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이육사 「청포도」 ㅡ청람 김왕식

이육사 「청포도」 2026.08.24
이육사 「청포도」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청포도

시인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은 함뿍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청포도는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의 식탁이다 ― 이육사 「청포도」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포도 한 알 속에

하늘이 들어갈 수 있을까.

이육사의 「청포도」 는 바로 그 불가능한 일을 해낸다. 작은 청포도 알갱이 속에 고향의 여름과 기다림, 민족의 상처와 미래의 희망까지 함께 밀어 넣는다. 이 시의 청포도는

과일이 아니다. 아직 오지 않은 시대를 미리 익혀두는 푸른 시간의 열매다.

이육사의 생애를 떠올리면 이 시의 맑음은 더욱 놀랍다. 그는 일제강점기의 질식하는 현실을 온몸으로 통과한 시인이었다.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고, 여러 차례 투옥과 고문을 겪었으며, 끝내 베이징의 감옥에서 생을 마쳤다. 그의 삶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 현실은 쇠창살에 가까웠고, 시대는 사람에게 꿈보다 굴복을 강요했다.

그런데 그의 시는 이상하리만큼 푸르다. 이 푸름이 중요하다. 상처가 깊다고 해서 시까지 검어질 필요는 없다는 것을 이육사는 보여준다. 그는 현실의 어둠을 어둠 그대로 복제하지 않았다. 고통을 한 번 더 통과시켜 그것을 청포도의 빛깔로 바꾸었다. 이것이 이육사 시의 미학적 품격이다.

「청포도」 의 첫머리는 놀라울 만큼 평온하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한 두 행이다. 이 평온은 단순한 전원풍경이 아니다. ‘내 고장’이라는 말에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깊은 애착이 있고, ‘익어 가는’이라는 말에는 시간이 스스로 완성되어 가는 기다림의 철학이 있다.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움직임은

‘익는다’는 데 있다.

독립도, 자유도, 새로운 시대도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포도가 햇빛과 바람과 시간을 견디며 익어가듯, 한 민족의 희망 또한 오래 견딘 시간 속에서 무르익는다.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여기서 청포도는 갑자기 우주가 된다. 포도송이는 마을의 전설을 매달고 있고, 포도알 하나하나에는 먼 하늘이 들어와 박힌다. 현실적으로 포도알 속에 하늘이 들어갈 리 없다. 그런데 시는 바로 그런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언어다.

이육사의 눈에는

작은 열매 하나에도 고향의 역사와 민족의 기억과 미래의 꿈이 함께 매달려 있었다.

이것이

그의 작품 미의식 가운데 중요한 한 축이다.

작은 사물을 크게 보는 눈. 청포도 한 알을 청포도에 머물게 하지 않고, 민족의 기억과 미래까지 품는 상징으로 확장시키는 힘이다.

이어지는 장면은 더욱 아름답다.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여기에는 움직임이 있다. 바다는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는 멀리서 밀려온다. 색채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청포도의 푸름, 하늘의 푸름, 바다의 푸름, 흰 돛단배의 흰빛.

이 푸름과 흰빛은 단순한 색채가 아니다. 푸름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래의 가능성이며, 흰빛은 정결함과 새로운 시작의 이미지다. 이육사는 칠흑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시 속에서는 끝까지 색채를 잃지 않았다.

그것은 낙관이 아니라 의지다. 현실이 검다고 시인의 내면까지 검게 물들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정신의 저항이다.

그때 마침내 ‘손님’이 등장한다.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이 손님은 누구일까. 한 사람일 수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오래 기다린 벗일 수도 있다. 더 크게 읽으면 자유이고, 해방이며, 새 시대이고, 인간다운 세상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손님이 ‘고달픈 몸’으로 온다는 사실이다. 아무 고통도 겪지 않은 손님이 아니다. 긴 길을 건너온 사람이다. 여기에는 이육사 자신의 생애가 겹쳐 보인다. 감옥과 고문과 망명과 투쟁을 통과했던 시인에게 진정으로 귀한 것은 언제나 상처 없는 사람이 아니라 상처를 견디며 끝내 걸어오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청포를 입고’ 온다는 표현 역시 의미심장하다. 청포는 푸른 옷이다. 청포도와 같은 색이다. 마치 기다리는 사람과 기다림의 대상이 같은 푸른빛으로 연결되어 있는 듯하다. 청포도는 손님을 기다리며 익고, 손님은 청포를 입고 온다. 이 순간 자연과 인간, 기다림과 도착, 열매와 사람이 하나의 색깔 안에서 만난다.

