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우병기 시인의 「가을에 떠났네」 ㅡ 코스모스는 이별의 방향으로 기운다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우병기 시인의 「가을에 떠났네」 ㅡ 코스모스는 이별의 방향으로 기운다 2026.08.26
우병기 시인의 「가을에 떠났네」  ㅡ 코스모스는 이별의 방향으로 기운다

가을에 떠났네

시인 우병기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

인생이라 하였지요

만나서 겹게 두터운 정이 들면

그만큼 헤어짐은 어렵습니다

가을을 밟으며 걷다가

가을을 품고 떠난 사람

다시 만난다는 기약을 나누어도

가슴 가득한 아쉬움

코스모스 가득한 꽃밭 서성이면

그향기가 좀 위로해 줄까요

우병기 시인의 「가을에 떠났네」

ㅡ 코스모스는 이별의 방향으로 기운다

코스모스는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을

한참기억하는 꽃인지도 모른다.

한 번 기울어진 꽃대는 바람이 지나간 뒤에도 쉽게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도 그러하다. 누군가 다녀간 자리에는 보이지 않는 방향이 생기고, 그쪽으로 오래 마음이 기운다. 기억이란 어쩌면 마음속에 생긴 작은 경사인지도 모른다. 한 사람이 떠난 뒤에도 그가 있던 쪽으로 자꾸만 생각이 흘러가는 것, 그것이 이별 뒤의 시간이다.

우병기 시인의 「가을에 떠났네」 는

바로 그 기울어진 마음의 방향을 따라가는 시다.

이 작품에서 가을은 만남과 이별 사이에 놓인 오래된 역이며, 떠난 사람의 체온이 아직 식지 않은 플랫폼이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만나고, 잠시 같은 풍경을 바라보다가, 끝내 서로 다른 열차를 탄다. 떠나는 사람은 멀어지고 남은 사람은 플랫폼에 서 있지만, 진짜 이별은 기차가 떠난 뒤부터 시작된다. 눈앞에서는 사라졌는데 마음속에서는 더 또렷해지는 사람, 부재가 외려 존재를 선명하게 만드는 역설이 이 시의 밑바닥에 흐른다.

특히

“가을을 밟으며 걷다가

가을을 품고 떠난 사람”

이라는 대목은 사람과 계절을 한 몸처럼 겹쳐 놓는다.

가을을 걷는다는 것은 단풍 든 길을 걷는다는 뜻만은 아니다. 익어가는 시간과 스러지는 시간을 동시에 밟고 간다는 뜻이다. 봄이 시작의 문법이라면 가을은 보내는 법을 배우는 계절이다. 익은 열매가 가지에서 떨어지고, 잎이 제 몸의 색을 다 태운 뒤 땅으로 내려가는 때다. 그런 계절 속에서 누군가 떠났다면, 남은 사람에게 그 사람은 한동안 계절 그 자체가 된다. 해마다 바람의 냄새가 달라질 때, 코스모스가 피고 억새가 흔들릴 때, 사람은 계절보다 먼저 한 이름을 떠올리게 된다.

누군가는 가을 속에서 떠나지만, 남은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곧 가을이 되는 것이다.

우병기 시인은 이별을 큰 울음으로 밀어붙이지 않는다. 비탄을 웅변하지도 않는다. 울음 대신 코스모스를 세운다.

이 선택이 이 시의 정서를 한층 깊게 만든다.

코스모스는 화려하게 자신을 주장하는 꽃이 아니다. 가느다란 줄기 위에 몸을 얹고, 바람이 불면 기꺼이 몸을 내준다. 흔들리면서도 꺾이지 않고, 낮아지면서도 꽃을 놓치지 않는다. 어쩌면 이 꽃의 생김새 자체가 이별 뒤의 사람을 닮았다. 마음은 흔들리고 허리는 자꾸 휘어지지만, 그래도 하루를 살아내는 사람의 모습이다.

꽃밭을 서성이는 몸짓 하나에도 상실의 깊이가 있다.

‘서성인다’는 것은 목적지를 잃은 움직임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같은 자리를 맴도는 발걸음이다. 이별 뒤의 마음도 그렇다. 떠난 사람을 따라갈 수도 없고, 아무 일 없던 자리로 돌아갈 수도 없다. 몸은 오늘에 남아 있는데 마음은 자꾸 어제 쪽으로 걸어간다.

