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형만 시인의 《초여름》을 읽으며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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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
시인 허형만
물냄새 비가 오려나 보다
나뭇잎 쏠리는 그림자
바람결 따라 흔들리고
애기똥풀에 코를 박은 모시나비
지상은 지금 그리움으로 자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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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 그리움이 물냄새로 피어오를 때 ― 허형만 시인의 《초여름》을 읽으며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허형만 시인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불현듯 오래된 산길 하나가 떠오른다. 사람의 발길보다 바람이 먼저 지나가고, 이름 모를 들꽃들이 저마다의 향기로 계절을 적어 내려가는 길이다.
그의 시에는 화려한 수사가 없다. 거대한 관념도 없다. 대신 들꽃 한 송이의 떨림과 나뭇잎 하나의 기울어짐 속에서 우주의 숨결을 읽어내는 섬세한 감각이 있다.
《초여름》은 불과 몇 줄의 짧은 시다. 그 짧음 속에는 초여름 한 계절이 통째로 접혀 있다.
시작 구절 “물냄새 / 비가 오려나 보다”는 놀랍다. 대개의 시인들이 하늘을 먼저 바라볼 때 허형만 시인은 냄새를 먼저 맡는다. 눈보다 코가 먼저 계절을 알아차린다. 비는 아직 내리지 않았으나 물냄새가 먼저 세상에 번져 나온다. 마치 그리움이 눈물보다 먼저 가슴에 스며드는 것과 같다.
그의 시어는 풍경의 결과가 아니라 징후를 읽는다. 이미 일어난 사건보다 다가오는 순간의 기척을 포착한다. 그 점에서 허형만 시인의 시는 풍경화가 아니라 예감의 예술이다.
이어지는 “나뭇잎 쏠리는 그림자”라는 표현 또한 인상적이다. 나뭇잎이 흔들린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림자가 쏠린다고 말한다. 실체보다 흔적을 바라보고, 사물보다 사물이 남긴 여운을 응시하는 시선이다. 이는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사물 사이를 흐르는 시간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이다.
특히,
이 시에서 압권은 “애기똥풀에 코를 박은 모시나비”이다. 나비는 꽃 위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꽃 속으로 얼굴을 묻고 있다. 마치 오랜 그리움을 만난 사람이 상대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듯, 나비는 꽃의 향기 속으로 스며든다. 그 짧은 한 장면 속에는 생명과 생명이 서로를 그리워하는 우주의 질서가 담겨 있다. 꽃은 나비를 기다렸고, 나비는 꽃을 찾아왔다. 초여름의 들판은 침묵 속에서도 수많은 만남이 이루어지는 거대한 사랑의 무대인 셈이다.
끝구절은 시인 허형만 시 세계의 정수를 보여준다. “지상은
지금 그리움으로 자욱하다” 참으로 허형만다운 문장이다. 안개가 자욱하다고 하지 않는다. 물안개도 아니고 저녁 연무도 아니다. 그리움이 자욱하다.
그 순간 자연은 풍경을 넘어 감정의 영토가 된다. 들판을 채우고 있는 것은 수증기가 아니라 기다림이고, 바람이 실어 나르는 것은 꽃향기가 아니라 보고 싶은 마음이다.
허형만 시인의 시어는 마치 산골 개울물에 씻긴 조약돌 같다. 번쩍이는 보석은 아니지만 오래 바라볼수록 맑은 빛이 우러난다. 군더더기를 모두 덜어낸 언어 속에서 외려 더 깊은 울림이 태어난다.
읽는 내내
어린 시절 초여름 저녁, 비 오기 전의 들녘을 걷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어디선가 흙냄새가 밀려오고, 먼 산은 물빛으로 젖어가고,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숲 속에서 울던 시간들. 허형만 시인의 시는 바로 그런 기억의 샘터에서 퍼 올린 한 바가지 맑은 물과 같다.
그의 시는 세상을 크게 말하지 않는다. 작은 것들을 가슴으로 보듬으며 오래 바라본다.
꽃 한 송이, 나비 한 마리, 바람 한 줄기 속에 숨어 있는 생명의 비밀을 귀 기울여 듣는다.
하여, 허형만 시인의 시를 읽는 일은 한 편의 작품을 읽는 일이 아니라, 잊고 지내던 자신의 순한 영혼을 다시 만나는 일에 가깝다.
《초여름》은 짧은 시다. 그 짧음은 빈곤이 아니라 농축이다. 마치 이슬 한 방울 속에 아침 하늘이 모두 비치듯, 몇 줄의 시어 속에 계절과 그리움과 생명의 떨림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허형만 시인은 꽃을 노래하는 시인이 아니다. 꽃이 피기 직전의 침묵을 듣는 시인이다. 바람을 노래하는 시인이 아니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의 여운을 품는 시인이다.
그의 시는 초여름 들녘에 피어난 애기똥풀 한 송이처럼 소박하다. 그 소박함 속에서 독자는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그리움이라는 이름의 안갯속으로 안온히 걸어 들어가게 된다. 그것이 시인 허형만 시가 지닌 고요하고도 깊은 힘이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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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의 문장을 가진 사람 ― 허형만 시인께
산은 높아서 산이 아니라 오래 침묵하여 산이 된다
시인께서는 한평생 바람의 맞춤법을 읽고 이슬의 문장을 교정하며 꽃잎 속에 숨은 작은 우주를 번역해 오셨습니다
누군가는 언어를 쌓아 탑을 세우고 누군가는 수사를 달아 강을 건너려 하나
시인께서는 풀씨 하나 들고 계절의 심장까지 걸어가셨습니다
애기똥풀 노란 눈동자 속에서 초여름의 체온을 발견하고 모시나비의 날갯짓 한 번에 지상의 그리움을 읽어내는 분
시인의 시는 종이 위에 적힌 문장이 아니라 새벽 논둑에 내려앉은 물안개 한 줌입니다
읽을수록 말은 사라지고 향기만 남습니다
세월은 시인 머리에 흰 서리를 내려놓았으나 가슴속에는 아직도 산골 소년 하나 들꽃과 눈을 맞추며 서 있습니다
시인께서 지나간 자리는 길이 되지 않습니다
길보다 먼저 꽃이 피고 새가 울고 그리움이 둥지를 틉니다
하여 문학은 때때로 큰 강이 아니라
시인 한 분의 가슴에서 흘러나온 맑은 샘 하나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ㅡ청람
□ 허형만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