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고이 간직한다는 것에 대하여 ㅡ청람 김왕식

고이 간직한다는 것에 대하여 2026.09.05
고이 간직한다는 것에 대하여

고이 간직한다는 것에 대하여

귀한 것일수록 고이 간직해야 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고이’라는 말이 때로 삶을 멈추게 하는 데 있다.

아끼는 찻잔이라 깨질까 두려워 찬장 가장 깊은 곳에 넣어둔다.

좋은 옷은 특별한 날 입겠다며 비닐도 벗기지 않는다.

귀한 술은 좋은 사람이 오면 마시겠다며 봉인을 풀지 않는다.

그 특별한 날이 끝내 오지 않으면, 찻잔은 한 번도 입술의 온기를 만나지 못하고 옷은 사람의 체온을 모르며 술은 병 속에서 제 생을 다한다.

그것을 ‘보존’이라고 부른다.

어쩌면 어떤 보존은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완성되는 또 하나의 폐기인지도 모른다.

사람의 마음도 다르지 않다.

사랑을 너무 귀하게 여겨 표현하지 않고

감사를 너무 깊이 품어 말하지 않으며

미안함을 가슴에만 묻어둔다.

“언젠가 말해야지.”

그 언젠가가 오기 전에 사람이 먼저 떠나기도 한다.

그때 비로소 알게 된다.

마음속에 고이 간직한 사랑은 상대에게는 사랑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전하지 않은 사랑은

사랑한 사람에게 닿지 못한 채

소유한 사람의 마음속에서만 빛났기 때문이다.

몸도 마찬가지다.

고급 시트가 깔린 푹신한 침대에 몸을 눕힌다.

편안하다.

몸을 깊숙이 파묻는다.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

처음에는 휴식이다.

한 시간이 지나고

하루가 지나고

몸이 움직임을 잊기 시작하면

그 푹신함은 더 이상 휴식이 아니다.

가장 편안한 침대가

몸을 상하게 하는 자리가 된다.

욕창은 딱딱한 바닥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너무 편안한 곳에서도 생긴다.

이것은 삶의 묘한 역설이다.

우리를 가장 많이 상하게 하는 것이

언제나 고통만은 아니다.

지나친 보호도 사람을 약하게 하고

지나친 안락도 몸을 무너뜨리며

지나친 소유도 사물을 죽게 만든다.

배는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때 가장 안전하다.

배에 흠집도 덜 난다.

그렇다고 배를 항구에만 묶어 둔다면

그 배는 가장 안전한 방식으로

배의 존재 이유를 잃는다.

칼은 칼집에 넣어 보호한다.

한 번도 꺼내지 않으면 녹이 슨다.

책은 훼손될까 두려워 펼치지 않으면

종이는 보존될지 몰라도

그 안의 사상은 한 사람의 생에도 참여하지 못한다.

씨앗도 마찬가지다.

귀한 씨앗이라며 금고에 넣어두면

썩지 않을 수는 있다.

꽃도 피지 않는다.

씨앗에게 가장 안전한 곳은 금고일지 모르지만

씨앗에게 가장 충실한 곳은 흙이다.

흙 속에서는 껍질이 찢어진다.

몸이 갈라진다.

제 모습을 잃는다.

그 상처를 통과해야 싹이 된다.

삶도 이와 같다.

간직한다는 것은

움켜쥐는 일이 아니라

제때 세상 속으로 내어놓는 일이어야 한다.

귀한 것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귀하게 사용해야 한다.

사랑은 말해야 하고

감사는 표현해야 하며

재능은 써야 하고

지식은 나누어야 하며

몸은 움직여야 한다.

좋은 그릇에는 음식을 담아야 하고

좋은 신발은 길 위에서 닳아야 하며

좋은 펜은 종이 위에서 잉크를 잃어야 한다.

닳지 않는 것이 반드시 잘 간직된 것은 아니다.

한 번도 쓰이지 않은 물건보다

제 몫을 다하고 닳아버린 물건이

더 충만한 생을 살았을 수도 있다.

人盡其才 物盡其用

사람은 재능을 다하고

사물은 쓰임을 다할 때

비로소 존재의 값이 드러난다.

고이 간직한다는 말을 다시 생각한다.

상자 깊숙이 넣어두는 것이 간직함이 아니라

그것이 가진 가장 아름다운 쓰임을 다하게 하는 것.

사람도 그렇고

시간도 그렇고

사랑도 그렇다.

인생에서 가장 아까운 것은

닳아버린 것이 아니다.

아끼느라

한 번도 제대로 써보지 못한 것이다.

꽃은 피었다 지기에 아름답고

촛불은 자신을 줄이며 빛을 내며

삶은 조금씩 소진되면서 의미를 얻는다.

그러므로 삶의 지혜는

상하지 않게 보존하는 데만 있지 않다.

상할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고

닳을 것을 알면서도 사용하고

헤어질 것을 알면서도 마음을 주는 데 있다.

고이 간직한다는 것은

숨겨두는 일이 아니다.

가장 귀한 것이

가장 귀하게 쓰이도록 내어주는 일이다.

푹신한 침대에 누워 몸을 지키는 사람보다

때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 걸음 내딛는 사람이

자신을 더 잘 보살피고 있는지도 모른다.

삶에는 움직이지 않아서 생기는 상처가 있다.

몸에는 욕창이 생기고

마음에는 미련이 생기며

사랑에는 후회가 생긴다.

귀한 것을 지키고 싶은가.

그렇다면 숨기지 말아야 한다.

살게 해야 한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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