코스모스의 흔들림은 꽃의 움직임이면서 동시에 마음의 떨림이다. 바람이 꽃대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떠난 사람의 기억이 꽃밭 전체를 흔드는 듯하다. 꽃밭은 어느 순간 하나의 거대한 기억의 악기가 된다. 바람이 스치면 수백 송이의 꽃이 한꺼번에 떨리고, 그 떨림 속에서 오래 눌러두었던 이름 하나가 소리 없이 되살아난다.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

“그 향기가 좀 위로해 줄까요”

라는 물음도 오래 남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위로해 준다’가 아니라 ‘위로해 줄까요’라고 물었다는 데 있다. 시인은 위로를 단정하지 않는다. 진짜 슬픔 앞에서는 누구도 쉽게 위로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슬픔은 설명한다고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어떤 상실은 수백 마디의 말보다 한 사람의 침묵이 더 깊이 닿는다. 때로는 충고보다 창가의 햇빛 한 조각이 낫고, 격려보다 오래된 찻잔 하나가 낫고, 말없이 흔들리는 꽃 한 송이가 더 큰 위로가 되기도 한다.

코스모스의 향기가 떠난 사람을 다시 데려오지는 못한다. 꽃은 시간을 되돌리는 힘이 없다. 다만 견딜 수 있도록 마음 한쪽에 작은 의자를 놓아준다. 슬픔이 잠시 앉아 숨을 고를 수 있는 자리, 그것이 이 시에서 코스모스가 하는 일이다.

이 시의 미덕은 이별을 비극으로 과장하지 않고 계절의 결 속에 조용히 눕혀 놓은 데 있다. 떠난 사람은 멀어졌지만 향기는 가까워지고, 부재는 오히려 기억을 선명하게 만든다. 사라진 사람의 모습이 시간 속에서 흐려지기는커녕, 어떤 순간에는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이 인간의 기억이다.

그런 점에서 기억은 참 이상한 화가다.

있는 사람보다 없는 사람을 더 오래 그리고, 현재보다 지나간 시간을 더 짙은 색으로 칠한다. 얼굴은 희미해져도 함께 걸었던 길의 온도는 남고, 목소리는 잊혀도 마지막 인사의 억양은 오래 귀에 매달린다.

가을은 잎을 떨어뜨리는 계절이면서 동시에 이름을 오래 붙잡는 계절이다.

나무는 잎을 놓아주지만 사람은 기억을 쉽게 놓지 못한다. 자연은 떠나는 법을 알고 있는데 사람의 마음은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어쩌면 가을의 쓸쓸함은 낙엽 때문이 아니라, 떠나보내는 법을 아직 다 배우지 못한 인간의 마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병기 시인의 「가을에 떠났네」 는 그 인간적인 미숙함과 따뜻함을 코스모스 한 송이의 흔들림 속에 담아낸다.

이 시에서 코스모스는 꽃이면서 동시에 작은 편지다. 주소는 없고 우표도 없지만, 바람이 불 때마다 떠난 사람에게 보내는 안부가 된다. 답장은 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꽃은 계속 흔들린다.

그 흔들림이 곧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돌아오라는 명령이 아니다. 한때 같은 시간을 걸었던 사람을 오래 기억하는 마음의 예의다. 만나서 정이 깊어질수록 헤어짐이 어렵다는 시의 첫 고백도 결국 그 예의에서 비롯된다. 쉽게 잊지 못한다는 것은 약함이 아니라, 그만큼 진심으로 함께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떠난 사람은 시간 저편으로 멀어졌어도 그가 남긴 계절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어느 해 가을,

길가의 코스모스가 유난히 많이 흔들린다면 그것은 바람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마음속에서 아직 끝나지 않은 작별 하나가 꽃밭을 지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꽃은 말이 없는데

그 앞에 서면

떠난 사람의 목소리가 더 잘 들린다”

우병기 시인의 「가을에 떠났네」 는 바로 그 역설의 자리에서 머문다.

떠남을 말하면서도 남아 있는 것들을 보여주고, 헤어짐을 말하면서도 한때의 만남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되돌려 보여준다. 결국 이 시가 건네는 가장 큰 위로는 잊으라는 말이 아니다.

기억해도 괜찮다는 것.

가끔 꽃밭을 서성이며 한 사람의 이름을 오래 품어도 괜찮다는 것.

가을은

그렇게 사람을 떠나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사람을 마음속에 다시 피워 놓는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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