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당신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 세상에서 가장 늦게 도착하는 편지 ㅡ청람 김왕식

당신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 세상에서 가장 늦게 도착하는 편지 2026.08.26
당신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 세상에서 가장 늦게 도착하는 편지

당신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 세상에서 가장 늦게 도착하는 편지

청람 김왕식

어머니는 자식이 돌아오는 소리를

발자국보다 먼저 알아들었다

대문이 열리기도 전에

부엌의 불을 한 번 더 살피고

찬밥 위에 물을 조금 뿌려

다시 따뜻하게 데웠다

자식은 몰랐다

자신이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누군가는 하루 종일

한 사람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밥은 먹었니”

세상에는 이보다 짧고

이보다 깊은 사랑이 드물다

어머니는 보고 싶다는 말을

밥이라는 말로 바꾸어 살았다

춥지 않느냐는 말 속에

자신의 겨울을 접어 넣었고

잘 자라는 말 한마디에

남은 생의 기도를 모두 넣었다

자식이 아프면

대신 아플 수 없어 울었고

자식이 넘어지면

대신 넘어질 수 없어

밤새 천장을 바라보았다

세월은 이상하다

받을 때는 작은 것이

잃고 나면 세상에서 가장 크게 보인다

어머니가 건네던 사과 한 쪽

아버지가 말없이 밀어놓던 용돈

형제가 밥상 밑에서 건드리던 발끝

오래된 친구의 짧은 전화 한 통

그때는 너무 가까이 있어서

사랑인 줄 몰랐다

사람은 별을 멀리서 찾으면서

제 곁의 등불을 자주 잊는다

어느 날

그 등불 하나가 꺼지고 나서야

그 작은 빛이

얼마나 먼 곳까지 비추고 있었는지 보게 된다

아버지는 늙어가면서

말이 줄었다

자식에게 줄 것이

점점 없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마지막에는

용돈도 힘도 충고도 다 내려놓고

전화기 너머로 한마디만 남긴다

“건강해라”

그 말은

평생 자신이 쓰지 못한 사랑이라는 글자의

마지막 획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살아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한 사람의 하루를 견디게 했던 존재

전화 한 번 받는 것만으로

누군가의 저녁을 밝히고

“잘 지내”

그 한마디만으로

어떤 사람의 긴 겨울에

작은 난로 하나를 놓아주던 존재

그런데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귀한 사람인지 모르고 산다

세상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누군가에게 짐이 된다고 생각하고

가진 것이 없다고 부끄러워하기도 한다

모른다

한 사람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게는

오늘을 견디는 이유가 된다는 것을

할머니에게 손주는

세상에서 가장 늦게 피어난 봄이었고

늙은 아버지에게 자식은

아직 꺼뜨릴 수 없는 창문의 불빛이었다

친구에게 친구는

아무 말 없이도 찾아갈 수 있는

세상 마지막 의자 하나였다

부부에게 서로는

젊음이 다 지나간 뒤에도

같은 약봉지를 챙겨주는

가장 오래된 편지였다

사랑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물을 한 잔 따라주는 일

먼저 문을 잡아주는 일

늦은 밤

집에 잘 들어갔느냐고 묻는 일

아픈 사람에게

대답을 요구하지 않고 곁을 내주는 일

누군가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일

그 작은 것들이 모여

사람 하나를 살게 한다

인생의 마지막에 남는 것은

얼마나 높이 올라갔는가가 아닐 것이다

누구의 손을 잡아주었는가

누구의 눈물을 닦아주었는가

누군가 외로울 때

그 곁의 빈 의자가 되어주었는가

아마 그것일 것이다

어느 날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뒤

서랍 속에서 오래된 물건 하나를 발견할 때가 있다

빛바랜 수건

구겨진 영수증

낡은 안경

몇 번이나 접힌 메모

별것 아닌 것들 앞에서

사람은 주저앉는다

사랑은 떠난 뒤에야

자신의 크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살아 있을 때는

너무 평범해서 보이지 않았던 하루가

사라지고 나면

다시는 살 수 없는

한 생의 가장 아름다운 날이 된다

그러니

오늘 곁에 있는 사람을

너무 익숙하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밥을 먹고 있는 어머니를

한 번 더 바라보고

신문을 넘기는 아버지의 손을

한 번 더 기억하고

함께 늙어가는 사람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고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 이름을 불러주었으면 좋겠다

사랑한다는 말이 어렵다면

“밥 먹었니”

그 한마디면 충분하다

보고 싶다는 말이 쑥스럽다면

“잘 지내지”

그 한마디면 충분하다

사람에게는

거창한 구원이 필요한 것이 아닐 때가 많다

잊히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하나

세상 어딘가에

자신의 이름을 따뜻하게 불러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하나면

또 하루를 살아낼 수 있다

언젠가 우리 모두

서로의 곁에서 떠날 것이다

그때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집도

돈도

이름도

훈장도

책도

옷도

모두 이곳에 두고 간다

다만 한 가지

누군가의 가슴에 남겨놓은 온기는

떠난 뒤에도 오래 살아남는다

그 사람이 웃을 때

조금 따라 웃고

그 사람이 힘들 때

어디선가 손 하나 내밀어주는 기억이 된다

사람은 그렇게

사라지고도 남는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한 어머니가 자식에게 묻는다

“밥은 먹었니”

한 아버지가 전화를 끊으며 말한다

“몸조심해라”

늙은 부부가

말없이 서로의 약을 챙겨놓는다

어린아이가

주름진 할머니의 손을 잡는다

세상은 거대한 사랑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아무도 기록하지 않는

작고 따뜻한 손길들 때문에

무너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혹시 오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면

가만히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누군가에게

당신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사람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

당신의 전화 한 통은

하루 종일 기다린 소식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

당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가

세상에서 가장 큰 위로일 수 있다

그러니 오래 살아주기를

잘나서가 아니라

성공해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이루어서가 아니라

그저 당신이라서

어딘가에서

당신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부르는 사람이 아직 있으므로

오늘도 밥 한 숟갈 더 먹고

창문을 한 번 열고

따뜻한 햇빛 쪽으로 얼굴을 돌려주기를

그리고 곁에 사람이 있다면

그 손을 조금 더 오래 잡아주기를

언젠가 놓아야 할 손이기에

오늘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이

이미 기적이므로

사랑은

떠난 뒤에 우는 일이 아니라

곁에 있을 때

한 번 더 바라보는 일이다

한 번 더 이름을 불러주는 일이다

한 번 더 밥을 챙겨주는 일이다

그리고 아무 조건 없이

당신이 살아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마음속으로

오래 말해주는 일이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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