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천상병 귀천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천상병 귀천 2025.07.13
천상병  귀천

귀천

시인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술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하늘로 돌아가는 시인의 노래

― 천상병의 『귀천』을 읽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천상병(1930~1993)은 생의 밑바닥을 딛고도 하늘을 바라본 시인이었다. 그는 정신병원과 고시원, 거리의 끝과 고독의 경계에서 ‘절망을 희망으로 환치하는 언어’를 발견했다. 그런 그가 마지막처럼 남긴 시, 「귀천」은 죽음을 노래하면서도 생을 찬미하는 순결한 영혼의 진혼곡이자 문학적 귀의 선언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는 반복은 단순한 언술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근원을 향한 선명한 귀소 본능이며, 세속적 삶의 사슬을 끊고 존재 본연의 ‘빛과 순수’로 회귀하려는 영적 비상이다. 이 반복 속에는 천상병의 ‘하늘철학’이 응축되어 있다. 그는 죽음을 삶의 부정이 아닌 ‘소풍의 끝’으로 명명함으로써, 삶과 죽음 사이의 간극을 부드럽게 메우며, 인간 존재의 안식처를 하늘이라는 은유적 공간에 둔다. 이는 고통을 외면하거나 초극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시적 초월을 꿈꾸는 삶의 철학이다.

1연의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는 덧없음의 상징인 이슬을 통해 유한한 존재들의 가벼운 연대를 그린다. “이슬”은 곧 시인의 자아이며, 새벽은 죽음 직전의 맑고 투명한 순간이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손을 잡고 함께 떠나는 따뜻한 이별로 묘사함으로써 죽음을 삶의 일부로 수용한다.

2연에서는 ‘노을빛’과 ‘구름 손짓’이라는 시적 이미지가 인도자 역할을 한다. “기슭에서 놀다가”는 생을 유희로 보는 시인의 태도다. 그는 생을 치열하게 겪었지만, 그 기억을 한없이 유순하게 감싸 안는다. 죽음은 ‘구름의 손짓’으로 초대받은 약속된 이행이며, 이는 현실 너머의 하늘나라로의 귀환을 암시한다.

3연은 이 시의 백미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는 구절은 실존의 종착지에서 돌아보는 생의 송가다. 천상병은 삶의 추억을 ‘소풍’이라 이름 붙였다. 이 말 속에는 고통도, 병마도, 궁핍도 함축된 채 정화되어 있다. 소풍이라는 단어 하나에 그의 전체 문학관과 세계관이 스며든다. 이 시는 결국 ‘죽음을 이긴 자’의 시이며, 죽음을 삶의 연장으로, 영혼의 해방으로 받아들이는 절정의 시적 명상이다.

천상병의 문학은 비참한 현실 속에서 빛나는 고결한 인간 정신을 증명한 작업이다. 그는 ‘거지 시인’이라는 수식어로 불리길 주저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품고 자신의 문학을 세속성으로부터 구별해냈다. 그의 시에는 겸허하고 투명한 영혼이 있다. 그것은 자기 고백이나 종교적 회개가 아닌, 진정한 무소유와 무위의 실천에서 나온 것이다.

「귀천」은 단순한 유언이 아니다. 이 시는 시인의 전 생애를 집약한 시적 유체이며, 독자에게는 문학이 삶을 어떻게 구원하는지를 알려주는 성찰의 경전이다. 고단한 삶 속에서 천상병은 누구보다 밝게 웃었고, 그 웃음이 시가 되었으며, 그 시는 이 세상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에게 하늘을 열어주었다.

그는 떠났지만, 그가 남긴 “아름다웠더라고”라는 한 문장은 이 땅의 모든 영혼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준다. 그 말은 삶이 견딜 만한 것이었고, 살 만한 가치가 있었으며, 다시 돌아가고 싶은 소풍이었다는 증거다. 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 작별인가.

천상병, 그는 정말로 하늘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의 시는 지금도 이 땅에서, 우리 마음속에서 살아 있다.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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