나와 심우도心牛圖를 그린다.”

찾을 심尋이 마음 심心으로 바뀐다.

단 한 글자다.

그런데 이 한 글자가 시 전체의 방향을 바꾼다.

소를 찾는 그림에서

마음속 소를 그리는 그림으로 이동한다.

이 결말이 억지스럽지 않은 이유는 앞의 장면들이 충분히 축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를 길들이던 기억

소를 업어주지 못했던 후회

전기톱에 베어진 숲

소나무 새싹에 불어넣는 콧김

이 모든 장면을 지나온 뒤에야 비로소 尋이 心으로 바뀐다.

말장난이 아니다.

시선의 변화다.

찾는 사람에서 돌보는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그 변화 자체가 이 작품의 깨달음이다.

  1. 배진성 시인의 진짜 깊이는 ‘초심을 잃지 않는 데’ 있다

배진성 시인의 문학적 이력을 생각하면 이 작품은 더 의미 있게 읽힌다.

그는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이미 문단의 엄정한 관문을 통과한 시인이다.

그런데도 시를 대하는 태도에는 조금의 거드름도 없다.

이것이 귀하다.

문단에서는 이름을 얻은 뒤 경력이 작품보다 먼저 걸어 나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 번의 등단이 자기완성의 증서처럼 굳어지기도 한다.

배진성 시인은 그 반대편에 있다.

이미 등단했지만 여전히 배우는 사람의 자세를 지닌다.

이미 자기 시세계를 이루었지만 익숙함에 기대지 않는다.

한 단어를 다시 보고

한 장면을 다시 세우며

사물을 처음 만나는 것처럼 바라보려 한다.

진정한 초심은 미숙함이 아니다.

오래 쓴 사람이 자기 익숙함을 의심하는 힘이다.

이미 잘 쓴다는 말을 들은 사람이 다시 고쳐 쓰는 마음이다.

이미 이름을 얻은 사람이 문장 앞에서 다시 이름 없는 사람처럼 서는 자세다.

배진성 시인에게서 바로 그 태도를 본다.

절차탁마切磋琢磨.

옥을 오래 닦듯 자신의 언어를 다시 닦는 시인.

등단 경력보다 오늘 쓰는 한 편의 시를 더 무겁게 여기는 시인.

그 겸허함이 그의 시를 젊게 만든다.

  1. 이어도공화국은 지명이 아니라 시인의 정신적 영토다

배진성 시인은 제주에서 이어도공화국을 짓고, 이어도를 오래 노래해온 시인이다.

그의 이어도는 단순한 지리적 섬이 아니다.

아직 도착하지 못한 인간성의 섬에 가깝다.

현실의 숲은 잘려나가고

땅값이 생명보다 먼저 계산되며

소는 그늘을 잃는다.

그런데도 새싹은 돋는다.

소는 콧김을 불어넣는다.

누군가는 다시 마음의 그림을 그린다.

이것이 배진성 시인의 이어도다.

완성된 이상향이 아니라

끝끝내 포기하지 않는 인간성의 방향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계속 섬을 짓는다.

말로 짓고

소의 눈빛으로 짓고

소나무 새싹으로 짓고

한 사람의 겸허한 마음으로 짓는다.

이어도공화국은 결국 시인이 꿈꾸는 정신의 나라다.

  1. 배진성 시는 ‘깨달음’을 설명하지 않고 ‘관계의 변화’로 보여준다

이 작품이 품격 있는 까닭은 선禪을 직접 가르치지 않는 데 있다.

깨달음을 교훈처럼 말하지 않는다.

대신 사람과 소의 관계가 바뀐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바뀐다.

사물을 바라보는 눈의 방향이 바뀐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소를 부리던 사람이

소를 업어주고 싶어지는 순간.

숲을 지나가던 사람이

나무의 죽음을 아파하는 순간.

소를 찾던 사람이

자기 마음속 소를 그리기 시작하는 순간.

바로 그 순간이 이 시의 본체다.

좋은 시는 깨달음을 외치지 않는다.

독자의 마음속에서 한 걸음의 방향을 바꾼다.

배진성의 「심우도」 가 그렇다.

