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주광일의 《봄 엽서 44》 ㅡ청람 김왕식
시인 주광일의 《봄 엽서 44》 2026.04.30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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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엽서 44
시인 주광일
꽃잎 피고 졌을 뿐 밋밋하고 무덤덤하게 흘러버린 4월이 떠나는 길목에 누군가 5월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엉크러 져 버린 이 땅에 통쾌한 기적의 꽃을 피우기 위하여 5월이 긴장한 표정으로 대기하고 있습니다.
202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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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의 끝에서, 오월을 부르는 긴장 — 「봄 엽서 44」를 다시 읽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사월은 지나갔다. 그러나 이 시에서 사월은 계절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한 시대의 얼굴로 남는다. “꽃잎 피고 졌을 뿐”이라는 담담한 문장은 자연의 순환을 말하는 듯하지만, 그 이면에는 허망하게 흘러간 시간에 대한 깊은 인식이 깔려 있다. 화려했으되 붙잡을 수 없었던 시간, 그 공허가 “밋밋하고 무덤덤하게”라는 절제된 언어로 응축된다.
이 작품의 시선은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사월이 물러나는 ‘길목’에서, 시인은 이미 다음을 향해 서 있다. “누군가 5월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는 문장은 개인을 지우고 공동의 시간으로 확장된다. 여기서의 기다림은 감상적 기대가 아니라, 오래 견뎌온 이들이 공유하는 긴장이다.
특히 “모든 것이 엉크러 져 버린 이 땅”이라는 구절은 단순한 비유로 읽히지 않는다. 그것은 지난 몇 해 동안 우리가 통과해 온 현실, 정치적 혼란과 가치의 전도 속에서 방향을 잃은 사회에 대한 인식이 압축된 표현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 혼란을 직접적으로 외치지 않는다. 대신 절제된 언어로, 무너진 질서를 바라보는 깊은 통탄을 담아낸다.
이 절제는 우연이 아니다. 한평생 법조인으로서 파사현정의 삶을 살아온 시인의 태도가 그대로 언어에 스며 있다. 80대 노구로 광화문을 지키며 시대의 혼란을 온몸으로 견뎌낸 애국시인의 내면이, 이 짧은 문장 속에서 조용히 떨린다. 격한 분노 대신 낮은 목소리, 직접적인 선언 대신 압축된 상징. 그것이 외려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통쾌한 기적의 꽃”이라는 표현은 이 시의 정점이다. 무너진 현실 위에 피어날 변화의 가능성. 그러나 그 기적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긴장한 표정으로 대기하고 있다”는 구절에서 드러나듯, 그것은 준비된 시간으로 존재한다. 오월은 희망의 계절이 아니라, 견딘 자만이 맞이할 수 있는 시간이다.
이 시의 미덕은 분명하다. 절망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외면하지 않는 태도, 희망을 단정하지 않으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시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짧은 문장 안에 응축해 내는 절제의 미학이다.
여기에 이르면, 이 작품이 놓인 자리 또한 새롭게 보인다. 「겨울 엽서」 83편에 이어 「봄 엽서」로 이어지는 이 연작은 단순한 계절의 순환을 기록한 시편이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살아온 80여 년의 시간을 따라 흐르는 내면의 연대기이며, 삶의 태도가 언어로 굳어진 증언이다. 겨울의 견딤과 봄의 기척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삶 속에서 이어져 온 흔적들이다.
그래서 이 시에서의 사월은 단지 한 달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 전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오월은 다가올 계절이 아니라, 그 시간을 통과해 온 사람이 맞이하게 되는 또 하나의 삶의 단계다.
이 작품은 한 편의 계절시가 아니다. 그것은 한 시대를 통과한 인간의 자세이며, 혼란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으려는 내면의 기록이다.
오월은 기다림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준비된 삶이 맞이하는 시간이다.
—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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