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을 닦으며 - 공초 14 ㅡ 시인 허형만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녹을 닦으며 - 공초 14 ㅡ 시인 허형만 2025.09.18
□ 허형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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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을 닦으며 - 공초 14
시인 허형만
새로이 이사를 와서
형편없이 더럽게 슬어 있는
흑갈빛 대문의 녹을 닦으며
내 지나온 생애에는
얼마나 지독한 녹이 슬어 있을지
부끄럽고 죄스러워 손이 아린 줄 몰랐다
나는, 대문의 녹을 닦으며
내 깊고 어두운 생명 저편을 보았다.
비늘처럼 총총히 돋쳐있는
회한의 슬픈 역사 그것은 바다 위에서
혼신의 힘으로 일어서는 빗방울
그리 살아온
마흔세 해 수많은 불면의 촉수가
노을 앞에서 바람 앞에서
철없이 울먹었던 뽀오얀 사랑까지
바로 내 영혼 깊숙이
칙칙하게 녹이 되어 슬어 있음을 보고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온몸으로 온몸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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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만 시인
1945년 전남 순천 출생. 중앙대 국문과 졸업. 1973년 『월간문학』 등단. 시집 『불타는 얼음』『그늘이라는 말』『영혼의 눈』 등 여러 권과 활판시선집 『그늘』, 중국어시집 『許炯萬詩賞析』, 일본어시집 『耳を葬る』. 평론집 『영랑 김윤식연구』『시와 역사인식』 등 다수. 영국 IBC 인명사전 등재(2001~2002). 한국시인협회상, 영랑시문학상, 월간문학동리상, 한성기문학상 등 수상. 한국시인협회 심의위원장 역임. 국립목포대학교 인문대학장, 교육대학원장 역임. 현재 목포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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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만 시인의 시 〈녹을 닦으며〉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허형만 시인의 시 〈녹을 닦으며〉는 단순히 대문의 흑갈빛 녹을 닦는 일상의 장면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을 개인의 생애와 민족적 역사에 대한 반성으로 확장시킨 깊은 성찰의 시다. 작품은 외부적 사물과 내면의 자아를 연결하는 상징적 장치를 통해, 존재의 근원적 부끄러움과 구원의 갈망을 드러낸다. 여기에는 작가가 일생 동안 추구해온 삶의 가치철학과 시적 미의식이 선명히 스며 있다.
시인은 새로 이사한 집의 대문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녹을 닦는 순간, 단순한 청소가 아니라 자기 생애 전체를 성찰하는 의식으로 전환한다. “내 지나온 생애에는 얼마나 지독한 녹이 슬어 있을지”라는 고백은, 삶 속에 남겨진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의 흔적을 마주하는 용기이며, 이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 역사적 책임의식으로 확장된다. 따라서 녹을 닦는 행위는 곧 자기 정화와 민족적 참회로 겹쳐진다.
작품 속 “회한의 슬픈 역사 그것은 바다 위에서 / 혼신의 힘으로 일어서는 빗방울”이라는 대목은 시인의 역사 인식과 미학적 감각을 압축한다. 그는 개인의 불면과 사랑의 흔적조차도 ‘역사의 빗방울’과 겹쳐 본다. 이는 개인적 삶이 역사와 분리될 수 없다는 의식을 보여준다. 허형만은 민족사의 비극 속에서 개인의 삶 또한 녹슬어 왔음을 자각하며, 그 부끄러움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시 속에 새긴다. 그의 시적 태도는 단순한 반성이 아니라 적극적인 자기 갱신의 몸짓이다.
허형만 시인의 시적 미의식은 일상의 사물을 본질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데 있다. 대문의 녹은 단순한 오염물이 아니라, 인간 영혼의 깊은 곳까지 스며든 회한과 죄의식의 상징이다. 시인은 그 녹을 닦는 구체적 행위를 통해 영혼을 정화하려는 자기 구원의 몸짓을 형상화한다.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 온몸으로 온몸으로 문지르고 있었다”라는 구절은 시인의 치열한 자세를 보여주는 동시에, 언어와 행위가 일치하는 미학적 긴장을 형성한다.
허형만 시인의 작품 세계는 늘 인간과 역사, 자연과 존재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성찰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데 있다. 그는 과거의 상처와 부끄러움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온몸으로 껴안으며 정화하려는 태도를 보여준다. 이는 곧 삶의 가치철학으로 이어지는데, 인간은 누구나 녹슬어 가지만, 그 녹을 끊임없이 닦아내려는 노력 속에서 참된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시는 현실 도피가 아니라 자기 성찰과 민족적 책무를 다하는 치열한 행위였다.
〈녹을 닦으며〉는 작은 일상에서 거대한 역사와 영혼의 진실을 담은 시다. 시인은 녹슨 대문 앞에서 자기 생애를 응시하며, 개인과 역사를 교차시켜 치열한 자기 반성의 정신을 드러낸다. 그에게 시란 곧 ‘문지름’의 행위이며, 그것은 부끄러움과 회한을 씻어내고 새로이 서기 위한 인간적 실천이다. 허형만 시인의 시적 미의식은 사소한 사물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고, 그 속에서 존재의 진실을 길어 올리는 데 있다. 따라서 이 시는 단순히 개인의 회고를 넘어, 민족의 역사 앞에 서 있는 지식인의 성찰이자, 동시에 보편적 인간의 숙명적 과제 ― 끊임없이 녹을 닦아내는 영혼의 노동 ― 을 노래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치열한 반성과 정화의 정신이야말로 허형만 문학이 지향한 본질이며, 그것은 독자로 자기 삶의 녹을 닦아낼 용기를 불러일으킨다.
ㅡ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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