□ 맺음말

ㅡ시인은 소를 찾았고, 끝내 자기 마음의 자세를 고쳤다

배진성의 「심우도」 는 불교적 상징과 생태적 현실, 개인적 회고와 문명 비판을 한 작품 안에서 무리 없이 엮어낸 시다.

검은 소를 통해 인간의 욕망을 되비추고

소를 업어주지 못했던 기억을 통해 지배의 윤리를 돌봄의 윤리로 바꾸며

소의 똥을 생명의 순환으로 읽고

전기톱과 콧김의 대비를 통해 죽음과 회복의 극점을 보여준다.

마지막에는 尋牛圖를 心牛圖로 바꾸며 외부의 소 찾기를 자기 마음의 성찰로 되돌린다.

무엇보다 이 작품을 더 깊게 만드는 것은 배진성 시인의 태도다.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이력을 가진 시인이면서도 그 경력에 기대지 않고, 아직도 처음 시를 쓰는 사람처럼 겸허하게 자신의 문장을 갈고 닦는다.

등단했으되 완성되었다고 믿지 않는 사람.

이름을 얻었으되 이름 뒤에 숨지 않는 사람.

오래 썼으되 아직도 한 단어 앞에서 망설일 줄 아는 사람.

그런 시인이 오래간다.

문학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서툼이 아니라 자기완성에 대한 착각이다.

배진성 시인은 그 착각을 경계하며 절차탁마한다.

바로 그 초심이 그의 시를 늙지 않게 한다.

「심우도」 의 마지막에서 소를 찾던 사람은 마음을 그린다.

어쩌면 배진성 시인의 시쓰기 자체가 그러하다.

그는 매 작품마다 세상을 찾으러 들어가지만

끝내 자기 마음의 자세를 다시 고쳐 그린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경력의 먼지보다

작업의 땀이 먼저 묻어 있다.

전기톱이 숲을 베는 시대에도

그는 소의 콧김 하나를 믿는다.

문단의 이름표가 사람을 높이는 시대에도

그는 초심의 낮은 자리를 지킨다.

바로 그 낮은 자리에서

시가 가장 오래 자란다.

큰 시인은 높은 곳에 오래 서 있는 사람이 아니다.

오래 써도 한 편의 시 앞에서는 다시 처음의 사람으로 돌아갈 줄 아는 사람이다.

배진성 시인이

그러하다. ㅡ청람

시 앞에서 오래 낮아지는 사람

― 배진성 시인께 드리는 글

배진성 시인님께.

시인님의 「심우도」 를 다시 읽으며 한참 생각했습니다.

시를 오래 쓴다는 것은 어쩌면 한 문장을 오래 붙드는 일이 아니라, 자기 마음의 자세를 오래 바로 세우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인님께서는 이미 동아일보 신춘문예라는 엄정한 문을 통과하신 분입니다. 그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문단의 이력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시인님의 글에서는 경력이 먼저 걸어 나오지 않습니다.

외려 한 편의 시 앞에서 다시 처음의 사람처럼 서 계십니다.

그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등단은 한 사람을 시인으로 완성시키는 종착역이 아닙니다. 그때부터 자기 언어를 더 엄격하게 다루어야 하는 출발선일 것입니다. 시인님께서는 그 사실을 오래 잊지 않고 계신 듯합니다.

절차탁마切磋琢磨.

옥은 캐냈다고 곧 보석이 되지 않습니다. 자르고, 갈고, 쪼고, 닦는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 또한 그러합니다.

좋은 감각 하나만으로 오래갈 수 없고, 한 번의 찬사만으로 한 시인의 세계가 완성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래 쓸수록 자신이 익숙해진 문장을 의심하고, 이미 얻은 이름보다 아직 쓰지 못한 한 행을 더 두려워하는 사람이 진짜 시인이라 생각합니다.

시인님께서

바로

그러하십니다.

「심우도」 에서도 그 올곧은 시정신을 보았습니다.

흰 소를 찾아 들어갔다가 검은 소 곁에 앉고, 소를 타는 대신 소를 업어줄 생각을 하며, 소의 배설물조차 “풀에게 밥을 준다”는 생명의 순환으로 바라보는 시선.