시의 후반부는 더욱 따뜻해진다.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이 대목에서 기다림은 환대로 바뀐다. 이육사의 시는 투쟁의 시이면서 동시에 환대의 시다. 그가 기다리는 미래는 누군가를 몰아내고 혼자 차지하는 세계가 아니다. 함께 앉아 포도를 나누어 먹는 세계다. 손이 포도즙에 흠뻑 젖어도 좋은 세계다.

여기서

이육사의 가치철학이 선명해진다. 그에게 자유는 추상적인 정치 구호만이 아니었다. 자유는 결국 사람이 사람답게 만나고, 밥을 나누고, 열매를 나누고, 손님을 반갑게 맞는 일상의 회복이었다.

마지막 장면은 더욱 인상적이다.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놀랍지 않은가. 시인은 아직 오지도 않은 손님을 위해 식탁부터 준비한다.

이것이 「청포도」 의 가장 아름다운 정신이다. 희망은 막연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올 것을 믿고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다.

은쟁반을 닦고, 하얀 모시 수건을 준비하는 일. 아직 해방은 오지 않았지만 해방이 왔을 때 맞이할 마음부터 준비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육사의 저항정신이 가장 품격 있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총을 들고 싸우는 저항만 저항이 아니다. 절망 속에서도 식탁을 차리는 일 또한 저항이다. 폭력적인 시대가 사람의 마음까지 황폐하게 만들려 할 때, 끝까지 아름다움을 준비하는 것.

그것이 이육사의 시다. 그래서 「청포도」 에는 격렬한 구호가 없다. 분노를 직접 토해내지도 않는다. 그 대신 청포도가 익고,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오고, 식탁 위에 은쟁반과 모시 수건이 놓인다. 이 조용한 풍경 속에 한 시대의 가장 강한 저항이 숨어 있다. 시인은 현실을 소리 높여 부수지 않았다. 대신 미래가 앉을 의자를 먼저 닦아두었다.

이육사의 생애는 혹독했다. 그의 몸은 감옥에 갇혔지만 시의 눈은 끝내 먼 곳을 보았다. 시대는 그에게 절망을 강요했지만 그는 청포도 한 알 속에 하늘을 넣었다. 그것이 시인의 승리다.

「청포도」 를 숙독하면

한 가지 생각이

남는다.

사람은 무엇을 기다리며 사는가. 더 중요한 것은 그 기다림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기다린다고 말하면서 마음의 식탁 하나 마련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희망이라 부르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이육사는 이미 오래전에 보여주었다. 희망은 먼 곳만 바라보는 일이 아니다. 누군가 올 것을 믿고 오늘의 은쟁반을 닦는 일이다. 청포도는 아직 오지 않은 계절의 열매다. 그런데 이육사의 시 안에서는 이미 익어가고 있다.

미래는 그렇게 온다. 먼저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익고, 그다음 한 시대의 식탁 위에 놓인다. 「청포도」 는 단순히 아름다운 자연시가 아니다. 고통의 시대를 지나면서도 인간다운 마음을 잃지 않으려 한 한 시인의 정신적 자화상이며, 절망보다 희망을 더 오래 준비했던 사람의 푸른 유언에 가깝다.

이육사는 떠났지만 그 식탁은 아직 치워지지 않았다. 은쟁반도 그대로 있고, 하얀 모시 수건도 아직 깨끗하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도 그 식탁 앞에 앉을 자격을 묻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기다리는 손님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아직 오지 않은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작은 은쟁반 하나 닦아둘 수 있을 것인가. 그 질문까지 품을 때, 「청포도」 는

비로소 한 편의 시를 넘어 오늘의 삶을 비추는 푸른 거울이 된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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