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어매 말씀은 흙냄새 같더라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어매 말씀은 흙냄새 같더라 2025.10.21
어매 말씀은 흙냄새 같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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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매 말씀은 흙냄새 같더라

청람 김왕식

아들아, 세상은 말로 사는 게 아녀. 땅 밟고, 흙 만지고, 바람 맞으며 사는 거여. 하늘만 쳐다보다가는 발 밑 돌부리에 걸리고, 사람만 쳐다보다가는 제 얼굴 잃는다.

세수는 물로 하는 게 아니라, 밤새 묵은 마음의 먼지를 닦는 거여. 낯 닦고 나면 거울 속에 어제보다 환한 내가 보이지. 그게 새날 맞는 첫 기도여.

밥은 배고파서만 짓는 게 아녀, 사람 사는 향기를 지피는 거여. 불이 세면 밥이 타고, 불이 약하면 밥이 설어. 살이란 것도 그 불조절 같어라. 너무 뜨거우면 남 타고, 너무 차가우면 스스로 얼지.

봄엔 고추 심고, 여름엔 잡초 뽑고, 가을엔 낟알 거두고, 겨울엔 묵은 김치 꺼내지. 철 따라 사는 게 자연이고, 그 자연 따라 사는 게 사람의 길이여. 한철 건너뛰면 그 다음 해에 꼭 대가를 치른다.

까치가 지붕에 집을 지으면 그 집엔 웃음이 들고, 참새가 낮게 날면 비가 올 징조란다. 세상 일 다 눈치껏 돌아가니, 너무 고집부리지 말고 흐름을 보거라.

사람도 나무 같어라. 곧은 놈은 울타리로, 휘어진 놈은 의자다리로, 옹이진 놈은 장독대 받침으로 쓰인다. 쓸모없는 인생은 없다. 다만 제자리를 못 찾은 거지.

아들아, 세상에 잘난 놈, 못난 놈은 없어. 손에 흙 묻혀 일하는 놈이 있어야 깨끗한 옷 입은 놈이 밥을 먹는다. 서로 기대야 둥글게 굴러가는 게 인생이여.

말이 많으면 복이 새고, 웃음이 많으면 복이 들고, 성내는 놈은 바람이 되어 흩어진다. 참아라, 참음이 밭고랑을 만든다. 그 밭에서 네 삶이 여문다.

하늘은 늘 멀리 있고, 사람의 길은 발밑에 있다. 너무 큰 꿈만 좇지 말고 지금 눈앞의 일에 정성을 다해라. 그게 하늘이 주는 복의 길머리여.

남의 눈물로 이익 보지 마라. 그 물이 돌아서 네 집 처마를 적신다. 네가 한번 웃게 하믄 그 웃음이 먼 훗날 네 자식 품에 돌아온다. 세상은 언제나 돌고 또 돌제.

아들아, 어매는 글을 몰라도 세상을 다 읽었다. 별이 뜰 때면 “오늘도 하루 잘 갔다” 하시고, 해 뜰 때면 “이제 다시 살아야지” 하셨지. 그 소리 들으며 자란 나는 지금도 그 말이 내 등짝을 밀어준다.

살다 보면 눈보라도 치고, 비도 억수같이 퍼붓겠지. 그래도 뿌리 깊은 나무는 한 번도 쓰러진 적이 없단다.

아들아, 하루라도 고운 맘 잃지 말고, 한 끼라도 감사히 먹어라. 그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여.

어매 말 끝엔 늘 바람이 실려 있었지. 그 바람 속엔 흙냄새 같은 지혜가 스며 있었고, 지혜 속엔 너를 향한 오래된 사랑이 숨 쉬고 있더라.

ㅡ청람

엄니 말씀은 바람 같았지라

김왕식

엄니, 이제야 알겄어요. 세상은 말로 사는 게 아니라 숨 고르고, 땅 밟고, 바람 맞으며 사는 거라는 걸요. 어릴 땐 그저 무심히 듣던 말씀들이 이젠 제 가슴 한켠에서 자꾸 되살아납니다.

“세수허는 건 남 보라고 허는 게 아녀.” 그 말, 예전엔 흘려들었는데 이제는 알겠어요. 그건 하루 묵은 마음의 먼지를 닦으라는 뜻이었지요. 낯 닦듯이 마음도 닦아야 하루가 새로워진다는 걸, 이제서야 깨닫습니다.

밥 짓는 불 앞에서 엄니는 늘 조심스러웠지요. “불이 세면 밥이 타고, 약하면 밥이 설어.” 그 말이 인생이더군요. 너무 뜨겁게 살면 남을 태우고, 너무 식으면 자기 마음이 얼어붙는다는 걸요.

봄이면 고추 모종을 손끝으로 일으키고, 여름이면 잡초 뽑으며 땀을 닦던 모습, 가을이면 낟알 한 톨 허투루 흘리지 않으시고, 겨울이면 묵은 김치 꺼내 된장국에 넣어주시던 손맛— 그 손이 제 세상의 기준이 되었어요.

까치가 지붕에 둥지 틀면 “복이 든다” 하시던 그 웃음, 이제는 그 까치가 제 마음에도 앉아 있습니다. 세상 일에 괜한 건 하나 없다 하셨죠. 말 한마디, 발걸음 하나에도 뜻이 있다는 걸요.

사람도 나무 같다고 하셨지요. 곧은 놈은 울타리, 휘어진 놈은 의자다리, 옹이진 놈은 장독 받침— 그 말씀 덕분에, 부끄러웠던 제 결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엄니, 그때는 몰랐어요. 흙 묻은 손으로 밥상 차리며 “이 세상은 서로 기대야 굴러가는 거여.” 하시던 그 말이 이토록 큰 철학인 줄을요.

남의 눈물 밟지 말라던 말씀도, 이제 제 발등에 돌아와 뜨겁게 새겨졌습니다. 그 한마디가 세상 윤리의 뿌리였다는 걸요. 세상은 메말라 보여도 끝내 공평하다는 걸요.

하늘만 쳐다보다 돌부리에 걸릴 때마다 엄니 얼굴이 떠오릅니다. “발밑도 봐야 혀, 땅 밟는 놈이 복 받는 거여.” 그 말이 제 평생의 나침반이 되었습니다.

엄니, 그때는 그저 촌스럽다 여겼던 말투가 이제는 가장 고운 시가 되어 제 귀에 남습니다. 해 뜰 때마다 새 삶을 주신 그 기도, 별 뜰 때마다 고맙다고 중얼거리던 그 음성— 이제는 제 기도 속에도 스며 있습니다.

살다 보니, 눈보라도 맞고 비바람도 쏟아지지만 엄니 말대로 뿌리 깊은 나무는 한 번도 쓰러지지 않네요. 그 뿌리가 바로 엄니였어요.

엄니, 하루라도 고운 마음 잃지 않으려 합니다. 밥 한 끼에도 감사하려 합니다. 그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라 엄니가 가르쳐주셨잖아요.

이제야 그 뜻을 압니다. 엄니 말씀은 바람이었고, 그 바람은 흙냄새였으며, 그 흙냄새 속엔 아들 향한 오래된 사랑이 숨 쉬고 있었네요.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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