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언 시인의 시 「2026 지구의 현주소」를 읽다
박철언 시인의 시 「2026 지구의 현주소」를 읽다 2026.05.02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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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지구의 현주소
시인 青民 박철언
호르무즈의 목 움켜쥐고 세계를 뒤흔드는 거대 권력의 화살표
날마다 상공으로 치솟는 야욕들 날마다 해저로 곤두박질치는 약속들 이란 미국 이스라엘 소련 우크라이나 중국 평화의 이름으로 얽혀 숨어든 전쟁과 갈등 이권과 눈치 보기로 어지러운 지구
봉쇄냐 해제냐 밀고 당기는 줄 위 오늘도 둥글게 돌아야 하는 파랗게 질린 지구의 호흡
우주 속 작고 푸른 별 지구 이토록 작은 동북아의 분단국이지만 10위권 경제에 K-문화예술로 우뚝 서서 자유민주평화의 별자리 지켜 더욱 빛났으면
신의와 진실이 사라진 듯한 지구별에 정의의 이름으로 평화가 뿌리내려 모두가 자유롭고 따뜻해졌으면
지구의 현주소 어디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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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열의 행성 위에 세운 양심의 좌표 — 박철언 시인의 시 「2026 지구의 현주소」를 읽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지구는 더 이상 둥근 형태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이 시에 이르면 지구는 움켜쥐어진 목이며, 흔들리는 호흡이며, 눈치와 이해관계 속에 찢긴 지도다. 시인은 ‘호르무즈의 목’을 잡아당기는 힘에서 출발하여, 세계 질서의 긴장과 불균형을 단숨에 압축한다. 지정학적 요충지는 더 이상 지리의 문제가 아니라, 욕망이 통과하는 좁은 통로가 된다. 그 통로를 쥔 손은 보이지 않지만, 그 압박은 분명하게 감지된다.
이 작품의 중심은 사건의 나열이 아니다. 그것은 ‘추락하는 약속’과 ‘치솟는 야욕’이라는 대비적 이미지에 있다. 상공으로 솟는 것은 권력의 의지이고, 해저로 가라앉는 것은 신뢰의 잔해다. 위로 향하는 것과 아래로 떨어지는 것 사이, 인류의 윤리는 공중에 유예된 채 방향을 잃는다. 이 간극이 바로 시가 포착한 2026년의 본질이다.
국가들의 이름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다. 그것들은 각각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이해관계의 벡터이며, 서로 다른 명분을 두른 채 충돌하는 의지의 표식이다. “평화의 이름으로 얽혀 숨어든 전쟁”이라는 구절은 이 시대의 가장 날카로운 역설을 드러낸다.
평화는 더 이상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소비되고, 정의는 때로 전략의 가면이 된다. 시인은 이를 과장하지 않는다. 외려 담담하게 병치함으로써, 독자가 스스로 불편한 진실을 직면하게 만든다.
이 시의 미학은 ‘균형 위의 불안’에 있다. “봉쇄냐 해제냐 밀고 당기는 줄 위”라는 표현은 지구 전체가 하나의 외줄 위에 놓여 있음을 암시한다. 그 위에서 인류는 아직도 중심을 잡지 못한다. 그럼에도 지구는 “오늘도 둥글게 돌아야 하는” 운명을 가진다. 여기서 둥글다는 것은 단순한 형태가 아니라, 멈출 수 없는 생명의 지속이다. 시인은 그 지속의 이면에 숨겨진 ‘파랗게 질린 호흡’을 포착한다. 생명은 이어지지만, 그 숨은 점점 얕아진다.
주목할 지점은 시의 후반부에서 나타나는 시선의 이동이다. 거대 권력의 충돌에서 출발한 시선이, 갑자기 ‘동북아의 작은 분단국’으로 수렴된다. 이 전환은 축소가 아니라 응축이다. 세계의 균열이 한반도라는 공간에 농축되어 있음을 암시하며, 동시에 그 안에서 피어나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경제와 문화의 성취를 단순한 자부심으로 소비하지 않고, ‘자유민주평화의 별자리’라는 윤리적 좌표로 이끌어 올린다. 이때 한국은 단순한 국가가 아니라, 가치의 실험장이 된다.
박철언 시인의 삶을 떠올리면, 이 시의 무게는 더욱 선명해진다. 한평생을 정치가로, 공직자로, 법조인으로 살아온 시간은 단순한 경력이 아니라 ‘현실의 내부를 통과한 경험’이다. 그 경험이 이 시에서 언어로 변환될 때, 추상은 구체를 얻고, 선언은 책임을 갖는다. 세계 평화를 말하는 많은 목소리와 달리, 이 시의 발화는 실천의 기억 위에 서 있다. 하여, 그의 언어는 과장되지 않으며, 외려 절제 속에서 신뢰를 획득한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질문을 남긴다. “지구의 현주소 어디쯤일까.” 이 물음은 좌표를 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방향을 묻는 질문이다.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가 아니라,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를 묻는다. 이 질문 앞에서 독자는 방관자의 자리를 잃는다. 각자의 삶이 이미 그 좌표 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 시가 남기는 울림은 거창한 해결책이 아니다. 대신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신의와 진실”이라는 오래된 가치가 사라진 듯 보이는 시대에도, 그것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라는 믿음이다. 시인은 그것을 선언하지 않고, 조용히 되살려 놓는다. 정의의 이름으로 평화가 뿌리내리기를 바라는 마지막 기도는, 이상이 아니라 인간이 끝내 포기할 수 없는 최소한의 윤리다.
이 작품은 하나의 지도다. 국경과 영토를 표시한 지도가 아니라, 양심과 책임의 위치를 새겨 넣은 지도다. 그 지도 위에서 지구는 여전히 작고 푸른 별로 남아 있다. 다만 그 푸름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시인은 가장 절제된 방식으로 증언한다.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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