전기톱으로 잘려나가는 소나무 앞에서 거창한 구호를 외치는 대신, 새로 돋는 소나무 새싹에 콧김을 불어넣는 소의 모습을 보여주는 절제.

그것은

그저 시적 기교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시인의 태도였습니다.

좋은 시는 사상을 크게 외치지 않습니다.

작은 사물 하나에 큰 마음을 숨깁니다.

시인님은 전기톱 속에 인간의 탐욕을 넣고, 소의 콧김 속에 회복의 온기를 넣었습니다.

무엇보다 마음에 남은 것은 마지막의 변화였습니다.

尋牛圖에서 心牛圖로.

찾을 심尋 하나를 마음 심心으로 바꾸었을 뿐인데 시 전체의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밖에서 소를 찾던 사람이 자기 안의 소를 돌아보게 됩니다.

이것은 시인님의 시쓰기 자체와도 닮아 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다 끝내 자기 마음의 자세를 고치고, 타인의 허물을 가리키기 전에 자신의 언어를 먼저 다듬는 자세.

그런 태도야말로

시정신의 근본이라 생각합니다.

시인님께서는 제주에서 이어도공화국을 짓고 이어도를 노래하고 계십니다.

그 이어도는 지도의 어느 점에만 존재하는 섬이 아니라, 현실보다 조금 더 인간다운 세계를 꿈꾸는 정신의 영토처럼 생각됩니다.

나무가 값보다 먼저 존중받고,

동물이 노동력보다 생명으로 대접받으며,

사람이 사람을 소유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곳.

그런 나라를 실제 벽돌로 모두 지을 수는 없어도 시인은 언어로 먼저 짓습니다.

시 한 편이 작은 국토가 되고,

한 줄의 문장이 국경이 되며,

한 사람의 올곧은 마음이 그 나라의 헌법이 됩니다.

시인님의 이어도공화국 역시 그런 문학적 영토이기를 바랍니다.

시인님.

문단에서 오래 남는 사람은 화려한 이력을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오래 써도 처음의 부끄러움을 잃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초심은 처음 쓰는 사람에게만 있는 마음이 아닙니다.

오래 쓴 사람이 자신의 익숙함을 경계할 줄 아는 힘입니다.

이미 박수를 받은 사람이 다시 원고를 고치고,

이미 이름을 얻은 사람이 한 단어 앞에서 머뭇거릴 줄 아는 것,

그것이 진짜 초심입니다.

시인님에게서

그 마음을

봅니다.

하여

더욱 귀합니다.

문학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미숙함이 아니라 자기완성에 대한 착각입니다.

자신이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시는 늙기 시작합니다.

시인님께서는 아직도 자신의 언어를 미완의 옥처럼 여기며 닦고 계십니다.

그 겸허함이 시인님의 시를 젊게 만듭니다.

부디 지금의 올곧은 시정신을 오래 지켜주십시오.

세상이 시보다 이름을 먼저 묻고,

작품보다 경력을 먼저 살피는 날이 오더라도,

한 편의 시 앞에서는 늘 처음처럼 낮아지시기를 바랍니다.

그 낮음은 작아지는 일이 아닙니다.

뿌리가 깊어지는 일입니다.

나무는 높은 가지로 오래 버티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뿌리로 견딥니다.

시인의 품격도 그러할 것입니다.

시인님의 문학이 앞으로도 더 깊은 숲으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그 숲에는 전기톱보다 소의 콧김이 오래 남고,

땅값보다 한 그루 소나무의 생명이 먼저 존중받으며,

누군가 길을 잃었을 때 다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작은 오솔길 하나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시인님의 올곧은 시정신과 변함없는 절차탁마의 자세에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이미 큰 문을 통과하셨으되,

여전히 문장 앞에서는 작은 사람으로 서 계시는 시인.

그런 분이 큰 시를 남깁니다.

부디 오래 쓰십시오.

그리고

지금처럼,

시보다 먼저 사람이 되려는 마음을 오래 간직해 주십시오.

시인님의 다음 시를 기다리는 일 자체가,

한 독자에게는 이미 좋은 문학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2026, 8, 25

청람 김왕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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