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이상엽 시인의 시 《의사 2》 ㅡ청람 김왕식

이상엽 시인의 시 《의사 2》 2026.04.06
이상엽 시인의 시 《의사 2》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이상엽 시인

의사 2

시인 이상엽

수십 해 하얀 가운 속에서 같은 말을 되새겨왔다

칼보다 먼저 깊어져야 할 것은 배움이었다

끝내 알지 못할 몸 앞에서 끝까지 배우려는 마음 그것이 첫째였다

다음은 손이 아니라 가슴이었다

환자의 맥박이 흔들릴 때 너의 심장도 함께 흔들리고 그 밤 홀로 눈물 한 방울 흘릴 줄 아는 사람

그 사람이 비로소 의사였다

환자는 타인이 아니다 돌아갈 수 없는 너의 가족이다

결정을 앞에 두고 잠시 멈추어라

이 사람이 나의 어머니라면 나의 아버지라면 나의 아이라면

그 물음 하나가 길이 된다

의사는 치료하는 사람이 아니라 맡겨진 생을 잠시 지켜보는 사람

보이지 않는 손이 맡긴 일을 대신하는 조용한 심부름꾼이다

그래서 더 낮아져야 하고 더 깊어져야 한다

끝없는 공부와 식지 않는 마음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눈물이 한 몸이 될 때

그때 비로소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된다

가슴과 손 사이에서 완성되는 존재 — 이상엽 시인의 시 《의사 2》를 읽는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하얀 가운이라는 상징은 이 시에서 단순한 직업의 표식이 아니라, 한 인간이 평생 감당해야 할 윤리의 무게로 서 있다. “수십 해 / … 같은 말을 되새겨왔다”는 첫 구절은 시간의 축적을 통해 형성된 신념의 깊이를 드러낸다. 이는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삶으로 검증된 언어라는 점에서 이미 신뢰를 획득한다.

이 작품의 구조는 명확하다. ‘배움’과 ‘가슴’이라는 두 축이 서로를 지탱하며 의사의 본질을 구성한다. “칼보다 먼저 / 깊어져야 할 것은 / 배움이었다”는 구절은 기술 이전에 태도의 문제를 제기한다. 여기서 ‘칼’은 외과적 능력의 상징이지만, 시는 그것을 앞세우지 않는다. 외려 알 수 없음 앞에서 끝까지 배우려는 자세를 강조하며,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허함을 의사의 출발점으로 제시한다.

이어지는 전환은 더욱 인상적이다. “손이 아니라 / 가슴이었다”는 단정은 이 시의 중심축을 명확히 세운다. 치료의 행위가 기술적 손놀림에 머무르지 않고, 감정의 깊이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선언한다. 특히 “환자의 맥박이 흔들릴 때 / 너의 심장도 함께 흔들리고”라는 구절은 의사의 감응 능력을 가장 시적으로 형상화한 대목이다. 여기서 의사는 관찰자가 아니라, 함께 흔들리는 존재로 자리한다.

이 시가 돋보이는 지점은 윤리적 판단을 감정의 영역으로 환원하지 않는 데 있다. “이 사람이 / 나의 어머니라면 …”으로 이어지는 질문은 감정에 머무르지 않고, 결정의 기준으로 기능한다. 이는 의학적 판단과 인간적 윤리를 하나로 묶는 장치로 작동하며, 시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문장으로 자리 잡는다. 판단의 순간마다 반복될 이 질문은 곧 의사의 내면에 세워진 나침반이다.

또한 “맡겨진 생을 / 잠시 지켜보는 사람”이라는 인식은 의사의 위치를 근본적으로 낮춘다. 치료의 주체가 아닌, 생을 ‘지켜보는’ 존재로 규정함으로써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동시에 책임의 무게를 더욱 깊게 만든다. 이어지는 “심부름꾼”이라는 표현은 종교적 울림을 지니면서도, 직업적 오만을 철저히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이 겸손의 언어는 시를 단단하게 만든다.

형식적으로도 이 시는 절제를 유지한다. 불필요한 수식 없이 짧은 행으로 의미를 밀어붙이며, 각 구절이 하나의 단정처럼 기능한다. 특히 마지막 연에서 “차가운 이성과 / 뜨거운 눈물이 / 한 몸이 될 때”라는 대비 구조는 이 시의 미학적 정점을 이룬다. 이성과 감정이라는 대립 항이 하나로 결합되는 순간, 의사는 비로소 완성된 존재로 제시된다.

이 작품은 의사를 이상화하지 않는다. 인간의 한계를 전제로 하면서, 그 한계 속에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묻는다. 그래서 이 시는 직업을 노래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의 존재 방식에 대한 성찰로 확장된다.

이 시가 남기는 것은 하나의 명제다. “의사는 기술로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라, 끝없이 배우고 끝내 흔들리는 마음으로 완성되는 존재라는 것.”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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